蟾津江 絶景 보며 울고 웃은 50리길
오늘의 여정은 20km가 넘는다. 그중 송정마을까지 10.5km는 높이 300m에서 400m쯤 되는 고개를 둘이나 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구간은 섬진강을 왼편으로 바라보면서 숲이 울창한 산길을 걷는다. 추분이 가까와 진 탓에 해 뜨는 시각도 상당히 늦어졌다. 부지런한 민박집 주인은 우리가 부탁한 시간에 맞춰 아침식사를 차려주었다. 식사 후 바깥주인으로부터 오늘 갈 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마을 앞에 가로로 우뚝 선 황장산 능선이 하동과 구례의 경계란다. 그 산을 넘어가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고 지루하다고 했다.
아침7시20분쯤 기념촬영을 한 후 걷기 시작했다. 10여 분만에 마을 앞을 흐르는 넓고 물이 맑은 개천에 놓인 가탄교를 건넜다. 쌍계사에서 화개장터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옆을 흐르는 화개천이다. 다라를 건너면 바로 십리벚꽃길이다. 쌍계사에서 4km쯤, 화개장터에선 1km쯤 떨어진 곳이다. 길 양쪽에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들이 서로 닿아 하늘이 안 보일정도의 터널을 이루고 있다. 봄이면 만발한 벚꽃이 구름인파를 부르는 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이곳에서 벚꽃 길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아직 단풍이 들진 않았지만 잎이 무성한 벚나무 터널도 장관이었다. 이 벚나무들이 빨갛게 단풍이 들면 그 또한 절경이란다.
벚나무 길을 가로질러 조금 가니 법하 마을이 나왔다. 쌍계사 등 사찰이 많아 부처님의 불법(佛法) 아래에 있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하촌(寺下村)과 같은 뜻이란다. 골목길을 온통 뒤덮은 익어가는 대추와 돌배가 과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담장 밖으로 늘어진 가지마다 열매가 너무 많이 맺혀 부러질 지경이었다. 지난여름의 유난했던 폭염과 사나왔던 태풍을 이기고 풍성한 결실을 이룬 것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오직 가을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풍요로움이요 즐거움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바로 산으로 올라간다. 건너편에는 우리가 잤던 마을이 산자락에 포근히 싸여있었다. 산죽과 소나무들이 우거진 사이로 길은 가파르게 이어졌다. 그렇게 40분쯤을 오르니 ‘작은재’라는 이정표가 우리를 맞아준다. 잔뜩 흐린데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잔등에 땀이 흐른다. 안내책자엔 해발 300m쯤 되는 것으로 돼있다. 여기서부터 약2km 떨어진 기촌 마을까지는 내리막길이다. 길은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진다. 능선 길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주변마을은 그야말로 골짜기 아래쪽 깊숙한 곳에 앉은 한 폭의 그림이다.
섬진강은 우리나라의 다른 강들과 달리 들판을 지나는 구간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산지하천이다. 산과 산 사이를 굽이돌아 흐르기 때문에 섬진강 줄기는 깊은 산골짜기의 바닥이다. 따라서 강변의 모든 산들은 강바닥에서부터 곧 바로 경사가 시작되기에 높고 힘들다. 산위에서 바라보면 섬진강 주변의 마을들과 좁은 들판은 강줄기에 딸린 잎이거나 열매처럼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어우러져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의 비경에 취해 걷다보니 알밤이 지천으로 떨어져 뒹구는 밤나무 밭이 나타났다. 밤나무 가지엔 벌어졌거나 벌어지기 직전의 밤송이들이 밤나무 잎들만큼이나 많아 보인다. 우리는 배낭을 벗어놓고 굵은 알밤들만 주웠다. 순식간에 주머니가 꽉 찰만큼 주었다. 반들반들 윤기가 도는 짙은 갈색의 보석들 같았다. 너무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밤 줍기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비탈을 내려오니 포장도로가 지나가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이정표엔 ‘기촌마을’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로옆의 밤나무들 아래에 할아버지 한 분이 작은 평상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우리는 주머니 가득가득 주워 온 알밤이 마음에 찔려 할아버지에게 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분의 그 다음 말이 의미심장하게 마음에 꽂혔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각자가 알밤 다섯 톨씩만 가져가더라도 그 량이 무척 많지요. 이건 우리들에게는 생업이지만 그 분들에겐 장난으로 보일 테지요?”
그 말을 들으니 오면서 무수히 보았던 ‘농작물에 손대거나 과일을 따가지 말라’고 했던 표지판들이 일시에 눈앞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속마음을 알았던지 ‘지금 주워 온 밤은 아직 맛이 제대로 안 들어 상품가치가 없다. 보관도 잘 안되니 빨리 먹어야 한다’는 말로 안심시켜 주었다. 많지 않은 밤이지만 우리들 멋대로 주운 행위가 부끄러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포장도로는 상당히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었지만 길 위에 뒹구는 밤송이들이 우리들의 발길을 잡았다. 토실토실한 알밤이 들어있는 밤송이들을 무시하고 지나치기가 그렇게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마을엔 밤나무뿐만 아니라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많이 맺혀 휘늘어진 돌배나무들도 많았다. 그 모습들도 정말 멋진 한 폭의 채색동양화 같았다. 다만 낙관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가을이 한껏 무르익어가는 지리산 자락을 독점한 채 맘껏 즐겼다. 지리산의 맑은 물을 담아 피아골을 지나 온 개천물이 너무 맑아 그대로 뛰어들고 싶었다.
개울을 건너자 길은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었다. 발아래로 보이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선진강과 주변의 풍경들이 절경이어서 위안이 됐지만 오르막은 지겹게 계속 되었다. 섬진강의 명물인 남도대교가 저 멀리 눈 아래에서 붉은 아치의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계속 되는 오르막길이 주는 고달픔이 그 정취마저 반감시켰다. 산길은 깊은 숲속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 길은 어두울 정도로 숲이 우거지고 습기 찬 산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음습한 길에도 계절의 전령사들은 줄지어 서서 우리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면서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그들은 예뻤지만 해마다 늦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심심찮게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독버섯들이었다. 조물주는 어째서 그런 아름다움 속에 그토록 무서운 독을 감추어 두셨을까? 이름도 모를 수많은 버섯들을 바라보면서 온갖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들 모두가 독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자태는 무서운 독과 쉽게 연결이 안 되었다.
습기 찬 산길을 따라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각종 모양의 이름 모를 버섯을 구경하다 보니 길은 어느새 듬성듬성 바위들이 이어지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 소름끼치는 녀석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리 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부딪치면 놀란다는 흉물이었다. 길 위에 검게 똬리를 튼 채 꼼짝 않는 녀석 때문에 맨 앞에서 가던 사람은 깜짝 놀랐단다. 녀석은 상당히 큰 살모사였다. 일행 중 제일 젊은 사람이 등산용 스틱으로 놈을 걷어 길옆으로 던져버렸는데 작은 나무에 걸렸다가 풀 속으로 떨어져 사라져갔다. 독버섯 무리와 맹독을 가진 살모사도 결국 우리와 같은 조물주의 피조물이긴 하지만 정말 기분 나쁜 존재들이다.
독을 가진 존재들의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왼쪽 아래로 굽이치는 섬진강 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 너머에서도 높은 산들이 우리를 마주보며 손짓하듯 이어진다. 백운산줄기란다. 예로부터 이 땅을 왜 금수강산이라고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겹겹이 이어지는 산들과 그 산들 사이사이로 흐르는 강줄기, 골짜기마다 펼쳐지는 들판과 마을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오른쪽엔 경상도 하동, 왼쪽엔 전라도 구례 땅이다. 전라도 남원에서 시작했던 지리산둘레길 일주여행도 이제 마지막이 멀지않은 곳까지 온 셈이다.
그렇게 고개에 올라가니 임도가 나왔고 ‘목아재’란 표지판이 서있었다. 해발 400m쯤 된다고 안내책자에 표시돼 있는 고개다. 민박집을 출발한지 4시간이 지났다. 이제부터 전망 좋은 능선을 따라 가는 내리막길이다. 같은 경치라도 힘이 안 드니 더 좋아 보인다. 발길에 차이는 독버섯들조차도 예쁘게 보였다. 그렇게 1시간 반쯤을 내려가 송정마을에 닿았다. 아스팔트 포장된 지방도로 옆으로 산비탈에 바짝 붙은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띄엄띄엄 있고 마을 안길은 경사가 심했다. 담장 밖까지 벋어 나온 가지에서 새빨갛게 익어가는 석류가 전형적 시골마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점심때를 지났다. 그렇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음식점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가야할 거리가 10km넘게 남았는데 간식거리 외엔 먹을 게 없어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역시 맞았다. 길가에 서있는 민박집과 펜션 안내판들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하니 그 중 한집에서 식사할 수가 있단다. 더욱 다행하게도 우리를 데리러 차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통화했던 남자가 일러 준대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SUV차량이 올라오다 우리를 태워서 음식점으로 데려다 주었다. 전화한 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이었다.
꽤 큰 참게 한 마라를 넣은 민물매운탕에 반주 한 잔으로 고개를 두 개나 넘으면서 쌓였던 피로를 풀었다. 식사 후 우리는 그 차를 다시 타고 처음의 장소로 되돌아가 걷기를 계속했다. 둘레길은 곧바로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비탈로 이어졌다. 안내책자의 등고선 표시 그림으로는 쉬워보였는데 실제는 반대였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직후라 더 힘들었다. 숨은 턱에 닿았고 내딛는 발걸음은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올라가야할 능선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무척 힘든 산행을 해야만 했다. 산 중턱쯤에서 마주오던 용감한 아가씨 한 사람을 만났다. 오미에서 왔는데 도중에 길이 끊어진 곳도 있었고 오르막도 심해 고생했단다.
한참 더 고생하며 올라가니 조그만 고개와 평평한 곳이 나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큰 소나무들의 밑둥치 부분들이 불에 그을려 있었다. 다행히 나무들은 싱싱했지만 산불의 불길이 스쳐간 탓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거기엔 키가 작은 잡목들이 넓게 자라고 군데군데 타죽은 소나무의 둥치들이 기둥처럼 서있었다. 큰 산불 피해를 입은 곳에 인공적으로 다시 숲을 복원시키고 있는 곳이었다. 우거진 주변의 숲들과 달리 하늘이 뚫려 내려앉은 것 겉아 안타까웠다. 길은 그 후로도 350m정도의 높이까지 오르고 내려가기를 계속하며 길손들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그렇게 힘들게 오늘의 마지막 고개인 당재를 넘었다. 송정을 떠난 지 2시간30분쯤 되어서야 꽤 넓은 들판과 마을, 포장도로, 그리고 많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도착했다. 하천은 아마도 섬진강의 한 구간일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랫동안 쉬었다. 마침 그곳엔 ‘조선수군 재건로’라고 크게 적힌 대형입간판이 서있었다.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장군이 병력을 정비해 명량대첩지로 갔던 역사적 의미를 담은 길이라고 했다. 421년 전 온갖 어려움을 딛고 민족의 성웅이 나라를 구하려고 지나간 뜻 깊은 장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어쩐지 그 분에게 죄송스런 생각만 드는 것 같았다.
벌써 오후 5시가 지나고 있었다. 우리가 이날 밤 오미에서 묵을 숙소와 식사할 장소를 찾아 예약해야 했다. 지리산둘레길 안내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전화로 수소문한 끝에 찾아냈다. 민박집에선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단다. 우리는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넓은 길로 내려서니 잘 정비된 대형수로가 길을 따라 계속 물을 흘려보내며 이어지고 있었다. 유역의 논밭에 물을 대주는 젓줄과 같은 시설이다.
도중에 아주 가파른 고개 문수재도 있었다. 또 대봉감이 노랗게 탐스런 모습으로 익어가는 과수원도 지났다. 길은 평탄했지만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멀었다. 해는 서산머리에 어른 키만큼만 남았다. 저무는 햇살을 받은 들판에선 더욱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였다. 대형수로와 함께 계속되던 길이 커다란 저수지 있는 곳에서 180도 가까이 방향을 바꾸어 내죽마을로 내리닫는다. 해가 막 서산으로 넘어갈 때에야 우리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도착했다. 이 마을엔 운조루(雲鳥樓)라는 유명한 한옥이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인데 우리나라에선 3대 길지(吉地)라고 알려진 명당이다. 숱한 재미있는 사연을 가졌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시용해 지어진 집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 제대로 들려보지를 못했다.
운조루 바로 옆에 한옥으로 지어진 민박촌이 형성돼 있었다. 해는 져서 벌써 어둠이 내렸다. 우리는 민박촌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음식점 이름이 용궁이란다.명당을 찾아 전국에서 몰려 온 용들이 식사하는 곳인가 보다. 뽕나무잎 나물과 뽕잎가루 전, 뽕잎가루를 뿌린 밥이 이 집의 별미였다. 또 전남 남원의 쌀 막걸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부부가 경영하는 이 음식점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반찬과 전을 추가로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남은 재료를 다 사용했단다. 그것이 미안했던지 밥은 딱 두공기가 남았다며 더 주었다. 식사 후 예약한 민박집을 찾아가 여장을 풀고 쉬었다. 한 가지 특이했던 일은 술을 좋아하는 나는 바로 잠들었는데 나머지 세 사람이 동네 슈퍼에서 맥주와 소주를 사와 마셨다는 사실. 그 중 한분은 오래 유지했던 ‘禁酒 수준의 節酒’까지 허물고 마셨단다. <계 속 >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시리즈 총10회) 중 제3차걷기(9월7일-10일) 완주기 4회분 중 제2회 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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