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졸업 43년만에 20代로 돌아간 추억여행
대학동창생 14명이 빚어낸 한 편의 멋진 드라마였다. 이보다 더 멋지고 뜻 깊은 여행은 드물 것이다. 70을 눈앞에 둔 저마다의 마음엔 어느새 꿈과 낭만만 먹고 살았던 20대 시절의 추억들로 가득했다. 그때 간직했던 그 꿈과 낭만들은 47년이란 세월의 벽을 지나왔건만 아직도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조국의 아픈 현실을 보며 아파했고 밝고 멋진 미래의 조국을 향한 예리한 통찰력도 그때처럼 그대로 번뜩였다.
이들은 한없이 펼쳐지는 현해탄의 푸른 해원과 하늘이 안 보일 만큼 울창한 대마도 숲길을 보며 자연인으로써의 탄성도 질렀다. 그리고 선인들의 혼이 담긴 곳에서는 머리숙여 그분들의 높은 뜻을 새겼다. ‘너와 나’가 아닌 ‘오직 우리’만 있었던 3일간의 멋진 20대로의 추억여행에서 모두 만족과 즐거움만 한 아름씩 안고 돌아왔다.
지난6월29일 오후3시 서울역에서 KTX열차를 탔다. 고향이 남쪽인 까닭에 나는 경부선 열차만 타면 가슴이 설렌다. 단지 고향근처를 통과할 뿐이었지만 남행열차만 타면 항상 그랬다. 그러나 이번의 남쪽 나들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기다려지고 가슴이 설렜다. 입학 47년 만에 처음으로 대학동기생 15명이 대마도여행을 위해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소풍 길의 설렘도 이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열차는 2시간45분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약15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역은 최신식 건물로 변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가까운 곳을 돌아보려던 생각은 때마침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접었다. 대신 동기회에서 예약해 둔 숙소에 체크 인 하는 걸로 공식 대마도여정을 시작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맞으며 15명의 동창생들은 부산역 맞은편 차이나타운 중국 음식점에서 푸짐한 요리와 한 잔의 술을 곁들여 옛 추억을 더듬으며 새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을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부산항 신국제여객 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만난 여행사의 여자 가이드는 능숙한 솜씨로 출국수속을 도와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한 부산사투리를 사용하는 50대중반 아줌마의 정감 넘치는 설명이 이틀 동안 우리일행 14명(1명은 개인 사정으로 대마도에 못 감)을 즐겁게 해주었다. 돛대기 시장처럼 붐비는 출국장을 벗어나니 400명 이상을 태운다는 쾌속여객선 오션 플라워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는 짙은 안개로 사방이 하얗게만 보이는 현해탄을 달려 2시간10분만에 우리들을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내려주었다. 이래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했을까? 입국장을 꽉 채운 사람들의 대부분이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어서 외국이란 실감이 안 났다. 다만 입국심사 때 얼굴사진과 양손 검지손가락 지문까지 찍을 때는 국경을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세관을 나온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로 이즈하라 시가지를 20여분 걸어서 식당으로 갔다. 간단하고 깔끔하게 개인별 식판에 차려져 나온 일본식 밥상이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이즈하라는 깨끗하게 가꾸어진 작고 조용한 곳이다. 우리들은 걸어서 시내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보이는 사람은 겨우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마도 전체 인구가 고작 3만5천 명 정도라니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만 신사나 유적지 등 관광명소엔 사람들이 좀 보였지만 그들은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다.
가이드는 우리들을 인솔해 하치만궁이나 수선사에 들려 유래를 설명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일본에는 그 수를 모를 만큼 정말 여러 신들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적국의 명장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죽으면 신으로 받들어 진단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섭섭하게 대하면 신이 되어서라도 자기들을 해칠까봐 그렇게 하지말아 달라는 뜻에서 란다. 그 신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스며있는 나라가 일본이란다. 그래서 일본은 각종 신들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신은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지만 일본의 유명한 문학가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 1860-1926)의 생가에 마련된 기념관에도 들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도 살았던 그는 아사히신문 최초의 한국특파원이자 아사히신문에 춘향전을 연재로 소개한 친한파 소설가이자 기자였다. 토스이와 24세에 요절한 유명한 여류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와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외국인인 우리의 마음까지도 울린다. 그녀는 일본화폐(5,000엔권)에 인쇄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엉뚱한 오해에 의한 비극적 결별이었기에 이를 후세 사람들은 ‘이치요의 오해’라고 했다.
이어 들린 고려문터에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흐르는 애증의 세월을 읽을 수가 있었다. 고려문은 2014년 다른 곳으로 이설돼 지금은 계단의 터만 남았는데 그 터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서 있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 엣 시대에 선진문화를 전해주던 조선통신사 행렬을 성대히 맞이하기 위해 그 문을 세웠다. 특히 그 고려문은 임진-정유재란의 기간에 세워진 친선교류의 문이어서 더욱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해 주었다. 또 그 부근의 금석성안에 있는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옆에는 무궁화 꽃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었다. 망자에 대한 배려인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반성에서 심어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수선사 경내 묘역에 있는 崔益鉉선생의 순국비는 망국의 한을 품은 선생의 설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일제침략에 저항하다 체포돼 유배됐던 대마도에서 병으로 돌아가신 선생의 시신은 사흘간 이 절에 안치됐었다고 한다. 이를 인연삼아 순국한지 80년이 지난 1986년에 한일 유지들이 세웠다는 얘기가 더욱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또 거기서 멀지않은 곳에는 17세기 일본인 역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蒡洲, 1668-175)의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비석이 있다. 崔益鉉선생비석을 세운 양국유지들이나 친한파 소설가, 선린지교를 강조한 역관의 뜻처럼 두 나라의 국민들이 사이좋게 살아갈 날은 없을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일 두 나라와 민족 사이를 흐르고 있는 애증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우리들 14명은 이즈하라를 떠나 대마도의 최북단을 향해 달렸다.
우리들의 이번 추억여행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이때 만들어졌다. 전세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들린 해수온천장은 여행지에서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밖이 훤히 보이는 일본식 온천으로 피로를 푼 일행은 버스에 올라 숙소가 있는 히타카츠까지 1시간20분가량을 달렸다. 대마도는 대부분이 산인데다 바다까지 바짝 붙어있다. 그 산들은 경사가 아주 심하고 삼나무나 편백나무가 울창하다. 모든 길은 좁은데다 그 험한 산들을 넘어가거나 뚫고 갔다. 또 리아스식 해안의 바다에 바짝 붙은 호안도로를 따라 꼬불꼬불 나있다. 차창 밖은 흐렸고 산들은 대나무처럼 곧고 높게 자란 나무들의 녹색 물결로 출렁인다. ‘대마도의 나무만 베어 팔아도 일본이 3년 먹고 산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섬 전체가 온통 나무이고 숲이다.
이 순간을 활용해 현직 대학교수(정치학 박사)와 통일부차관을 지낸 동기(정치학 박사)가 일행들에게 아주 값진 선물을 했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세미나보다도 수준 높고 알찬 내용으로 정제된 강의였다. 교수인 친구는 한국과 대마도, 일본 사이에 얽힌 난제들을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정세를 연관지어 40여 분간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차관을 지낸 다른 친구는 다년간의 행정 실무경험과 해박한 지식으로 남북관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하나 되는 조국을 위한 정책방향 들을 아주 쉽게 설명해주었다. 낯선 이국여행만으로도 즐거운데 그 위에 이처럼 알차고 격이 높은 고급 정보와 강의까지 들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자타가 인정하는 명문대 인기학과(?)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버스는 히타카츠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숙소 가미소(花海莊)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곧 바로 전망 좋고 넓은 테라스에서 가진 저녁식사는 운치와 낭만을 한껏 더해준 멋진 시간이 되었다. 생선회, 닭고기, 삼겹살, 주먹밥에 생맥주와 소주가 곁들여진 고급 만찬이었다. 때맞춰 쏟아지는 강한 소낙비가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며 흥을 돋우었고 시원한 해풍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쾌함을 선사했다. 운치 있는 해변에서 한 잔의 술에 온갖 정겨운 얘기와 추억들을 섞어 마시며 깊어가는 초여름 밤의 정취에 마음껏 취했다. 그와 함께 70을 전후 한 초로들의 추억담도 쌓여만 갔다.
다음날 아침 숙소2층의 일본식 목욕탕에서 샤워하고 주변의 바닷가와 숲길을 산책하며 여행자의 여유를 만끽했다. 아침 밥상에 올라온 고등어구이와 일본식 매실장아찌-우매보시는 우리들의 입맛을 더해 주었다. 숙소를 나온 일행은 삼나무와 편백나무로 뒤덮인 도로를 한 시간 넘게 남쪽으로 달려 만제키바시(万關橋)로 갔다. 일본제국이 섬의 서쪽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동쪽바다로 빨리 옮기기 위해 1900년 섬의 가운데를 끊어 운하를 만들고 그 위에 놓은 다리이다. 원래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쓰시마섬은 일본제국의 전략 때문에 허리가 끊어져 남북 두 섬으로 분리됐다. 지금의 다리는 세 번째로 건설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경치는 절경에 가까웠다.
万關橋를 떠난 일행은 일본의 하롱베이로 불리는 아소만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정상의 전망대에 올랐다. 바다에 떠있는 100여개의 섬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은 우리나라 다도해 모습과 비슷했다. 다만 이 좋은 풍광들을 우리보다는 훨씬 효율적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에보시다케 정상의 절경에 미련을 안은 채 우리들은 다시 한 시간가량을 달려 최북단에 있는 한국전망대로 갔다. 가는 도중에 들린 어느 신사(神社) 앞의 금줄을 매단 시설물(도리이, 鳥居)이 바다 속에 서있어 이채로왔고 땅위로 나온 해송의 거대한 뿌리는 꿈틀거리는 구렁이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신사 뒤쪽 삼나무숲길에서 20여분 산책을 즐긴 후 전망대로 갔다. 그 곳에는 한국식 팔각정도 세워져 있었는데 날씨가 맑으면 부산의 광안리 앞바다가 보인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날은 짙은 안개가 광안리를 품어버려 아쉬웠다. 그러나 내려다보는 경치는 ‘壯觀’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 팔각정 맞은편에는 朝鮮國譯官使 殉難碑가 서있고 그 아래의 오석 기단에는 순직한 역관 112명과 이들을 환영하러 나왔던 일본관리 등 네 명의 이름이 음각돼있었다. 이들은 1703년 음력2월5일 배가 풍랑에 말려 침몰하는 바람에 순직했다. 현재의 비석은 순직자의 명단이 발견됨에 따라 1991년에 처음 세운 것을 헐고 순직300년만인 200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들은 왜 무엇 하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곳에 왔다가 죽어서 고혼으로 돌아갔을까? 삼가 그들의 나라사랑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주었다.
안개 속에 숨은 부산항을 뒤로하고 근처의 바닷가 식당에서 이번 추억여행의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술을 청하지는 않았다. 식사 후 근처에 있는 일본의 100대 해수욕장중 하나인 미우다 해수욕장의 고운 모래밭을 걷고 잔잔하고 유리알처럼 맑은 바다를 보면서 기념촬영도 했다. 그리고 히티카츠 항의 면세점과 마트 등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사서 귀국선에 올랐다. 1시간20분쯤 후 부산역 광장 근처 돼지국밥집에서 다시 모인 친구들은 맛있는 국밥과 시원한 C! 소주 한잔으로 멋지고도 아름다운 20대로의 해외추억여행을 마무리 했다.
< 추신 > 이 글은 2017년6월29일부터 7월1일까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1970년 입학동기 14명이 현해탄 가운데의 섬 대마도를 다녀 온 여행기 입니다.
만4년이 지나는 동안 함께 갔던 일행 중 한 분은 하늘로 떠났네요. 여행 4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이 글을 올리며 먼저 하늘로 올라 간 동기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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