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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지리산둘레길 걷기④, 完 > 방광∼산동∼계척∼주천 : 29km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1. 9. 2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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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情豊饒 넘치는 山河 돌아 원점에!

 

우리가 잔 마을의 이름이 참새미골이란다. ‘좋은 샘이 있는 골이란 뜻일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다운 이름이다. 난방이 잘 된 방에서 잔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뿐했다. 약간 찬 기운이 느껴졌지만 상쾌한 산중의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집 뒤의 논엔 안개가 내려앉아 하얗다. 손 크고 인정 많은 젊은 주인여자덕분에 푸짐한 아침상을 받았다. 그리고 산길에서 마시라며 오미자 원액을 우리들의 물통에 타주고 뽕잎부침개도 듬뿍 싸 주었다. 사람 좋은 주인여자의 와병중인 남편이 속히 완쾌되기를 빌면서 730분에 길을 떠났다.

 

 

민박집 바로 옆 마을회관의 큰길 쪽 공터에 공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납작 호박을 닮은 타원인데 높이가 내 키보다 높았다.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바위란다. 원래는 산의 계곡에 있었고 무당들이 굿을 하던 바위였단다. 언제 이곳으로 옮겨왔는지는 모르지만 오가는 길손들의 많은 소원을 이루게 해주려는 뜻인 것 같았다. 둘레길은 바위 건너편의 유원지 시설을 지나면서 바로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산자락을 따라 30여분을 가니 지금은 버려져 칡덩굴과 잡초만 무성한 묵정밭들이 많이 보였다. 소득이 높아진데다 젊은 사람들이 떠난 농촌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느 양지바른 묵정밭엔 대규모 태양열집열판들이 설치돼 있었다. 또 좀 더 걸으니 이번엔 넓은 감나무 과수원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감들이 가을의 정취를 돋아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첨단 과학기술과 재래의 농법이 병존하는 현장이었다. 과수원엔 풀이 무성하게 자랐지만 감은 대풍작이었다. 감나무 아래 풀 속에 있는 벤치에서 휴식하며 한중한(閑中閑)을 즐겼다. 길손들을 위한 주인의 배려가 고마웠다.

 

 

 

넓은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니 예쁜 비각(碑閣)안에 조그만 석불입상이 안치돼 있었다. 그 옆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라는 안내판이 서있었다. 1000년을 넘는 세월동안 같은 자리를 지킨 돌부처에게 그동안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즐거운 것인가도 묻고 싶다. 우리처럼 숱하게 오가는 길손들을 돌부처는 무궁한 세월동안 또 지켜보겠지. 아직 오전9시가 안 된 때라 산봉우리들은 포근한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산골짝 다랑논에는 고개 숙인 벼가 알차게 영글어 가고.

 

 

 

돌부처를 지나 20여분을 가니 산골에선 볼 수 없는 멋진 마을에 닿았다. 마을입구 조각공원 잔디밭엔 거인형상을 한 대형 조각 작품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독특한 형태여서 예술에 문외한인 내게도 예술작품처럼 느껴져졌다. 마을길도 넓고 깨끗하게 포장이 돼있었다. 바로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예술인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우리는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방향으로 한참동안 걸어갔다. 마을의 끝까지 가서야 산 아래쪽에서 새집을 짓는 공사장 인부들을 만나 바른 길을 찾았다. 우리들은 애꿎게 이정표만 탓하며 마을입구까지 되돌아 나와서 걸었다. 길가에 서있는 마을약도엔 아직도 추가 입촌(入村)을 받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산골마을을 차고앉은 국적불명의 현대식 건물들이 과연 예술일까? 예술인들이라면 꼭 이런 집에서 살아야 되는 것일까? 주변의 자연환경에 거슬리거나 튀지 않는 주거형태는 없을까? 그렇지만 양지바른 산자락에 자리 잡은 예술인마을에서 내려다보는 가을들판과 안개에 감싸인 산은 정말 장관이었다.

 

 

 

예술인마을을 벗어나 큰 도로를 따라 10여분을 가니 기품(氣稟)이 느껴지는 낙락장송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난동마을에서 매년 당제를 지내는 소나무다. 지난 2009년 전라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400, 높이 16m의 거목이었다. 바쁠 것 없는 나그네들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쉼터였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하면서 대자연이 주는 생기도 함께 마셨다. 스마트 폰의 사진기로는 이 멋진 낙락장송의 기품 있는 모습을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었다. 2차선 포장도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눈앞의 산을 넘어가고 있다. 우리도 안개 걷힌 이른 오전의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길은 점점 높이를 더해 가는데 아스팔트 포장 국도는 계속 구불구불 산으로만 우리를 데려간다. 은근히 숨도 차고 힘도 든다.

 

 

 

그렇게 한없이 오르다보니 둘레길이 국도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군데군데 시멘트 포장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비포장 임도였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우리를 따라 함께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경사가 심하진 않지만 무척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쉬며 걷기를 1시간20분쯤 하니 나무로 아담하게 지은 원두막이 나왔다. 아직 고개 마루엔 못 미친 곳이지만 우리는 원두막 마루에 둘러앉았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와있던 손님은 우리들의 부름에도 끝내 사양하고 먼저 산길을 올라갔다.

 

 

우리는 간식거리들을 펼쳤다. 마음씨 좋은 민박집 아줌마의 정성이 깃든 뽕잎전과 어젯밤 남겨두었던 소주 한 병, 오미자물이 듬뿍 들어있는 생수가 전부지만 푸짐한 간식이다. 서로 아껴가며 나누는 음식들이 그 맛을 더했다. 그 위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즉석 사다리타기로 승자가 한 잔을 더 마실 수 있게 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즐거움만 가득한 산길이었다. 원두막 옆 잔디밭에 놓인 의자를 겸한 넓적한 돌 판에는 재미있는 경구들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멋지고 의미심장한 글들이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란다.”

 

 

 

원두막을 떠나 20분쯤 올라가니 나무 데크로 된 탁 트인 전망대가 우리를 반겼다. 거기에서 조금 더 가니 정말 멋진 정자가 고개 마루를 지키고 있었다. 나무에 가려 전망은 안 좋았지만 시원한 바람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정자 옆 세 갈래 길에 구리재라는 이정표가 서있었다. 해발 500m쯤 되는 고개다. 난동마을 앞 낙락장송 그늘을 떠난 지 2시간20분만이다. 힘은 들었지만 즐거웠던 산길이었다. 여기부터 산동까지 약5km는 내리막길이다. 경사가 완만한 비포장 산길 5km는 시골서 초등학교 때 소풍가는 길처럼 즐겁고 쉬웠다. 1시간도 안 걸려 낮1240분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정표에 산동 0km’라고 적혔다. 행정 동명은 모르겠지만 마을 앞 돌비석엔 효동마을이라고 음각돼 있었다. 당초 우리는 이곳에서 지리산둘레길 걷기의 마지막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잘 걸은 게 탈이라고 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오후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일단 점심부터 먹고 생각하기로 했다.

 

 

산동면 소재지 부근이라 음식점이나 민박집, 목욕시설 등은 몇 곳 있다. 우리는 대로변 일송정이란 음식점으로 갔다. 흑돼지 삼겹살과 고추장구이에 막걸리 반주해서 맛있게 포식했다. 산길을 포함한 13km를 걸은 후의 허기는 그렇게 해결했다. 이제 오후 시간을 유효하게 사용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만 산동에서 오후에 즐길만한 곳은 없다. 우리들의 시발점이었던 남원시 주천까지는 15.9km 남았다. 하루걸음이면 충분한 셈이다. 주천 가는 길에 민박집이 있다면 거기까지 가려 했지만 도중엔 그런 곳이 없다고 한다.

 

참 난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우여곡절 끝에 상황은 해결됐다. 음식점 주인에게 우리들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백방으로 수소문후 잠만 잘 수 있다는 한 집을 찾아내 알려주었다. 그 집은 산동에서 3.9km 떨어진 계척에 있었다. 정말 잘 된 해결이었다. 우리들은 음식점에서 1km쯤 떨어진 산동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고 마실 식료품들을 샀다. 그리고 음식점에서 기다리는 고령의 선배에게로 돌아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 때가 오후330. 어두워지기 전에 계척의 그 숙소에 도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식료품을 나누어 맨 후 계척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음식점 뒤쪽에 있는 개천을 지나 30분쯤 가니 산동면 사무소가 있는 원촌마을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앞길에 나란히 줄지어 선 단층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60년대나 70년대 초의 시골읍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원촌마을을 지나 국도 아래로 난 통로로 해서 산길을 올라가니 현천마을이다. 이 일대는 구례가 자랑하는 산수유가 유명하다. 봄에는 노란 산수유 꽃으로 물들고 가을엔 산수유의 빨간 열매가 온 산을 물들인다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 빨간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담벼락들이 옛 정취를 머금고 있어 정감이 느껴졌다. 마을 할머니에게 물어 노고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집 정원의 봉숭아꽃에 좀처럼 보기 힘든 검은 제비나비가 춤추고 있었다. 산자락 비탈에 있는 다랑이 논들의 벼들도 늦은 오후의 햇살에 황금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산 아래로 난 길을 따라가니 연관마을 이름에 얽힌 내력을 적어놓은 표지석이 보였다.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이 이곳을 지날 때 연기가 피어서 그렇게 지었단다.

 

 

20분쯤 더 가니 수령 350년쯤 된다는 계척마을의 느티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높이가 18m나 되는 이 나무도 전라남도 보호수다. 그 느티나무에서 조금 아래쪽에 국내 산수유나무의 시목(始木)이라고 전해오는 우람한 나무가 위엄을 과시하는 듯 서있었다.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이 마을로 시집올 때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가져와 심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나무다. 나무의 나이는 데략 1000, 높이는 7m쯤 되는데 가지가 부채모양으로 멋있게 퍼져있다. 이 계척마을도 부근의 동네들처럼 산수유로 유명하다. 매년 봄이면 산수유축제도 열린다.

 

 

우리가 자야할 민박집은 이곳에서 30분을 더 걸어간 외딴 곳에 있었다. 다행히 그 곳이 우리가 지나가야 할 지리산 둘레길옆이어서 큰 위안이 됐다. 집엔 아무도 없었고 모자간으로 보이는 흰 강아지 두 마리만 우리를 반겼다. 6시까지 와 있겠다던 주인은 30분쯤 기다린 후에야 도착했다. 그는 우리들의 방을 안내해준 후 숙박비만 받아서 돌아갔다. 규모는 꽤 컸지만 모든 시설이 엉성한 산장이었다. 다만 전기난방과 취사용 가스만은 잘 들어왔다. 몸을 씻고 햇반을 덥히고 라면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술도 꺼내 사 온 식품들로 안주해서 마셨다. 깊은 산속이라 풀벌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리산둘레길 걷기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700리에 가까운 대장정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산에 가려 산골의 아침 해는 늦게 떴다. 부채꼴로 펼쳐진 구름이 동쪽 산위에서 아침햇살에 밝게 빛난다. 8시쯤 민박집을 나와 주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새끼 강아지가 우리를 따라 계속 온다. 우리를 환송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아주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이정표가 없다면 길을 잃기 쉬운 산길이다. 강아지도 줄기차게 따라 왔다. 길섶에 드문드문 심어놓은 꽃무릇의 붉은 색깔이 녹색과 대비되어 무척 강렬하다. 편백 숲을 지나 계곡을 지날 때까지도 강아지는 돌아가지 않는다. 대나무가 있는 길을 지나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의 첫 집에 매어있는 덩치 큰 개가 사납게 짖어댔다. 쫓아도 계속 따라오던 강아지는 그 서슬에 놀라서 그제야 돌아갔다. 아마 2km는 넘게 따라 왔을 것 같다.

 

 

 

그 마을을 지나는 국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둘레길은 다시 포장국도와 헤어졌다. 새로 뚫린 밤재터널이 200m, 밤재는 1.9km로 표시된 이정표가 갈림길에 서있었다. 터널이 뚫리면서 밤재를 넘어가던 비포장 국도는 그 기능을 다한 것이다. 우리는 그 비포장 길을 걸어 밤재를 넘어야한다. 경사는 심하지 않았지만 오르막 산길 1.9km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도로손질은 비교적 잘 돼 있었다. 이날도 밤재 바로 아래서 도로보수공사를 하는 사람들과 장비들을 보았다. 주변 경치를 벗 삼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밤재에 도착했다. 해발고도는 490m란다. 민박집을 나선지 2시간10분쯤 되었다. 사방의 전망과 경관이 정말 좋았다. 멀리 떨어진 노고단과 만복대도 훤히 보인다. 이 고개를 경계로 전남과 전북이 나누어진다. 이제 우리는 전북 남원시 주천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침 고개를 올라오기 시작하는 여학생들을 만났다. 광주의 어느 여자고등학교 2학년 전원이 23일로 세미나를 와서 고개를 올라왔단다. 예쁘고 생기발랄한 얼굴마다마다 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다. 젊음은 이래서 좋은가보다. 학생들에게 부탁해 넷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10여분쯤 머문 후 고갯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남원 쪽엔 보수가 잘 안 돼 패인 곳이 더러 있었지만 비포장 산길은 걷기가 좋았다. 여학생들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우리도 덩달아 젊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길고 긴 고개를 내려와 왕복 4차선 국도 옆 숲에서 쉬었다.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니 지리산 유스호스텔이 보였다. 선두로 내려온 여학생들이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호스텔로 올라갔다. 밤재에서 우리와 만났던 학생들이었다. 높이490m나 되는 고개 길을 힘들다 않고 다녀오는 발랄한 젊음들의 아름다움에 박수를 보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이름이나 용도를 알 수 없는 대규모 건물과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그 시설 한편에선 공원조성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잠시 쉰 후 다시 걸었다. 목적지까지는 순탄한 길만 있으리라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정말 엉뚱한 복병을 만났다. 얼마가지 않아 둘레길은 넓은 국도 아래로 난 통로를 두 차례나 굽이치며 방향을 바꾸더니 급기야 산길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경사도 급해 거의 수직상승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한참동안 산길을 갔지만 이정표도 보이지 않아 우리들을 불안하게 했다. 산이 높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참을 불안해하며 가니 마침내 이정표가 나왔다. 길도 평탄한 내리막이었다. 숲이 무성해 바닥이 습기로 좀 미끄러웠지만 어려움은 없었다. 밤재를 풀발한지 두 시간쯤 되었다.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넓지 않은 계곡에선 맑은 물이 흘렀다.

 

 

 

숲에서 나와 지방도로를 10분쯤 내려가니 돌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기와집 모양의 효자비각(孝子碑閣)이 눈길을 끈다. 그 옆을 전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커다란 배롱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비각의 규모를 보니 아마도 매우 유력한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비각 맞은편에 나무로 지어진 쉼터에서 둘레길 걷기의 마지막 휴식을 즐겼다. 비각을 지나 30분쯤 걸으니 주천까지 300m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비석엔 외평마을이라 적혀있었다. 이정표도 이것이 마지막 것이었다. 넓게 포장된 마을길옆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니 원천초등학교 담장에 바짝 붙어 기와집 모양의 작은 돌비석이 서있었다. 비석엔 한자로 된 붉은 글들이 음각돼 있었다. 그 옆에는 이 비석과 관련된 장문의 한글해설이 적힌 오석(烏石)비석도 있었다. 이 고을엔 예로부터 효자들이 많았나 보다. 그 글이 너무 길어 자세히 읽을 엄두를 못 내고 지나쳐 조금 가니 낯익은 안내소 건물이 우리를 반겼다. 바로 우리들이 지난 422일 처음 걷기 시작했던 그 안내소였다. 안내소 직원에게 부탁해 완주기념 사진을 찍으니 만감이 교차됐다. 우리 넷은 손을 맞잡고 만세를 불렀다. 직원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찍어 우리들에게 기념으로 남겨주었다. < 大 尾 >

 

< 後 記 >

 

지리산 둘레길 전 구간 완주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45일씩 세 차례에 나누어 걸었다. 이 길의 공식거리는 295km이다. 그렇지만 이는 중복되는 갈림길이나 지선구간을 합친 거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실제 걸은 길은 270km쯤 된다. 비바람도 맞았고 푹푹 찌는 더위도 무릅썼다. 그런가 하면 가을의 풍요로움도 만끽했다. 또 어느 곳에서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남긴 깊은 상흔도 보았다. 그 상처기 너무 컸기에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을 상흔이리라.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대자연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꼈다. 또 그 길에서 살거나 만났던 사람들의 따뜻한 정도 함께 담았다. 길은 사람과 사람, 고을과 고을을 이어주는 통로이자 몸속의 핏줄과 같은 것이다. 길이 있기에 우리는 걸었고, 걸었기에 골골마다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고운 마음을 보고 느꼈다. 아울러 거기에 스며들어 면면히 이어지는 웅혼한 민족혼도 느꼈다. 이 아름다운 자연과 거기에 깃든 민족의 고고한 숨결을 잘 지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교훈도 함께 얻었다.

 

콜택시를 불러 남원시로 나갔다. 그리고 이 고장의 가장 유명한 먹을거리인 추어탕과 추어숙회, 그리고 몇 잔의 막걸 리로 대장정의 무사 완주를 자축했다.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시리즈 총10회) 중 제3차걷기(9월7일-10일) 완주기 4회분 중 마지막 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길고 두서없는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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