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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지리산둘레길 걷기 ① 원부춘∼가탄 : 13.4km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1. 9. 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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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향연 속에 800m고개 올라

봄비 맞으며 시작했던 지리산둘레길 완주를 반년 만에 끝냈다. 가을꽃들과 오곡백과의 향연 속에서 막을 내린 대장정이었다. 지리산둘레길은 본선과 지선을 합한 공식거리가 295km. 이중 몇 개의 지선과 어느 갈림길을 걷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들이 걸은 거리는 줄잡아 260km가 넘는다. 퍼붓는 비를 맞으며 물이 불은 개울과 계곡도 건넜고 산길도 걸었다. 오뉴월 불볕더위에 비지땀을 쏟으며 해발800m가 넘는 고개도 넘었다. 또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가을햇살에 춤추는 황금벌판에서 콧노래도 불렀다. 이렇게 해서 세 차례에 걸쳐 서울과 지리산을 오가며 즐겼던 700리에 가까운 방랑은 끝났다. 70을 넘긴 나이에 만든, 영원히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방랑이었다. 완주를 마친 마지막 4박5일(2018려9월7일~11일)간의 지리산둘레길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싣는다.




화개장터로 가는 버스는 9월7일 아침8시에 서울 남부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했다. 다음 버스가 1시간20분 뒤에 있어 우리 일행 네 사람은 서둘러 이 버스에 올랐다. 구름이 좀 끼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밤새 남부지방에 내린 비도 낮부터는 그칠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약3시간 반에 걸친 남행 끝에 화개장터에 내리니 비는 그쳐있었다. 버스 창밖을 스치는 초가을 산하를 보며 마지막 남은 지리산둘레길이 줄 즐거움을 생각느라 지루한 줄도 몰랐다. 버스정거장 부근 식당에서 재첩국과 비빔밥에 막걸리 반주로 점심을 먹었다. 음식의 맛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여행길이란 분위기가 부족한 맛을 잊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식사 후 택시로 제2차 둘레길 걷기를 마감했던 원부춘(경남 하동군 화개면 부춘리)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낮12시25분이었다. 꼭 70일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멘트 포장이 된 임도는 매우 가팔랐고 길 왼편의 수량 풍부한 계곡에선 맑은 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해발 1,115m나 되는 형제봉의 중간을 우리는 지나가야 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임도는 순식간에 온 몸을 땀에 젖게 했다. 다행히 이날 우리기 걸을 거리는 비교적 짧은 13.4km여서 자주 쉬면서 올라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발아래 펼쳐지는 심산의 절경이 피로를 잊게 했다.


아침까지 비가 내렸던 산골의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뿐만 아니라 길옆에 만발한 온갖 가을꽃들이 우리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었다. 간간이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가을햇살을 받은 꽃들은 더욱 예쁜 자태를 뽐내었다. 봄꽃 예쁜 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가을꽃들의 아름다움 또한 그에 한 치도 뒤지지 않으리라. 무성한 잎 속에 숨었다 고개를 내민 짙은 분홍색 칡꽃. 꽃송이는 작지만 무수히 피어 나무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싸리 꽃.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하늘을 향해 우산모양으로 펼친 채 피지 않은 억새꽃의 연한 갈색 물결. 이 모두가 가을 길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들이다.



가을꽃들의 군무를 즐기며 걷는 길이지만 이 길은 무려 해발 800m고개에 우리를 끌어올렸다. 쉬엄쉬엄 왔지만 그래도 숨이 턱에 닿을 듯 힘들게 느껴질 때에야 고개 마루의 임도삼거리에 도착했다. 이정표를 보니 4.1km, 무려 2시간 가까이나 걸렸다. 원부춘 마을은 산의 능선에 가려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배낭을 벗고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돌린 후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니 어려울 게 없을 것이란 즐거운 희망만이 넘치는 순간이었다.

垂直上昇 길보다 힘들었던 내리막 길!


그러나 오산이었다. 우선 시작부터 우리를 힘들게 한 힘든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왔던 넓은 길과는 달리 들머리조차 얼른 못 찾을 만큼 좁고 가파른 내리막 산길이 이어졌다. 무성하게 우거진 숲속 가파른 능선을 따라 길은 내리꽂힐 듯 한없이 계속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밤새 내린 비에 젖은 낙엽이 미끄럽기까지 했다. 간간이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급경사에다 미끄러워 위험하기 짝이 없는 능선이었다. 뒤돌아서 내려 온 길을 쳐다보니 하늘로 치솟고 있는 듯 했다.


발아래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내려오다 미끄러지려 하면 나무 밑동을 부여잡고 멈춰서기를 반복했다. 자칫 실수하면 빠르게 아래쪽으로 내리꽂힐 판이었다. 중간 중간 발 디딜 공간이 나타나면 숨고르기를 하며 손에 땀을 쥐고 급경사 길을 내려왔다. 게다가 잠깐 동안이긴 했었지만 비까지 살짝 뿌려 우의를 입었다 벗는 소동도 벌였다. 급경사길을 올라가는 것 못지않게 고생했다.


그렇게 1시간10분가량을 급전직하(急轉直下)하고서야 꿈같은 안식처를 만났다. 가파른 숲길에서 나오자 눈앞이 훤해지는 개활지가 나왔는데 거기에 산장이 있었다. 이름도 멋진 '하늘호수'란다. 목공예솜씨 좋은 60대중반의 남편과 붙임성 좋은 부인이 운영하는 집이었다. 그야말로 긴 여정 끝에 오아시스를 만난 사막의 카라반이 느낄 기쁨이 이럴 것이다. 남자가 손수 만들었다는 나무의자와 탁자도 이채로웠다. 우리들은 거기에 앉아 산나물전과 막걸리로 급전직하후의 갈증을 달랬다. 산장에서 내려다보는 전망도 절경이었지만 가느다란 꼬챙이로 만든 연인형상 솟대는 금슬좋은 두루미 한쌍을 표현한 것이란다. 그리고 테라스 난간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작은 화분들 장식도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렸다.


한 시간여의 휴식을 즐긴 후 산장을 떠나 20여분쯤 내려오니 중촌 마을이 나왔다. 어느 집 마당가에는 가을꽃의 대명사격인 맨드라미가 빨갛게 피어있었다. 중촌마을을 지나니 길은 탐스런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린 채 손짓하는 밤나무 숲속으로 이어졌다. 나무에 달려 입을 벌린 밤송이들과 길 위에 떨어져 구르는 밤송이들이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야말로 지천으로 보이는 게 잘 익어가는 밤들이었다.


밤나무 길을 지나니 이번엔 ‘천년 차밭길’이란 이정표와 ‘차시배지’란 이정표가 사이좋게 붙어 서서 우리를 반긴다. 이곳이 문헌상 약1200년쯤 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를 시험재배한 곳이라고 한다. 지리산 남쪽의 쌍계사 주변이 차의 주산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잘 다듬어진 차밭 사이로 한참을 내려오니 정금마을이 나타났다. 주변 지형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과 닮아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안내책자엔 소개돼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뜨내기 길손인 내 눈엔 그냥 아담한 산골마을일 뿐이었다.


그리고 멋지게 지은 양옥들이 저수지 물위에 그림자를 띄우는 마을도 지났다. 경제적 여건이 여유로운 사람들의 별장인 듯했다. 우리는 길가의 날렵한 정자에서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길옆에 펼쳐진 논에서는 고개 숙인 벼가 알차게 영글고 고추밭의 고추는 빨갛게 익고 있었다. 가을은 이미 이 산골에선 한창이었다. 이정표를 보니 우리들이 하루밤 쉬어갈 가탄마을이 1.1km 남았다. 산골의 가을해는 짧아 벌써 산머리에 겨우 한 뼘 정도만 떠있다.


발길을 재촉해 마을로 들어섰다. 어느 집 담장 안에는 조롱조롱 많이 열린 이름 모를 작은 열매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마을앞쪽으로는 꽤 큰 마을과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그 한 가운데로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숨고 하늘엔 붉은 저녁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길가에 서있는 민박집 광고판을 보고 전화하니 마침 방도 있고 식사도 제공된다고 했다. 75세의 주인 남자는 이곳이 고향이란다. 날렵한 이층양옥은 손수 지었단다. 여장을 풀고 샤워를 마치니 식사준비 다됐다고 우리를 부른다. 다리가 불편해 고생하는 부인의 맛깔스런 음식에 한 잔의 술을 곁들이니 산길에서 고생한 보람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름 모를 작고 빨간 열매들은 개량종 구지뽕 열매인데 약용으로 많이 재배한단다. 누에가 먹는 식물로 뽕잎은 잘 알려져 있지만 구지뽕잎도 먹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적다. 누에는 오르지 그 둘만 먹을 수 있다. 또 오늘 내려온 산길은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난이도 높은 구간중 하나라고 민박집 주인이 알려준다. 거리가 짧다고 가볍게 여겼다가 그야말로 크게 혼이 난 셈이었다. 내일은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 계 속 > https://ih0717.tistory.com/58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시리즈 총10회) 중 제3차걷기(9월7일-10일) 완주기 4회분 중 제1회 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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