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에서 가랑비 맞고 이순신공원에서 나라 생각
오랜만에 우리 부부와 처제 부부가 남쪽바다의 거제도와 통영을 찾았다. 한 가족이 된 후 남해를 함께 여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에 안개가 짙었던 초가을 날(9월9일) 정오에 출발, 남쪽길 천리를 달렸다. 거제 섬의 동쪽 아늑한 항구 지세포에 여장을 풀었다. 짙은 안개에다 잔뜩 흐렸던 하늘은 옅은 구름 사이로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바다가 바로 아래 내려다 보이는 해안가 언덕의 유명 리조트에 여장을 풀었다.
어둠이 내리며 하나 둘 켜지는 불빛들이 예쁘게 빛나는 항구의 선착장 근처 골목을 찾았다. 지인이 알려 준 아담한 횟집에서 생선회와 각종 조개, 별미로 알려 진 딱새우회 등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한 상차림으로 늦은 식사를 했다. 이에 곁들인 한 잔의 반주가 먼길을 달려 온 여독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깔끔하게 단장된 분위기가 젊은이들 취향에 어울릴 것 같았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포구의 각종 불빛이 여행객을 유혹했다. 해안을 따라 멋지게 정비된 나무 데크 산책로(해안 거님길)를 걸으며 바닷물에 반사돼 흔들리는 아름다운 밤빛을 맘껏 즐겼다. 여행 첫날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잔뜩 흐린 하늘에서 금방 비가 내릴 것처럼 보였다. 다만 동쪽 수평선 위의 구름이 붉게 물들어 일출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수평선 위로 솟는 멋진 일출 모습은 애당초 볼 수 없는 아침이었다. 우리는 지난 밤 걷다 되돌아 온 바다산책로에 나가 끝까지 걸었다. 산책로가 끝나는 곳엔 둥근 돌들이 깔린 아담한 해변과 작은 마을이 있었다. 거제도의 그 유명한 몽돌해수욕장에도 이런 돌들이 깔려 있었던 게 생각났다. 흐렸던 하늘에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위에 해풍이 불어 가벼운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우산에 떨어지는 가랑비 소리를 듣는 즐거움도 컸다. 다만 그 많든 갈메기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일러 그때까지 둥지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가랑비는 오락가락했지만 여행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궂은 날씨를 감안해 스케줄을 일부 바꾸어 풍차로 유명한 바람의 언덕에 올랐다. 엄청나게 키가 큰 우람한 풍차였지만 돌지않고 서서 비에 젖고 있었다. 네델란드의 풍차가 이 보다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풀이 무성하게 자란 언덕의 잔디밭에서 더욱 쓸쓸함을 느꼈다. 몇 년 전에 왔을 땐 잔디밭 출입이 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출입금지를 시켰다. 그렇지만 관리를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았다.
조금 강해진 비를 맞으며 돌지않고 서있는 풍차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흐린 하늘을 닮은 하얀 바다 구경도 했다. 잠시 나이를 잊고 가사에 '돌지않는 풍차'란 귀절이 들어있는 흘러간 유행가도 흥얼거리며 바람의 언덕에서 바람대신 비를 맞다 통영으로 달렸다. 길가엔 꽃이 져버린 수국들이 가을비에 속절없이 젖고 있었다. 몇 차례의 거제 여행길에 자주 보았던 아름다운 수국들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통영의 이름 난 전통시장 서호시장은 통영부두와 아주 가깝다. 그곳엔 잘 알려진 맛집들이 많고 신선한 해물과 충무할매김밥도 인기가 있다. 우리는 소문난 어느 복국집에서 뜨끈뜨끈한 복국에 반주 한 잔으로 가랑비가 안겨 준 한기를 달랬다. 시장골목을 둘러보며 구경하고 유명한 음식점의 '시레기 된장국'도 포장해 차에 실었다. 통영에선 이것을 '시락국'이라 부른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
다음 행선지는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한많은 일본쪽을 응시하는 이순신공원이었다. 엄청나게 높은 좌대위에 큰 칼을 짚고 선 충무공의 모습에선 당장이라도 왜적을 향한 벽력같은 진격명령이 내릴 것 같았다. 공원의 산책길도 잘 정비돼 있었다. 길옆 정자에 올라 바로 앞의 바다구경도 하고 마루에 길게 누워 피곤한 다리를 쉬게도 했다. 공원을 내려와 근처의 청마 유치환기념관 마당도 둘러봤다.
우리는 6.25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포로수용소에 잠깐 들렸다가 리조트로 돌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다. 객실에서 잠시 쉬다 자동차를 타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시 지세포의 먹자골목을 돌아다녔다. 일행 증 한 사람이 요즘 제철인 전어구이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몇 집을 들렸지만 전어가 없거나 전어구이를 안 한단다.
포기하고 리조트 근처에서 저녁을 먹자며 돌아왔다. 그 시각 비 그친 날의 저녁무렵 답게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가 말할 수 없이 고왔다. 한낮까지는 가랑비, 오후엔 잔뜩 흐렸던 날씨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아름다운 색조에 감탄하면서 가까이 보이는 횟집에 들렸더니 우리가 찾던 전어 구이와 회가 있단다. 이런 걸 등하불명이라 해야할까? 야호! 해가 막 넘어간 바닷가 언덕의 횟집 노천식탁에서 전등불과 네온이 빛나는 항구를 바라보며 정말 멋진 식사를 즐겼다.
여행 마지막 날은 종일 청명했다.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들다 차츰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는 작은 포구의 산책로에서 여행자의 여유를 만끽했다. 느긋하게 조반을 들고 리조트를 출발, 상경 길에 진주에 들렸다. 점심시간이 안 돼 진주성에 들려 촉석루에 올랐다. 고려때 건립됐지만 수없는 화마로 소실과 복원을 거듭한 루각. 현재 건물은 6.25때 전소된 후 1960년 진주시민들의 성금으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중학시절 수학여행 때 처음 들린 후 지금까지 꽤 여러차레 찾았지만 그때마다 감흥은 달랐다. 성곽, 루각, 의암 모두 옛 모습 그대로 이건만 왜 달리 느껴질까? 다만 촉석루 맞은 편 남강너머의 울창했던 대나무숲은 어느 때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 촉석루 대청마루에 신발만 벗으면 오를 수 있게 한 것도 달라진 점이다.
우리도 이번에 처음 마루에 올라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며 남강의 유장한 흐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물위에 어리는 듯한 논개의 붉은 충절을 생각해봤다. 진주성에서 나와 '진주의 맛'이라는 진주냉면 본점에 들려 냉면과 육전에 한 잔의 술로 여행을 마감했다. 서울의 일반 냉면에다 육전을 썰어 넣었는데 맛이 텁텁한 듯 하면서 독특했다. 몇 잔 마신 반주 덕에 나는 운전을 않고 편한 자세로 쉬며 초가을 빛 짙어지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강다리를 건널 무렵엔 서울하늘의 낙조도 아름답고 붉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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