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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지리산둘레길 완주기 ③ 위태∼하동호∼삼화실 : 21km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1. 7. 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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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 좋은 민박집서 쌓인 피로 날려

어제 저녁상처럼 푸성귀가 풀풀 넘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7시30분쯤 ‘정돌이’ 민박집을 나섰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일터로 나가는 바깥양반의 정감 넘치는 작별인사가 참 따사로웠다. 경상도 토박이인 내게까지도 투박한 경상도사투리가 정겹게 들리는 게 새삼스러웠다. 안주인보다 훨씬 다소곳한 말씨며 태도가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특히 한 해전 실종된 개 ‘정돌이’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그는 “누군가가 개를 붙잡아 두고 있어 못 올뿐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정돌이가 돌아오기를 빌어주며 남아있는 ‘정돌이의 두 가족들’과도 헤어졌다.

 



길은 민박집을 끼고 돌아 10여분도 가지 않아 가파른 산길로 접어들었다. 배도 부른데다 몸도 채 풀리지 않아 정말 힘들었다. 금방 잔등에 땀이 배어날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그 바람에 겨우 30여분만 걷고서 작은 마을 앞 삼거리의 나무그늘에서 숨고르기를 해야 했다. 휴식 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가니 이번엔 절벽에 가까운 산비탈이 나타났다. 한 발 앞서 출발했던 78세의 선배는 산길의 들머리를 지나친 바람에 한참동안이나 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 일행과 합류했다. 경사가 하도심해 발붙이고 서는 게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나무도 간벌한 지역이라 햇살까지 쏟아져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 고개가 해발 400m에 가까운 지네재였다. 숨 가쁘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구불구불 지네를 닮았다. 안내책자엔 밤늦게 일을 마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산길을 내려오던 모습이 지네를 닮아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기다시피하면서 1시간 반쯤 만에 고개에 오르니 별천지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울창한 송림과 불어오는 산바람이 지금까지의 고통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길도 거기서부터는 평지처럼 순탄했다. 좌우의 계곡과 산록에 펼쳐지는 녹색의 물결에 환호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이 뜻하는 희열을 몸으로 느끼며 걸었다. 나무들 사이로 작은 마을들이 보였지만 그냥 지나쳤다. 약3km쯤 경치 좋은 산길을 걸어 아스팔트 포장 지방도로로 내려섰다. 하루에 두 번만 진주에서 버스가 온다고 안내책자에 적혀있는 궁항마을이다. 도로를 지나 농로로 들어서니 마을 옆 언덕위의 하얗게 만개한 밤꽃이 핵실험 때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처럼 보였다. 또 마을 뒷산 아래쪽에는 온통 연두색 대나무 숲이 뒤덮고 있었다. 대나무는 열대지방이 원산지인데 우리나라의 기온이 높아지면서 더 무성하게 퍼지고 있는 것 같다.

 

 


궁항마을은 논밭이 넓지는 않아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높다랗게 축대를 쌓아 만든 논에 벼가 지라고 밭에는 딸기나 각종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밭이나 논두렁에 설치된 전기울타리가 길손의 눈길을 끌었다. 태양열 집열판으로 전기를 얻는 이 울타리엔 ‘감전주의’란 경고문이 선명했다. 산간지방이라 수시로 출몰하는 산짐승들을 막기 위한 것일 테지만 사람들의 무단출입 방지도 노린 것 같다. 옛날엔 나무울타리를 하거나 철조망을 쳤던 것에 비하면 첨단과학시대를 맞은 격세지감이 든다. 그 뿐만 아니었다. 땅에서만 자라는 딸기가 공중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밭의 이랑위에 어른 가슴높이로 길게 설치된 시렁 모양의 재배상(栽培床)에서 익어가는 풍경이 경이로웠다. 첨단기술은 농사방법도 변모시켜 딸기가 허공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양이터 마을이 나왔다. 작은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마을회관 앞 평상에서 간식을 하며 쉬었다. 길은 다시 시멘트로 덮인 오르막이다. 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도 만만치 않았다. 산비탈 그늘에 앉아 더위와 피로를 달래다 걷기를 반복하며 걸었다. 길 한쪽에는 대나무 숲인데 길 가장자리엔 굵고 잘 생긴 대나무순 4형제가 하늘로 힘차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임도를 시멘트로 단단히 포장하지 않았다면 죽순들은 벌써 임도까지 침범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다보니 양이터재가 나온다.

 

 


해발 400m가 훨씬 넘는 고개 마루엔 화장실과 벤치가 있었다. 잘 자란 소나무의 그늘이 길손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벤치 옆 공터 잔디밭엔 사람 이름이 새겨진 여러 개의 둥근 돌들이 박혀있었다. 각 돌들에는 의미심장한 경구(警句)가 새겨져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읽어봤다. 이름을 보니 아마도 어느 스님이 새긴 글 같다.
“주체적으로 진리가 삶을 자유롭게 한다고 하신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길을 걷습니다.” -도 법-.
참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도법이란 분의 스승은 어떤 분이었을까? 나는 무슨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걸을까?

 



길은 내리막으로 변했고 포장 안 된 흙길이었다. 어렸을 때 내가 무수히 넘나들었던 고향마을 앞산의 고개 길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 고향산길을 겨울엔 나무지게 지고 넘었고 여름엔 소 앞세워 꼴짐 지고 넘었다. 오늘은 꼴짐이나 나뭇짐대신 배낭매고 넘는다. 한없이 돌아가고픈 그 고향 길을 상상하며 걷다보니 지름길 표지판이 나온다. 임도를 벗어나 숲이 울창한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비가 많이 오면 계곡물 범람 때문에 폐쇄되는 길이란다. 밝은 햇살을 받다 갑자기 숲으로 내려오니 선글라스 쓰고 걷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계곡물 소리 벗 삼아 습기 찬 돌길을 걸었다. 곳곳에 울창한 숲에 맞서 용감하게 파고드는 무성한 대나무 숲도 있었다. 그야말로 대나무들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잡목 숲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추세라면 머잖은 앞날 대나무가 온 산을 뒤덮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려오니 작은 마을이 나왔고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 너머로 파란 호수가 보였다. 마을은 상이마을, 호수는 하동호였다. 정돌이 민박에서 11km쯤 떨어진 곳이다. 마을 일부가 하동호에 수몰된 상이마을은 풍수지리상 큰물을 만나는 곳이란다. 안내책자엔 ‘하동호 건설로 그 풍수설이 입증된 셈’이라고 기록돼 있다. 호수 가에 설치된 대형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커다란 차일아래 대형 벤치와 평상이 설치돼 있었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한낮의 열기를 차일로 막기엔 역부족이라 곧 일어서 국도를 따라 걸었다. 조금 가니 호수 쪽 길가에 튼튼한 나무 데크 길이 설치돼 있었다. 시원한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데크 길은 지리산 둘레길에서는 이곳뿐이란다. 전망이 좋아 기념사진 찍느라 더운 줄도 몰랐다. 데크가 끝나는 곳의 나무그늘에서 쉬며 간식과 물로 체력을 보충했다.

하동호는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와 상이리 앞의 묵계천을 막아 만든 인공호수다. 1993년 준공됐으며 경남지역에서 가장 큰 농업용저수지라고 한다. 최근에 소수력 발전시설도 추가됐다. 둘레길은 하동호 둑 위를 지나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점심을 먹기 위해 어제 밤에 알아 둔 하동호관리사무소 앞 유천식당을 찾아갔다. 60살 전후의 아주머니 두 사람이 쉬다말고 나와 반겨주었다. 호수 옆이라 얼큰한 민물매운탕을 기대했지만 삼계탕만 가능하고 술도 막걸리는 자기들이 다 마셔 소주뿐이란다. 민물고기 대신 닭, 막걸리 대신 소주로 더위에 지친 몸을 보양식으로 달랠 수밖에. 그런데 아주머니들은 우리 때문에 늦어졌던 점심을 먹기 위해 찐 감자 몇 개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갓 쪄 낸 감자처럼 따뜻한 인정을 느끼게 해 주는 인심이었다.

 



식사 후 다른 손님도 없어 아주머니들의 양해를 얻어 모두가 한 시간쯤 식당 방에서 낮잠을 잤다. 그리고 한낮의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오후2시 반쯤 길을 나섰다. 아주머니들은 더 쉬웠다가 해가 좀 기울어지면 가라고 만류했었다. 음식점 앞 광장을 지나 하동호 둑 아래로 흐르는 하천변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하천부지에는 축구장, 테니스장 등 각종 체육시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안 보였다. 500m마다 서있는 둘레길 안내기둥만 따라 걸었다. 호수에 물이 갇힌 탓에 하천의 물은 실개천처럼 조금만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다. 시멘트 길이라 더운데다 무척 눈이 부셔 선글라스 안 쓰고선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2km쯤을 가니 평촌마을이 나왔고 국도인지 지방도인지 모를 아스팔트 길도 나왔다. 청암면 소재지여서 우체국, 농협하나로 마트도 있었다. 면소재지를 지나 들판을 가로지른 농로를 따라 걸었다. 밭둑길을 지날 때는 땡볕 아래서 일하던 부부가 우리에게 ‘더위에 조심해서 가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밭 옆을 흐르는 개울에 놓여있는 자연석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고향마을 동구 밖 징검다리 생각도 났다.

 



징검다리를 건너 논둑길을 걸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관점마을이 있었고 길옆에는 위풍당당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침 평상에서 휴식중인 마을 어른이 있어 몇 마디 이야기도 나누었다. 하동호 건설로 물 걱정 없어 좋겠다고 하니 아니란다. 원래 마을 앞 하천엔 물이 철철 흘렀지만 둑이 막힌 후 하천이 말라버렸단다. 그 때문에 하천바닥엔 잡초만 무성하고 호수에 가두어 둔 물은 다른 지방 사람들만 좋은 일 시킨다고 했다. 횡천강(橫川江)으로도 불렸던 만큼 옛날엔 항상 맑은 물이 흘렀던 것 같다. 80을 넘은 노인의 얼굴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노인과 헤어져 도로양쪽으로 우거진 벚나무가 터널을 이룬 국도를 걸었다. 좌우로는 광활한 논이 펼쳐져 있었다. 벚나무 터널이 끝나고 들판을 가로지른 농로를 따라 걸었다. 하동호를 지나온 물이 흐르는 횡천(橫川)에 놓인 관점교를 건너고부터 길은 평탄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지방도로로 이어진다. 약2km 떨어진 용심정 마을까지 아스팔트의 열기와 여름날 오후의 햇살을 안고 걸어야 한다. 가로수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는 몇 그루도 키가 작아 그늘이 별로 업었다. 더위에 지친 탓에 그 작은 나무의 그늘에서도 쉬었다. 이 길도 어제 지나온 길처럼 가로수보다는 길옆의 전신주가 더 많아 보였다. 게다가 수시로 지나가는 택시, 승용차, 화물트럭이 우리를 아주 힘들게 했다. 용심정 마을을 지나니 길은 서서히 가파른 오르막길로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 삼화실 마을까지 가려면 넘어야 할 존티재 길이 시작되었다. 배낭의 무게가 슬금슬금 느껴지기 시작한다.

 


무더위와 피로를 참으며 앞만 보고 걸으니 명사마을이 나왔다. 길가에 세워진 대형 마을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산의 동쪽사면 자락에 자리 잡은 명사마을 뒤편엔 역시 대나무 숲이 울창했다. 지루하고 힘들었던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가팔라진 언덕길을 올라가니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간다. 상존티 마을의 유명한 대나무 숲길이다. 컴컴하게 느껴질 정도로 짙은 대숲 길이었다. 떨어져 쌓인 대나무 잎들 때문에 비탈진 길이 마치 얼음이 언 것처럼 미끄럽다. 경사도 심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올라가고, 또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이 대나무숲속에도 농작물에 손대지 말아달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대숲을 지나 해발400m가 넘는 존티재 마루에 오르니 우뚝 선 장승 둘이 우리를 반긴다. 하동군이 세운 부부장승이다. 이제부터는 목적지 삼화실 마을까지 내리막길이다. 길옆에는 일손이 모자라 꺾지 못한 고사리가 무성히 자란 고사리 밭도 보였다. 이정표를 보니 1km 남짓 남았다. 저 멀리 산 아래로 작은 마을과 상당히 넓은 들이 보였다.

 


숲을 벗어나니 상당히 경사가 심한 시멘트 포장길이 나왔다. 경사는 심했지만 내리막이어서 순식간에 마을까지 내려왔다. 논두렁의 호박넝쿨 위로 솟은 이정표에 삼화실 0km라고 적혀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폐교된 옛 삼화실초등학교 건물과 교정이 있었다. 지금은 학교가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복지시설인 ‘에코하우스’ 이다. 지리산둘레길 길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도 이용되지만 식사는 제공되지 않는다. 삼화실초등학교는 주민들이 땅을 기부하고 노역으로 설립해 한때 600명이 넘는 학생들의 배움터였단다. 그렇지만 개교 60년을 못 채우고 1998년에 폐교됐다가 지리산둘레길이 열리면서 지금은 주민들의 공공시설로 되돌아 온 셈이다.

 



워낙 잘 걸은 탓인지 산길 21km를 왔는데 해가 아직도 한 참이나 남았다. 오늘의 민박집 ‘산도리마을’은 에코하우스에서 500m쯤 떨어져 있었다. 전화연락을 받은 바깥주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림집과 우리들의 숙소는 직선거리로 50m쯤 떨어져 있었다. 여장을 풀고 간단히 샤워 후 숙소마당의 평상에서 주인이 내어 온 얼음처럼 시원한 막걸리로 피로를 풀었다. 서산머리에 걸린 햇살을 받으며 마시는 막걸리 맛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 없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던 일행 중 한 사람도 이 막걸리는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을 정도로 좋았다.

 



길고 긴 여름해가 산을 넘어가고 저녁노을이 곱게 번질 때쯤 바깥주인과 함께 둘러앉은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큼직한 굴비도 두 마리나 올라와 있었고 각종 정갈한 산나물반찬과 부침개들이 또 다시 막걸리를 마시게 했다. 주인양반도 함께 먹고 마시며 산촌의 초여름 밤은 깊어갔다. 집배원으로 근무하고 7년 전 은퇴한 주인은 지리산 둘레길 개설과 에코하우스 설치에 큰 몫을 했단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이웃 세 집에게 민박집 운영을 할 수 있게 행정적 지원에다 사비를 들여 개인적 지원까지 해주었다. 그랬지만 손님들이 많지 않은데다 농사일까지 해야 하는 그 사람들이 모두 민박집 운영을 포기해 자신이 떠맡게 됐다고 했다.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끝내 함께 식사는 하지 않고 우리들의 시중에만 충실했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의 장성한 두 아들이 든든해 보이는 단란한 가족이었다. 서울을 출발할 때 집사람 친구가 소개해준 집인데다 어제 잤던 정돌이 민박집에서도 추천해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인심 좋은 주인 부부 덕에 잘 쉬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래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도 생겼나 보다. <계 속 >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시리즈 총10회) 중 제2차걷기(6월22-26일) 완주기 4회분 중 제3회 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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