垂直上昇 길에 울고 人情佳話에 웃다
두 달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6월22일 오후1시 경남 산청군 산청읍 지리산 자락의 성심원 옆 지리산둘레길 산청센터. 지난 4월말 함께 걸었던 네 사람이 센터 사무실에 들어서자 눈썰미 좋은 여직원이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준다. 지난4월 둘레길을 걸을 때 성심원 근처에서 다른 직원과 함께 이정표 보수작업을 하다 우리를 보았던 그 사람이다. 마치 오래 기다렸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다정스럽다. 여름철이라 길손들이 뜸해서였을까?
이날 아침 8시20분 서울 남부버스터미널을 출발한 우리들은 12시쯤 산청읍 버스터미널 근처의 소문난 음식점에 들어갔다. 두 달 전 1차 걷기를 마감하고 상경하던 날 들렸던 곳이다. 마침 농사철이라 들밥 배달주문이 밀려 우리는 30분가량을 대책 없이 기다린 후에야 맛있는 돼지고기 고추장볶음에 막걸리 반주로 2차 둘레길 걷기 발대식을 했다. 길손들에겐 맛있는 음식과 한 잔의 술이 누가 뭐래도 최고인 것 같다. 배불리 먹은 우리들은 택시로 산청센터 사무실에 도착했다.
숙소를 정하지 않은 길손들의 첫 일은 그날 저녁 묵어 갈 곳을 정하는 것이다. 또 별도의 취사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식사도 가능한 곳이라야 한다. 우리들의 걱정은 친절한 여직원 덕에 곧 해결됐다. 첫날 묵을 목적지에 있는 민박집을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즐겁고 신나게 걷기만 하면 된다. 직원의 자세한 길안내를 받은 후 사무실을 나서니 쨍쨍 내리 쬐는 한낮의 햇살이 내뿜는 더위가 길손들의 숨을 막는다. 직원에게 부탁해 기념촬영 후 햇빛 속으로 들어갔다. 4박5일간 85km의 산길을 걷는 두 번째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약20분가량 평탄한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 풀숲 길로 들어섰다. 시원스레 하늘로 솟은 소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 완만한 길도 걸었고 새빨간 석류꽃이 풀 속에서 수줍게 웃는 길도 지났다. 무시로 나타나는 시멘트포장 임도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늘이라 좋았다. 그렇게 신나게 가니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딱딱한 시멘트포장 길이 길게 계속 됐다. 벌써 잔등에 땀이 배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햇빛에 달구어진 시멘트 길에서 뿜는 복사열까지 겹친 탓이다. 그러나 묵묵히 앞만 보며 안내 책자에 소개된 시원한 어천마을(산청군 단성면)의 계곡만 생각하며 참고 걸었다.
이윽고 작지만 앞이 탁 트인 고개에 올랐다. 안내표지판을 보니 아침재라고 적혀있었다. 성심원에서 2km쯤 되는 곳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우리가 왔던 길은 경치 좋고 시원한 어천마을 계곡을 통과하지 않는 길이었다. 센터에서 나와 갈라지는 곳에서 다른 길로 들어 온 탓이다. 갑자기 더위가 확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그 때문에 2.7km쯤 줄어들은 것이리라. 이래서 옛 선현들도 ‘살다보면 음지와 양지는 항상 교차된다.’고 말했으리라.
아침재를 지나니 포장길 임도가 오르내림을 반복 하면서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약 2km가량 이어지던 임도가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끊어지고 절벽에 가까운 산비탈이 가로 막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갈라지는 곳도 없었던 외길이었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모두가 길을 못 찾아 한참 주변을 헤맨 끝에 왔던 길을 20m쯤 되돌아 간 곳에서 계곡 너머로 이어지는 들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찾고 보니 널따란 임도에서 길옆의 풀밭으로 난 좁지만 잘 보이는 길이었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넓은 임도 때문에 충분히 놓칠 가능성도 있어보였다.
우리들은 안도의 숨을 쉬면서 산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말로 심한 고생이 곧 바로 시작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가 이런 길을 둘레길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산길을 걷다보면 경사가 심한 구간을 만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심한 경사기 수직으로 한없이 이어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만 가면 완만한 길이 나오리란 희망 속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길이 완전히 우리들을 배신했다. 각도를 전혀 낮추지 않은 채 지그재그로만 이어지는 길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조금 과장하면 코가 산길에 닿을 정도의 경사가 계속 됐다.
78세의 선배가 힘들어 하는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 보다 20살 아래인 후배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걸었다. 70을 갓 넘긴 나머지 두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금 오르다가 쉬었고 몇 발짝 옮기다가 또 주저앉았다. 그 때마다 가지고 간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가 있는 산길의 높이가 빠르게 높아지는 것이 실감났다. 속된 말을 빌리자면 ‘정말 힘들어 죽을 맛 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누가 시켜서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당장에 때려 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원해서 택한 길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잘 못 한 선택을 원망할 수밖에. 도중의 나무기둥 이정표를 보니 올라가야 할 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80을 코앞에 바라보는 선배는 더 못 갈 것 같다며 정말로 힘들어 하셨다. 지리산둘레길 공식 가이드북에도 ‘노약자가 걷기엔 힘들다’고 적혀 있긴 했지만 이토록 힘 들 줄은 몰랐다. 힘센 곰들이나 자유롭게 거닐 수 있기에 웅석봉(熊石峰), 일명 ‘곰바우산’이란 이름이 생겼을 것 같다. 고행은 웅석봉 아래에 있는 헬기장에서 끝났다. 헬기장의 높이는 해발 650m쯤 이고 아침재의 높이는 200m쯤 되니 불과 2km쯤 이동하면서 높이는 무려 450m넘게 치고 올라간 셈이다. 서울 근교의 수락산이나 관악산 높이가 해발 630m쯤 되는 것에 비춰보면 이 구간은 상당히 힘든 등산코스라 해야 할 것 같다. 행동이나 생각이 약간 굼뜬 사람들을 우리는 ‘곰바우’라고 놀린다. 오늘 우리가 바로 그 ‘곰바우산’에서 ‘곰바우’가 되고 말았다.
그 곰바우 넷이 헬기장에 도착하니 임도에 서있는 이정표와 예쁘게 웃음 짓는 붉은 산나리 꽃이 반겨준다. 조금 전까지 했던 막심한 고생도 산나리 꽃에 앉은 나비의 날개 짓 한 번에 씻은 듯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을 간다는 사실이 우리들을 기쁘게 했다. 길은 완만한 시멘트 포장 임도로 이어진다.
그런데 쉬울 줄 알았던 내리막길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았다. 산의 8부 능선쯤에서 시작된 포장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안내표지를 보니 이런 능선길이 무려 6.5km나 떨어진 점촌마을까지 이어진다고 적혀있었다. 산자락을 타고 돌며 비스듬히 이어지지만 경사도가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간간히 나오는 평탄한 구간에서 길옆이나 건너편 산자락의 짙은 녹음이 지르는 푸른 함성도 만끽했다. 또 비스듬히 서편으로 기우는 햇살이 숲 사이를 통과하면서 빚어내는 환상적 모습에 감탄도 했다. 그러나 내리막길도 무척 힘 든다는 사실을 절감해야했다. 대략 500m쯤마다 나타나는 지리산둘레길 안내 포지기둥만이 작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 기둥에는 지나 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표시돼있기 때문이다.
발바닥에 닿는 시멘트의 딱딱함에다 신발의 앞쪽으로 밀리는 발가락의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사가 심한 곳일수록 발가락들의 고통은 커져갔다. 평지라도 멀게 느껴질 거리인데 산자락을 돌아가는 비탈길이니 지루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아득히 멀리 산 아래에 보이는 청계저수지의 파란 물이 청보석처럼 보인다. 길은 굽이굽이 좌우를 오가며 우리들을 아래로 내려 몰기에 여념이 없다. 채 가시지 않은 시멘트 포장길의 열기가 따라오며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그 열기를 빨아들이며 하늘로 뻗어 오르는 수목들의 짙푸른 싱싱함이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점점 다리에 힘이 빠져갈 무렵 점촌마을 표지기둥이 나왔다. 그러나 점촌마을은 근처의 청계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 되었고 그 기둥만 홀로 실향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성심원에서 11.2km, 오늘의 목적지 운리까지는 2.2km만 남았단다. 마치 오늘 목적지에 다 온 기분이 들었다. 점촌마을 표지기둥을 지나 조금 내려오다 잘 생긴 진돗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주민과 만나기도 했다. 산길 입구에 작지만 맑은 호수가 보였다. 그 수면위로 저녁 햇살에 비친 주변의 산들이 멋지게 비친다. 호수를 지나 1km남짓 더 내려오니 두 개의 석탑이 멋있게 서있었다. 없어진 절 단속사(斷俗寺)터에 생긴 탑동 마을이다. 본동, 원정마을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는 종착지 운리에 도착했다. 마을에 들어서니 돌담사이로 이어지는 마을길이 정겹다. 또 골목의 담장 아래에 피어있는 새빨간 봉숭아꽃들이 시골정취를 물씬 풍긴다. 푸른 잎들 사이로 숨은 듯 보이는 붉은 꽃들이 처녀들의 붉은 입술을 연상시킨다. 홍난파선생은 그 모습이 처량하다고 노래했지만 내 눈엔 생기 넘치는 예쁜 아가씨들로 보였다.
특히 탑동마을 앞의 3층 석탑 두 개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폐사된 단속사 마당에 있었던 것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 절의 이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금계사였고 학승들도 500명 이상 모여 수도한 큰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절을 찾는 속세 사람들이 많아져 수도에 방해되자 도인이 속세사람들이 못 오게 절 이름을 斷俗寺로 고쳤다는 것이다. 속세와 관계를 끊는다는 뜻의 이름이다. 그런데 그 후 정말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폐사가 됐다는 전설이다. 세상만사가 넘치면 탈이 나는 것임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암 탑인 西塔과 수 탑인 東塔만이 서로 떨어져 쓸쓸히 바라보며 그 옛날의 영화를 그리는 듯 했다.
이 탑 근처엔 오래된 정당매(政堂梅)란 매화나무가 있다. 1982년 경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660년이 넘은 정당매는 조선초 대사헌을 지낸 통정공 강회백(姜淮伯)이 유년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은 것이라 한다. 이 나무는 南冥 曺植선생 기념관인 산천재 마당의 南冥梅, 원정공 하즙(河楫)선생이 심었다는 원정梅와 함께 山靑 三梅로 불린다. 지금의 정당매는 거의 말라죽게 된 나무에 새가지를 접붙여 후계목(後繼木)으로 다시 키운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지식이 이룬 나무의 <변형된 세대교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산청센터 직원이 소개해 준 민박집을 찾아갔다. 민박집 이름이 특이하게도 <양뻔지> 였다. 입구의 밭 가운데로 난 길가에 늘어선 개량 보리수의 붉디붉은 열매들이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그 열매들은 잎보다 더 많이 열려 나무가 온통 붉게 보였다. 해가 지기직전의 한적한 산마을 풍경이 피곤한 일행을 감싸주는 듯했다. 민박집 마당에 들어서니 커다란 고양이가 주인인양 바닥에 배를 깐 채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그 고양이 뒤편에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서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딸을 통해 연락 받았다면서 우선 땀부터 닦으시란다.
마당 양편에 두 줄로 지어진 집인데 마당 가운데 널찍한 평상이 있고 숙소와 본채는 차일로 이어져 있어 햇빛을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게 돼있었다. 숙소 앞의 물이 가득 찬 논엔 모내기 후 뿌리내리기 시작한 벼가 줄을 지어 파랗게 자라고 그 벼들 사이로 건너편 산이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옅은 산 그림자에 서서히 묻혀가는 산촌 풍경이 녹색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았다. 온수시설까지 잘 된 물로 샤워하고 땀에 푹 젖은 옷들은 성능 좋은 세탁기속으로 던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민박집 할머니의 부름에 따라 밥상 앞으로 달려갔다. 벽에 써 붙여놓은 ‘藥繁地(약번지)’에서 민박집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약초가 많이 나는 곳이란다.
여행의 묘미는 만나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인정가화(人情佳話)를 듣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리라. 우리들의 이번 여행의 여러 즐거움 가운데 첫 번째 이야기는 이 밥상 앞에서 시작됐다. 돼지고기 불고기를 비롯해 직접 재배하거나 산에서 채취한 신선한 채소와 산채로 만든 반찬들이 입맛을 돋우었다. 그리고 무한정 제공하겠다며 내오는 막걸리가 길손들의 피로를 단번에 날려주었다. 깊어가는 산촌의 밤은 이래서 즐겁다.
그러나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 할머니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였다. 강원도 인제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6.25사변으로 공부를 중단했다는 데서 시작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들 네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나이가 78세여서 마침 우리일행의 좌장인 분과 동갑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10살 연상이었던 젊은 군인을 만나 산골로 시집왔지만 41세에 남편과 사별했단다. 김해로 나가 음식점을 하면서 아들과 딸을 키웠는데 그 딸은 58세로 우리 일행 중 막내와 동갑이었다.
좋은 음식솜씨 덕에 김해에서 잘 나가는 생선회집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세월에 밀려 그만 두고 딸의 권유로 이 곳에 정착했단다. 국악도 하고 섹소폰 연주도 하는 다재다능한 딸은 지금도 일하러 나간단다. 그처럼 부지런한 딸과 사위가 시작한 민박집 운영은 결국 할머니의 몫으로 남았지만 타고난 음식솜씨로 길손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단다. 37년 수절과부의 한 많고 고달팠던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 됐다. 같은 시대를 살아 온 동갑내기 사람을 만나서 반갑고 인적 뜸한 산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인 것 같았다. 민박집 주변의 논밭 3,000여 평을 소유한 부자 할머니의 신세타령 겸한 이야기가 곧 굴곡진 현대사를 살았던 우리네 여인들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할 말 많은 할머니와 함께 마시는 막걸리 기운 속에 제2차 지리산들레길 걷기 첫 날의 밤은 깊어만 갔다. < 계 속 >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시리즈 총10회) 중 제2차걷기(6월22-26일)4회분 중 제1회 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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