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20리-잔도 10리 절경에 반해
한탄강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했을지도 모를 결례나 허물까지도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올겨울 최고의 혹한이 몰아쳤던 1월13일 한탄강을 찾았다. 지나간 시절 같은 회사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동료 다섯이 뭉쳐서 갔었다. 잠실 송파나루 근처를 출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오른쪽에 받으며 한 시간 반을 북으로 달려 도착한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상사리 한탄강 태봉대교 주차장. 번지점프 장소로도 잘 알려진 이 다리에서 나는 16년 전 여름 친구들과 번지점프를 하고 래프팅을 즐겼던 추억이 새롭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시작하는 한탄강 ‘물윗길’을 걸었다. 이 길은 꽁꽁 언 한탄강위에 부교(浮橋)처럼 설치된 구불구불한 길이다. 중간 중간 강가 둔치로 나가기도 하면서 한탄강 주상절리길이 시작되는 순담계곡까지 계속된다. 총거리는 8km이지만 물위를 걷는 구간은 2.4km다. 길의 양쪽 얼음위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하얗게 덮여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하얀 눈길은 간간이 물살이 급해 얼지 않은 곳에선 끊어진다. 소리를 내며 바위사이를 흘러가는 강물과 하얗게 언 구간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아득한 태고에 이 땅이 열릴 때 땅을 뚫고 솟아오른 펄펄 끓는 바위물이 만물상 같은 형상들을 만든 후 몸을 식히려고 바다를 향해 좌충우돌 내달렸던 길. 얼마나 급히 달려갔길래 기기묘묘한 흔적들을 좌우 절벽 곳곳에 남겨두고 갔을까? 끓는 용암이 급히 떠나며 남겨둔 따스함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 앞에선 영하13도의 혹한도 한기를 잃는가 보다.
화산암지대인 철원평야를 가로지른 한탄강은 그 옛날 용암이 흘러내려가며 생긴 협곡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한탄강은 평평한 들판에 깊게 구불구불 패인 계곡바닥을 흘러간다. 강물에서 보면 양쪽은 절벽을 닮은 바위벽이 병풍처럼 바짝 붙어서있다. 그 절벽엔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이어져 절경을 이룬다.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 각종 동물도 보이고 꽃도 보이며 금강산도 나타난다. 이런 아름다움과 지질학적 특이성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발열체크를 하고 입장권을 사서 태봉교 아래 강으로 내려갔다. 입장료는 일반 10,000원, 65세 이상 또는 감면대상지는 5,000원이다. 그러나 일반인은 5,000원, 감면대상자는 2,000원짜리 상품교환권을 주는데 이는 현지에서 현금처럼 사용된다. 결국 입장료는 5,000원과 3,000원인 셈. 모래톱에서 얼음위에 설치된 부교로 들어가는 곳엔 터널형태의 짤막한 관문이 있다. 부교양쪽의 얼음판엔 ‘결빙상태가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있다.
물윗길은 강을 따라 이어지는데 중간 중간 안내인이 있거나 안내표지가 세워져 있다. 보통의 강에는 강 양쪽에 수면보다 높은 제방이 있지만 한탄강은 높은 바위절벽의 아래에서 흐른다. 대신 크고, 작고, 높고, 낮고, 뾰족하거나 둥근 바위들이 빚어내는 자연의 교향곡이 펼쳐진다. 천인단애의 수직벽도 나오고 잘게 쪼갠 장작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듯한 곳도 있다. 그런데 강 양쪽 절벽 아래 몇 군데에 경비초소를 닮은 직육면체의 구조물이 쌍으로 있어 궁금했는데 양수시설이란다. 농경지보다 낮은 곳을 흐르는 한탄강물을 이곳에서 끌어올려 철원평야를 적신단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겨울햇살이 하얀 눈밭에 반사돼 눈부신 곳도 있었다. 더 가다보면 흘러내리는 물이 얼어붙은 수직의 빙벽도 만난다. 또 절벽에 가린 응달을 지날 때는 간간이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몸을 움츠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깊은 계곡 바닥인데다 햇살이 비쳐 별로 춥지가 않았다. 혹한에 대비해 입고 온 보온용 두터운 겨울옷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숨고르기도 할 겸 양지바른 강가 너럭바위 곁에서 준비해간 간식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걸음을 계속했다.
물윗길을 가다보면 강을 가로지른 큰 다리나 보행용 좁은 다리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그들 중엔 승일교도 있다. 6.25전엔 북한이었던 곳이어서 다리의 북쪽 절반은 북에서 지었고 나머지 절반을 수복 후 남에서 1958년에 완성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을 딴 승일교(承日橋)라 불리거나 6.25때 여기서 전사한 박승일대령을 기리기 위해 승일교(昇日橋)로도 불린단다. 현재는 그 옆에 현대적 공법으로 세운 아치형 철근구조 한탄대교와 나란히 있다. 승일교 바로 옆에는 산모양의 인공폭포가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 거대한 빙폭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앞 광장엔 눈을 모아서 만든 공원도 있어 사진촬영 명소로 각광받는다.
승일교를 지나면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쉬어갔다는 고석정이 암벽 아래에 바짝 붙은 듯 보였다. 조선시대 후반엔 양주의 의적 임꺽정 무리가 이 정자근처에서 은신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는 정자다. 정자 바로 앞엔 하늘로 불끈 솟은 커다란 바위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폭을 달리하며 굽이쳐 흐르는 한탄강은 고속정 부근에서 지류 하나를 만나 함께 순담계곡으로 흐른다. 발밑의 굵은 돌멩이나 바위를 조심하며 둔치 길을 가다 마지막 부교를 건너면 물윗길이 끝나는 순담계곡이다. 태봉교를 출발한지 3시간40분 걸렸다. 이 물윗길은 3월까지만 개방된다.
둔치 옆 언덕공터 간이음식점에서 어묵탕과 잔치국수, 그리고 막걸리로 좀 늦은 점심을 즐겼다. 그리고 순담매표소에서 다시 입장권을 사서 한탄강 주상절리길 일부구간에 설치된 잔도(棧道)로 들어갔다. 지난해 11월19일 개통된 3.6km의 철제 다리로 드르니마을까지 이어진다. 길이와 높낮이를 달리하는 다리 13개가 이이지며 전망대도 3개있다. 강의 북쪽 절벽에 바짝 붙여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설치돼 강바닥과 건너편 암벽의 절경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잔도구간은 주상절리가 절경인데 특히 순담매표소에서 약1km 정도가 제일 좋다고들 한다. 비교적 평탄해서 전구간이 걷기 쉽다. 도중에 설치된 스카이전망대와 바닥이 유리로 된 길, 원통모양의 지붕이 씌워진 ‘2번 홀길’등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지질학 용어인 절리(節理)는 바위가 녹은 뜨거운 용암이 지상으로 분출된 후 굳어지면서 생긴 틈이 풍화작용으로 넓어져 생긴다고 한다. 형태에 따라 주상, 판상 등 다섯 종류로 분류하는데 한탄강은 6각형 기둥모양인 주상(柱狀) 절리가 잘 발달됐다.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중요한 곳이어서 환경단체들의 ‘설치 반대’가 극심했던 이유가 짐작이 간다. 어렵게 설치된 것인 만큼 철저한 사후관리로 추가 환경훼손은 막아야겠다. 철원군은 이를 위해 오전9시부터 오후4시까지 30분 간격으로 300명씩만 입장시킨다. 다만 겨울철엔 오후3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이 곳도 입장료는 물윗길처럼 10,000원인데 5,000원짜리 상품교환권을 준다. 한편 태봉대교에서 드르니마을 주차장까지는 40분, 순담계곡에서 드르니마을 주차장까지는 30분 간격으로 입장권을 가진 사람에게 무료 셔틀버스가 왕복으로 운행된다. 1월1일과 매주 화요일, 설날, 추석 당일엔 휴무다.
드르니마을 매표소에 도착하니 오후4시였다. 오전9시반에 태봉대교 아래에서 시작한 우리들의 한탄강 트레킹은 얼어붙은 강물 위와 갈대숲 무성한 둔치, 그리고 절벽에 매어단 듯 만든 잔도를 지나 끝이 났다. 마음씨 좋은 택시기사의 배려로 다섯이 함께 타고 우리들의 승용차가 기다리는 태봉대교 주차장으로 달렸다. 택시기사의 뜨거운 철원관광사랑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다. 한 뼘쯤 남은 저녁 해가 우리더러 또 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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