< 12사도 순례길-천사대교-퍼플섬-목포 >
식사 후 우리는 선착장으로 가서 9시에 출항하는 병풍도행 배를 탔다. 대형 트럭을 포함한 각종 승용차도 함께 실은 배앞머리엔 대형 붉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 이채로왔다. 거기에는 "맨드라미정원 꽃양귀비보러 오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나 예쁘기에 그러는지 나도 궁금해졌다. 송도항을 출발한 배는짙은 구름이 덮인 바다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뒷쪽에 게양된 태국기가 바다 바람에 힘차게 날리는 모습을 배겅으로 사진도 찍었다. 배는 30여분만에 병풍도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승용차를 타고 병풍교회에 도착했다. 교회가 있는 야트막한 언덕 전부가 바로 뱃머리의 플래카드에 씌어 있던 맨드리미정원이란다. 그러나 지금은 초여름이라 맨드라미 대신 새빨간 꽃양귀비가 언덕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벌써 일부 꽃들은 지기시작했지만 언덕 위의 붉은 물결은 여전히 아름다왔다. 그 때가 오전9시반쯤 됐는데도 구름이 약간 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따갑게 느껴졌다. 그나마 살랑살랑 부는 해풍이 있어 조금 참을만 했다.
병풍도는 6.25전쟁때 근처의 섬들 중 인명피해가 가장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회는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고 희생자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1951년8월에 세워졌다. 아울러 '끔찍한 죽임을 당한 문준경전도사의 순교신앙을 이어가려는 순교기념교회이기도 하다'고 교회앞 돌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이 내용을 보니 앞서 들렸던 교회의 기념관 벽에 적혀있던 문전도사 순교 당시의 끔찍했던 참상과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 내용< 위 검은판에 적힌 힌색 글 >에 온 몸이 떨렸다. 나는 잠시 묵상 후 교회에서 나와 맞은 편 언덕에 있는 공원에 오르니 앞에는 물이 빠져나간 넓디넓은 갯벌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을의 집 지붕들이 모두 분홍색인 것도 이채로왔다.
맨드라미가 피는 9-10월이면 340만여 그루의 맨드라미에서 1억송이가 넘는 각양각색의 꽃이 피어 언덕을 뒤덮는다고 한다. 매드라미 축제도 매년10월에 열린다. 드러난 갯벌 바닥에는 돌 무더기들이 맞은편 섬까지 거인의 발자국처럼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물이 들어오면 징검다리로 활용하는 노두(路頭)길 같았다. 이 섬의 북쪽 끝 해안의 절벽바위가 병풍을 닮아 섬 이름도 병풍도가 됐다고 한다. 맨드라미꽃들이 펼치는 장관은 못 봤지만 꽃양귀비의 빨간색 물결 또한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공원을 내려와 10여분만에 갯벌 가운데 있는 대기점도 선착장 근처에 시멘트로 지은 작은 집, 예배당에 도착했다. 유명한 12사도의 순례길이 시작되는 베드로의 집이다. 만조 때면 물에 잠기는 노두(路頭)길로 연결되는 5개의 섬에 12사도의 이름을 붙인 소형 예배당들을 짓고 길을 만들었다. 이 예배당들을 다 걸으면 12km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본 뜬 것으로 '한국의 섬티아고', 12사도 순례길'이라고도 부른다. 노두길로 연결된 섬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 등 5개이며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딴섬을 잇는 노두길은 지금도 만조 때는 잠긴다. 나는 베드로의 집에서 기념 사진도 찍고 예배당 안에서 잠시 기도도 드렸다. 그리고 일행과 함께 번호 순서대로 들렸다. 긱각의 예배당은 고유의 이름이 있고 작가나 토지 기증자의 뜻에 따라 특별한 의미도 부여받았다.
예를 들면 < 1 베드로의 집, Petrus , 건강의 집> <4 요한의 집, Joannes, 생명평화의 집> <12 가롯 유다의 집, 지혜의 집>처럼 명명이 됐다. 또 <4번 요한의 집>은 계단에 예배당을 지키는 염소상이 있고 예배당 안에서 창으로 내다보면 산소 하나가 보인다. 이는 땅을 기증한 할아버지가 키우던 염소와 부인의 묘소이다.
유일한 외국인 작품인 <5번 필립의 집> 지붕은 나무 판자를 물고기 비늘처럼 빗대어 곡선 모양으로 뾰족한데 프랑스 사람 장 미셀이 설계했다. <6번 바들로매>의 집은 호수 가운데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유리를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지혜의 집'이란 이름으로 지어진 <12번 가롯 유다의 집>은 외진 곳에 떨어진 섬 언덕에 있다. 이 곳은 물이 들어오면 못 가기 때문에 딴섬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집 이름도 외딴 섬에서 많은 생각과 궁리를 해보라는 뜻으로 <지혜의 집>이라고 했단다.
우리는 차를 타고 가거나 걷거나 하며 12사도의 이름이 붙은 소형 예배당 12개를 모두 돌아봤다. 다만 마지막엔 순서를 바꿔 <10번 타대오의 집>에서 약2시간40분만에 12km의 순례(?)를 모두 마쳤다. 그 때가 오후1시였다. 근처에 있는 뷔페식 식당에서 백반, 생김 부침개, 생김국, 라면 등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생김으로 끓인 김국이 특히 맛있어 2그릇이나 먹었다. 그런데 이 집은 음식값을 달라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는다. 우리도 두 사람이 적지 않은 돈을 헌금하고 식사와 커피, 빵 들을 맛있게 즐겼다. 이로써 병풍도에서 할 일은 모두 마치고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악도 선착장으로 배를 타러 갔다.
그런데 기억에 남을 중요한 한 가지 일, 분실한 물건도 찾았다. 어제 오후 증도면 사무소로 그것이 습득물로 들어왔단다. 거기에 있는 연락처를 보고 오전에 면사무소 직원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우리가 병풍도에 있다니까 출장나오는 직원편에 증도면사무소 병풍도 지소로 가져와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비록 물건의 값어치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정말 고마왔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말로만 들어왔던 '전라도의 정직한 인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착장 부두 주차장에서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지만 하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Patrimonito(빠뜨리모니또) 가 명기된 그 표지판 하단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설명문이 있었다. 내용은 '소악도는 2009년과 2016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12년7월26일엔 신안, 보성-순천갯벌 등 4개 갯벌이 세계유산이자 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설명문 옆에는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봉사단의 영문설명도 병기돼 있었다. 정말 우리의 셰계적 유산들이 자랑스러웠다. 아울러 잘 보전해 후대로 물려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배에 올랐다.
왼쪽 해안 바위에 있는 한글과 영문자 대형 하얀 글자판이 돋보였고 오른쪽 멀리 떨어진 수평선 위로는 1004대교가 어서 오라고 부르는 듯 보였다. 승용차까지 잔뜩 실은 유람선은 잔잔한 물살 위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달렸다. 출항한지 약30분만에 우리는 천사대교 중앙교각 상판 바로 아래를 통과했다. 서서히 다가왔다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1004대교의 위용에 감탄사를 연발하다보니 배는 어느 새 반대편 송공항 선착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승합차에 옮겨 타고 1004대교 위를 달려 암태도 신석리 천사대교 전망대로 갔다. 조금 전 다리 아래의 물길에서 쳐다봤던 다리를 승용차로 달리니 비행기를 탄 느낌이었다. 거기서 잠시 쉬며 1004대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다시 한번 다리의 위용에 놀랐다. 그리고 이처럼 거대한 다리를 지은 인간의 재주에도 감탄했다. 이 다리는 총길이가 10.8km로 국내 네번째로 길다.
우리는 30분쯤 달려 안좌읍 읍동리 김환기화백(1913-1974)의 고택에 도착했다. 이 집은 목재를 1920년대에 백두산에서 날라와 지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최북단의 나무와 서남단의 흙이 합쳐진 하나된 조국과 같은 집이란 생각이 스쳐갔다.
여기서 태어난 김화백은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국내는 물론 세게적 유명화가로 발돋움했다. 김화백은 이 집에서 유아기와 청년기를 보내며 작품활동을 했고, 재현된 작업실에선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고택에 깃들어 있는 김화백의 체취를 뒤로하고 우리는 20분쯤 후 안좌면 소곡리 퍼플섬에 도착했다.
안좌도의 두리마을과 박지도, 반월도 등을 이어주는 1462m의 보라색 나무다리로 잘 알려진 이 섬은 주변 풍경도 좋다. 다리뿐만 아니라 마을의 지붕이나 오가는 버스,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보라색이다. 지붕은 2019년에 보라색으로 칠했다. 심은 화초들도 라벤더 등 보라색 꽃을 피우는 것들이다. 붉운 빛을 띄우며 서편으로 기우는 저녁 무렵의 햇살이 보라색과 섞여 만들어지는 묘한 분우기를 즐기며 우리들은 퍼플교 중간까지만 갔다 발길을 돌려 목포로 향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목포시내로 들어왔다. 파란색 네모 바탕에 크게 새긴 목포역 간판이 다정스레 다가오는 큰 길을 지나 우리는 예약해둔 삼합맛집으로 갔다. 삼합은 호남음식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영남출신인 나도 삼합과 친해진지 오래다. 툭 쏘고 맵기까지 특유의 맛때문에 친해지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좋았다. 모두들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폭을 몇 잔씩 마시며 마음껏 즐겼다. 특히 나는 운전하느라 술 한 잔 못 마신 후배 동료와 마주 앉아 몇 잔 더 마셨다. 김치에다 홍어와 돼지고기를 싸서 먹지만 따로따로 먹어도 역시 일미였다. 이어 나온 홍어애탕 또한 빠질 수 없는 별미.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 호텔로 갔다. 넓은 도로 위를 가로질러 설치된 루미나리에의 보랏빛, 초록빛 등 찬란한 불빛이 밤거리를 아름답게 밝혀주고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같은 방을 사용한 후배 동문과 함께 근처에 있는 목포항 부두 길을 산책했다. 정박한 수많은 고깃배들 너머로 길게 누운 듯한 삼학도가 보였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 김대중기념관 건물도 보였다. 그렇지만 뱃사공은 보이지 않았고 애조 띤 '목포의 눈물'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897년 개항 후 목포항 부근의 택지개발이나 도시계획은 일본사람들에 의해 대부분 이루어졌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도 항구 부근이었다고 한다. 호텔로 돌아와 일행과 함께 식사하러 나갔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음식점 근처 오거리 골목에 있는 유명한 빵집 코롬방제과점에서 빵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단체로 국내여행을 하면서 아침식사를 전원이 빵으로 하기는 흔치 않지만 우리들을 모두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골라 온 여러 종류의 빵들은 과연 맛이 좋았다.
이 제과점은 1949년에 영업을 시작한 유서깊은 곳이지만 상호 '코롬방제과'에는 씁쓸한 사연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건물 주인이 임대계약을 해지한 후 같은 장소에서 제과점을 경영하면서 그 이름을 상표등록까지 해버렸다. 졸지에 일터를 잏은 종업원 일부가 이 건물에서 100m쯤 떨어진 데다 제과점을 내고 상호를 코롬방의 영문자 이니셜만 사용해 '씨엘비 베이커리'로 한 것. 씨엘비 가게 앞 대형유리창 한편에 <목포 코롬방제과점 2005-2019년운영>이라고 작게 쓴 입간판이 서있어 묘한 뒷맛을 느끼게 한다. 다만 두 집 모두 여전히 성업중이어서 서로가 '윈-윈'한 셈이라고 해야겠다.
식사 후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일본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에 들렸다. 안내판엔' 舊 東本願寺 木浦別院이며 1930년대에 일본사찰의 법당으로 지어졌고 해방후에는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목포중앙교회로 사용됐다'고 적혀있었다. 현재는 오거리문화센터로 각종 전시나 문화행사기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1980년 5.18 민주화운동과 1987년 6.10민주 항쟁때는 상징적 장소였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어 우리는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유달산 자락 옛 일본영사관건물로 갔다. 건물 바로 아래 입구 넓은 도로가에 <國道 1.2號線起點> 기념비가 우뚝하게 서있었다. 여기서 북으로는 신의주로 가는 1번국도. 동으로는 부산으로 가는 2번국도가 시작된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두 국도의 종점까지 막힘 없이 오갈 수가 있을까?
붉운 벽돌 2층 건물인 옛 일본영사관은 1900년 건축됐다. 1897년 목포개항부터 일본은 목포진 건물을 임시로 사용하다 이 건물을 지어 영사관으로 사용했다. 일제의 경제침탈과 식민통치의 상직적 유물인 이 건물은 해방 후 한때 목포시청으로 사용되는 등 여러 차례 이름이 변했고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 제1관으로 사용되고있다. 건축사나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사적289호로 지정됐다. 영사관건물 뒤 유달산엔 바위를 파고들어간 아주 길고 튼튼한 방공호가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된다. 영사관 건물을 나오면 큰길가에 일본인들이 다니던 목포 일본 교회 건물의 일부가 남아있다.
그 교회 바로 옆 맞은편에는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파란 대뭉의 카페가 있다. 그집 벽돌담장엔 <120년된 적산가옥 카페>라고 쓰인 타원형 널판 현판이 걸려있다. 정원도 예쁘게 가꾸어진 이 집은 당시 일본 상류층의 가옥취향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데 입구에 붙은 '음료수를 사 마실 분만 들어오세요'라고 쓴 안내문이 이채로왔다. 우리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계단으로 2층까지 올라가 살펴보고 내려와 아이스커피 몇 잔을 주문해 더위를 식혔다.
카페를 나와 40분쯤 달려 고하도 목포해상케이블카 승강장에 도착했다. 승강장에서 유달산 정상 부근의 중간기착지를 지나 북항 승강장까지 이어지는 3.23km의 하늘길이다. 쾌청한 날씨여서 아래에 펼쳐지는 바다와 유달산, 목포 시가지와 해안선, 근처에 산재한 크고 작은 섬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낮게 뜬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게 바다를 가로지른 천사대교와 구줄구줄 펼쳐지는 해안선 백사장, 물 위에 떠있는 무수한 섬들이 어우러져 대자연과 인간이 합동으로 연출하는 한편의 향연같았다. 중간 기착지 승강장에서 내려 유달산 정상의 기암괴석들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전망대에서 주변 경관을 구경하다 약 30분만에 북항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그 기분좋음은 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제대로 정확히 전달할 방법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케이불카를 타고 즐긴 일행은 20분쯤 차로 이동해 북교동성결교회에 들렸다. 1924년 설립된 이 교회에서 문준경전도사는 1925년에 입교, 예수님을 영접했다. 초현대식 건물로 개축된 신관 건물 뒤에는무성한 담장이에 덮인 고색창연한 구관도 보였 는데 두 건물은 옥상 가교로 연결돼 있었다.
이어 차로 10분거리에 있는 양동교회를 방문했다. 이 교회는 1897년 유진 벨 선교사가 세운 목포 최초의 교회다. 처음 이름은 천막을 치고 시작한 '목포교회'였다. 그 후 교우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신도들이 유달산에서 석재를 운반해와 석조건물로 지었다. 이 건물의 양쪽에는 아치형 출입구가 있는데 한쪽 아치 상단에는 태극 무늬와 함께 한자로 대한융희사년(大韓隆熙巳年)이, 다른쪽 아치 에는 한글로 '주강성일일천구백십년'이라고 적혀있다. 한자가 쓰인 문으로는 남자들이, 한글이 쓰인 문으로는여자들이 들어와 떨어져 앉아 예배를 드렸었다고 한다. 우리는 미리 연락을 해 둔 교직자의 도움으로 평일인데도 본당문을 열고 들어가 각자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선 일행 중 유일한 佛子인 선배의 헌신적 도움으로 여러 컷의 단체 기념촬영을 할 수 있었다. 이 교회 방문때도 역시 그랬다. 우리는 15분쯤 차를 달려 유명한 음식점 장터로 갔다. 시간은 정오였다. 참게살 비빔밥이 일미인 맛집이다. 게살만 발라 양념을 해서 따뜻한 밥에 부어 비벼 먹는 데 정말 새로운 맛이었다. 일행중 몇명과 막걸리 딱 한잔씩만 반주했다.
맛있게 식사 후 우리는 갓쓴 사람의 열굴 형상으로 유명한 갓바위 공원으로 갔다. 화산재 성분이 많은 해변의 바위가 바닷물과 염분 머금은 해풍 등의 영향으로 오랜 세월 풍화되어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병든 아버지의 약값을 벌기 위해 먼길을 떠났던 아들이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삿갓을 쓰고 슬픔과 후히의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지키다가 둘다 이런 바위 모습으로 남게 됐다는 전설이있다. 이 갓바위는 2009년 천연기념물500호에 지정됐다.
바닷가에 설치된 나무 데크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곧 바로 국립해양유산연구소에 도착한다. 우리는 연구소를 방문, 그곳에 전시된 수많은 해양인양유물들을 구경했다. 그 중에는 1975년 어부에 의해 발견돼 오랜 기간에 걸쳐 인양-복원된 신안해저유물선과 그 배에 실렸던 수천점의 도자기들도 있었다 원형대로 복원된 나무배의 크기와 엄청난 양의 유물들에 또 한번 놀라며 2박3일에 걸친 여정을 마무리 했다. 남도 여행을 마치면서 크게 느낀 점은 ' 절경과 맛있는 음식들을 즐긴 것 외에 목숨까지 돌보지 않고 믿음과 사랑을 실천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몸으로 체감했다.'는 점이다. 초여름 날의 하루가 다 저물어 가는 오후6시10분 우리들은 사흘전 출발했던 서울지하철 교대역에 도착했다. < 大尾 >
< 2024년6월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