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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지리산둘레길 완주기 ④> 삼화실∼대축∼원부춘 : 25.2km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1. 7. 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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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장마도 비켜간 마지막 12

 

 

625: 삼화실대축 16.7km

 

주인 내외의 후한 인심은 푸짐한 아침상에다 점심식사까지도 해결해 주었다. 오늘 가야할 대축마을까지 16.7km 구간에는 점심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민박집에 부탁했는데 맛있는 김밥주먹밥에다 반찬까지 푸짐하게 준비해 주었다. 주먹밥 비용을 지불하려했지만 한사코 받지 않았다. 주인부부와 함께 기념촬영 후 짙은 구름사이로 잠깐씩 비치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민박집을 나섰다.

 

 

 

10분쯤 걸어서 이정마을 입구에 나오니 지리산둘레길 조성에 관한 돌비석이 서있었다. 비석에는 본 지리산둘레길 조성사업지는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자금)의 지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복권위원회 산림청 녹색사업단이 후원하고 하동군이 주관해서 세운 비석이다. 개인들이 소유한 논이나 밭, 산지 등을 일부 사들여야 했던 곳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둘레길을 조성한 것은 공익을 위한 복권 본래의 취지가 잘 반영된 사업인 것 같다.

 

 

 

마을 앞 들판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숲이 무성한 길이었지만 해발300m쯤 되는 버디재를 넘어야 했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빛이 안 들어올 정도로 우거진 소나무 숲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산속마을인 삼화실(민박한 동네)을 떠난 지 한 시간쯤 되었다. 땀이 식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한기를 느낄 만큼 시원했다. 길은 평탄한 내리막이어서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았다. 힘들게 올랐던 고개였지만 내려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지나 20분쯤 내려가니 2차선 지방도가 지나가는 서당마을이 나왔다. 어느 집 담장에선 탐스런 복숭아가 햇볕에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니 길옆에 붙은 무인주막집이 있었다. 목도 축이고 쉬기도 할 겸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를 사서 나그네들끼리 먹고 마셨다. 주막은 마을사람들의 중요한 쉼터인 것 같았다. 한쪽 벽에는 주민들 36명의 초상화가 바둑판처럼 걸려 있었고 그 앞 책상에는 미완성으로 보이는 초상화 한 점도 삼각받침대에 걸려 있었다. 현존 하시는 분들인지 이미 생을 다하신 분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마을 어르신들임엔 틀림없는 것 같았다. 주막집 창문밖에 붙은 <서당마을 1976年展>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지난54일부터 531일까지 열린 전시회 안내였다. 포스터에는 여러 장의 흑백사진들과 함께 서당마을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부제가 함께 인쇄돼있어 42년 전의 마을모습을 길손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주막을 나와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걷는다. 길가의 자두나무에 달린 빨간 자두가 군침을 돌게 한다. 옅은 구름이 끼었지만 햇살은 뜨거웠다. 경사진 길을 한참 올라가니 커다란 저수지가 나왔다, 산골마을의 중요한 농업용수원이 되는 우계저수지다. 저수지 둑에서 내려다보이는 몽리(蒙利)들엔 물이 가득한 논과 비닐하우스들이 길게 계곡을 따라 펼쳐지고 있었다. 둑을 지나니 포장이 안 된 시골길이 이어진다. 건너편 산의 모습이 저수지 물에 반사돼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들 사이에 산자락의 넓은 부분을 덮고 있는 태양열집열판들도 보였다. 바닥의 흙이 아직 제대로 정비 안 된 걸 보니 아직 설치공사기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무공해 천연태양열 이용이라는 정부의 탈원자력발전(脫原子力發電) 정책에 따른 시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백색의 대규모 집열판들이 덮인 산자락은 녹음 무성한 주변 산자락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농기계들의 소리가 산골의 정적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골짜기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들은 절경의 연속이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즐거운 건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리라. 미국작가 리베카 솔닛은 그의 저서 <걷기의 인문학>에서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 말이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니 정말 실감이 났다. 빠르게 갈 일도 없으니 체력에 맞게 완급조절하며 걸었다. 그러다보니 높은 고개 길이나 가파른 비탈길도 어느새 지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 맞는 길벗들이 함께 가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우계저수지를 지나니 오르막 시멘트 임도가 나왔다. 입구의 괴목 마을 쉼터에서 충분히 쉬고 걷기 시작했다. 이번 2차 긷기 전 구간 중 네 번째로 길고 힘든 고개 길이었다.

 

 

 

 

햇살을 받은 시멘트 임도의 복사열과 바람기 별로 없는 한낮의 열기가 겹친 산길은 가히 찜통이라 할 만큼 덥고 힘들었다. 그에 더해 이 고개는 정말 길었다. 고개 마루인 신촌재의 높이는 해발460m이지만 우계저수지를 떠나서 거기까지 가는데 2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거리도 어림잡아 6km쯤 됐다. 고개 마루 공터 그늘에서 넋을 놓고 쉬면서 배낭에 남아있는 간식거리들을 즐겼다. 딱 한 차례 4륜 구동 산악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굉음을 울리며 넘어갔을 뿐 산속엔 우리들뿐이었다.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자 갈 길을 재촉했다. 고생한 보람을 맘껏 누릴 수 있는 내리막길이 계속됐다. 울창한 송림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도 이제는 덥지 않게 느껴졌다. 어느 구간은 경사가 심해 무릎에 힘을 주면서 내려가는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길은 한동안 내리막이 계속되다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힘도 들고 마실 물로 떨어진데다 배도 고파졌다. 경사가 아주 심한 양지쪽 산비탈에 있는 먹점 마을의 길옆 쉼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음씨 좋은 민박집 아줌마가 싸준 큼직한 김밥주먹밥과 맛깔스런 반찬이 꿀맛이었다. 메타세콰이어 나무들 아래에 설치된 반듯한 평상이 한 잠 자기에도 제격이었다. 피로한 데다 식사 후의 나른함이 밀려와 저마다 편한 자세로 오수를 즐겼다. 이 또한 걷는 사람들의 즐거움이요 특권 아닐까? 바로 옆에는 매실원액을 가공하는 농장이 있었다. 오후길 떠나기에 앞서 농장주인의 허락을 얻어 물통들을 채웠다. 그리고 매실원액도 몇 통사서 마시며 걸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발아래에 하얀 강줄기와 넓은 들, 그리고 강 양쪽의 멋진 풍경들이 펼쳐진다. 섬진강이었다. 일자로 곧게 벋은 국도를 사이에 두고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들판(무딤이들)과 섬진강이 이곳에서 만난다. 지리산둘레길 중 전망이 뛰어나다는 몇 곳들 중 하나인 먹점재다. 비록 소설속의 인물들이지만 조준구의 횡포를 못 견디고 최서희를 따라 섬진강을 건너가야 했던 최참판댁 사람들의 슬픈 행렬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둡고 힘들었던 시절 내 땅과 정든 집을 버리고 해외로 도망가야 했던 가슴 아픈 일들이 어디 소설 속에서만 있었을까? 그런 슬픈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정말 절경이었다. 다만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운무 때문에 뿌옇게 흐린 것이 아쉬웠다.

 

 

 

멋진 절경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다 털고 일어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미동마을이 보였다. 강에 바짝 다가선 산촌인 탓에 마을 안길의 경사는 무척 가팔랐다. 그 경사심한 산비탈에 계단식 터를 만들어 집을 짓고 논밭 만들며 살아온 민초들의 노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마을 위쪽 산자락에선 그날도 중장비를 이용한 땅고르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논을 만드는 건지 건물을 지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계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턱에 숨이 닿을 정도의 비탈진 미동마을길을 벗어나니 짙고 푸른 숲속으로 접어든다. 완만한 길이 숲속으로 이어지면서 가빴던 숨도 순식간에 순조로워졌다. 그런데 길 가운데 무수히 떨어져 밟히는 매실들이 안타깝다. 지천으로 맺혀서 익고 거두어들일 일손이 없어 떨어진 매실들이다. 강 건너 광양의 그 유명한 매실농원이 바로 지호지간에 있는 마을이다. 그만큼 이 일대의 고장은 매화가 자라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인가 싶다.

 

 

 

그렇게 내려가다 오늘의 마지막 고개에서 쉬었다. 구재봉으로 넘어가는 갈림길이다. 마침 지리산둘레길 관리회사인 ()숲길에서 나온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산 위에서 우리들 일행이 오는 모습을 보면서 내려왔단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지나온 미동마을 경유길이 너무 가파르고 힘들어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답사 겸 실측을 하고 있단다.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종착지 대축마을은 2km정도 남았다. 내리막길이어서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주 멋진 정자가 있었다. 또 그 정자 바로 앞에는 멋지다가보다는 貴品이 넘치는 낙락장송 한 그루가 바위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경상남도 기념물이었다가 200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문암송(文岩松)이다. 수령은 약600년 정도로 추산할 뿐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그 이유는 뿌리가 바위틈새를 뚫고 자란 탓에 땅에서 뿌리내린 보통 소나무와 비교가 안 돼 정확한 나이를 측정할 수가 없단다. 이 소나무 아래서 바라보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의 그림 같은 풍광은 시인묵객들의 멋진 시회(詩會)소재가 됐단다. 이런 연유로 나무 이름이 문암송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소나무 앞 정자 문암정에 올라서 악양들과 그 너머의 형제봉을 바라보니 과연 그림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내일 우리가 넘을 곳이다.

 

 

 

마침 정자위에서 젊은 남자 셋이 술추렴을 하고 있어 우리도 한 잔 얻어 마셨다. 그들도 모두 이 곳이 좋아 몇 년 전에 정착한 타관사람들이란다. 그중 전주가 고향인 한 사람은 나름대로 이 고장의 인문지리에 대한 식견이 있어 우리들에게 좋은 문화해설을 해주기까지 했다. 몸담았던 세상살이를 털어버리고 풍광 좋은 곳에서 느긋한 제2의 삶을 즐기는 그들이 신선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부탁해 우리도 악양들판을 바라보는 신선흉내를 찍고 민박집을 찾아갔다.

 

전화연락을 받은 주인이 아직 일하고 있는 중이니 먼저 집에 가서 쉬고 계시라고 했다. 우리는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 국도변 매점의 느티나무 아래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늦은 오후의 여름햇살을 즐겼다. 그리고 민들레란 이름의 민박집으로 갔다. 잘 지어진 단층양옥집 넓은 마당엔 화단이 예쁘게 만들어져 있었고 마당의 동쪽 담장아래엔 수십 그루의 분재화분이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화단 가운데 자란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아래에 있는 평상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일을 끝내고 자동차로 달려온 주인부부는 모두 건장한 모습이었다. 농사일도 틈틈이 하지만 유리와 알루미늄새시 기술자였다. 객지생활을 하다 10년쯤 전에 귀향해 옛집을 헐고 이 집을 손수 지었단다. 그리고 지금은 객지생활을 하던 동생들 둘까지 데려와 이 마을에서 함께 산다고 했다. 식탁에 가득히 차려낸 정갈한 저녁상은 많은 정성이 깃들어 보였다. 맛깔스런 반찬의 힘을 빌려 소주 두 병을 곁들여 2차 들레길 걷기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우리들의 세탁물까지 말끔하게 탈수해 널어주는 주인아주머니의 정성이 더욱 고마웠다.

 

 

 

늦은 밤 평사리 들판 너머 최참판댁 동네의 불빛이 점점이 보였고 하늘 가운데 솟은 달은 짙은 달무리에 둘러싸여있었다. 북상한 장마전선 탓에 많은 비가 예보된 내일의 기상 상태가 걱정된다. 사실 낮에 일행끼리 장마북상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었다. 오늘 저녁에 상경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내일 아침에 날씨를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하늘이 하는 일에는 거스를 수가 없으니까. 점점 짙어지는 달무리를 보면서 잠들었다.

 

626: 대축원부춘 8.5km

 

아침 5시 반쯤 일어나니 하늘은 짙은 구름에 가려있었다. 새하얀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일기예보는 중부지방에서부터 시작한 비가 남하해 전국적으로 내린단다. 아침식사 후 잠시 망설였지만 원부춘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오더라도 오전까지는 많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다는 민박집 주인의 말에 용기를 내고 나섰다. 그렇지만 걸핏하면 집중호우가 쏟아지곤 했던 지리산 서쪽자락을 가야하기에 마음을 놓읗 순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비는 형제봉 정상을 지날 무렵 그쳤기 때문이다.

 

 

 

730분쯤 민박집을 나서 넓게 펼쳐진 평사리 들판의 가장자리로 난 방천둑길을 걸었다. 논바닥이 제방 밖의 악양천 바닥보다 낮은 탓에 둑은 무척 높았다. 그 둑길에 세워진 평사리 일대의 지리산둘레길 안내지도 표지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들판으로 내려갔다. 눈이 모자랄 만큼 광활한 들판을 신작로처럼 넓은 농로가 가로세로로 바둑판처럼 구획 짓고 있었다. 또 그 농로를 따라 난 넓은 농수로엔 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어떤 가뭄에도 물 걱정 없을 비옥한 들판에 들어서니 저절로 배가 부를 것 같았다. 그 들판 가운데 있는 작은 공터에 부부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내리기 시작한 비에 젖고 있었다. 그 소나무 앞에는 이 평사리들판의 다른 이름인 무딤이들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다. 섬진강 500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인 무딤이들은 83만여 평이나 된다고 한다. 그 때문에 만석지기 두어 집은 너끈히 낼 수가 있단다.

 

 

 

들판 가운데를 지날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들판을 지나 마을 앞에 도착했을 때는 굵은 가랑비로 변했다. 나무아래 쉼터에서 비옷을 입고 빗길을 걸었다. 다행히 세차게 쏟아지지 않아 걷는데 지장은 없었다. 최참판댁이 있는 마을을 지나 봉대마을에서 길은 산으로 접어들었다. 마을 뒤쪽의 오래된 서어나무 아래 쉼터에서 간단히 쉬고 비탈길을 40분쯤 올라가니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섰다. 이번 둘레길 걷기 구간 중 마지막 남은 힘든 길이다. 형제봉의 정상부근에 있는 해발 600m 가까운 웃재를 지나야 한다. 비는 계속 내려 발밑이 미끄러운 곳도 조심조심 지나야 했다. 우거진 숲속이라 바람이 불면 나뭇잎에 맺혔던 빗방울들이 후두둑소리 내며 요란하게 떨어진다. 그 소리가 장대비 오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비는 우리의 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계속 가늘게 내렸다. 짙은 운무가 심해 먼 곳의 절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신령스런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비에 젖은 흙길을 지나고 미끄러운 바위를 타넘으며 웃재에 도착하니 비도 어느 새 그쳐있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우리들의 목적지 원부춘까지는 3.7km 남았다고 이정표에 적혀있다. 거추장스러웠던 비옷을 벗고 발밑을 조심하며 2시간쯤 내려오니 산죽이 우거진 터널길을 지나 포장도로가 있는 마을이 나왔다. 산길 걷는 것은 끝났다. 마을 앞쪽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이 버섯을 닮았다. 오늘의 목적지 원부춘 마을이다. 노인정 겸 마을회관에서 택시를 불렀다. 7km쯤 떨어진 화개버스터미널로 나와 택시기사가 추천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의 별미 재첩무침과 고막무침이 걷기에 지친 나그네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 추신 >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45일만에 2차 지리산둘레길 7개구간 85.1km 걷기가 모두 끝났다. 시골 버스터미널의 사정을 잘 몰랐던 탓에 예매했던 서울행 버스를 놓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류장에 들어와 정차할 것이라 생각했던 버스가 채1분도 안 서고 출발해 버린 것이다. 매표소 여직원의 도움으로 버스기사와 통화, 이웃 구례읍 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전속력으로 따라가 버스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것도 여행자의 즐거운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니 앞이 안 보일만큼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심한 장마 비도 우리들의 산길은 방해하기가 싫었던가 보다. 마지막 남은 약84km구간은 9월 초순에 계속해서 걸을 예정이다. < 3차 걷기에서 계속 >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시리즈 총10회) 중 제2차걷기(6월22-26일) 완주기 4회분 중 제4회 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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