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내음에 취하고 꽃빛에 젖다
새벽잠을 설치고 아내와 함께 안개 짙은 서해고속도로를 달렸다. 위용을 자랑하는 서해대교의 거대한 주탑(柱塔)마저 안개에 묻혀 빛을 잃고 말았다. 상행선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안개등 행렬이 흰 도화지에 그린 한 폭의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서해가 가깝기 때문일까? 계절 탓일까? 안개가 나를 따라 오는 건지 내가 계속 안개 속을 달리는 건지 모르겠다. 안개와 벗하며 금강을 지나니 옅어진 안개너머로 금만평야의 황금물결이 펼쳐진다. 비로소 지평선을 바라보며 시원스레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으로 달려 장성군 축령산 편백나무 숲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한지 4시간만이다.
전남 장성군과 전북 고창군에 걸쳐있는 축령산(621m)의 260ha에 조성된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의 수풀은 한 사람의 집념으로 이루어진 국내 최대의 인공조림지이다. 고 임종국선생(1915-1987)이 1956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필생의 사업으로 가꾼 이 수풀은 높이 20m에 이르는 거목들이 하늘을 가린 채 울창하다. 온 국민의 휴양림이자 치유의 숲, 자연교육장으로 각광받는 이 수풀에 이르는 길은 4개가 있다. 우리는 추암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었다.
30여 분 동안 비탈진 임도를 걸어 고개에 올라가자 편백나무, 삼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며 서있는 숲이 나타났다. ‘치유의 숲’이 시작되는 곳이다. 숲 해설사의 친절하고도 간단한 설명을 듣고 임도 좌우로 난 숲길을 걸었다. 숲길은 크게 3개 코스가 있지만 우리는 그냥 걸었다. 상록침엽수가 내뿜는 향긋한 내음과 짙은 나무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몸과 마음은 어느새 무게를 잃고 만다. 새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 구석구석을 걷고 사진도 찍었다. 나무들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하늘의 안개는 활짝 걷혀 녹색과 청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도중에 나타난 공터의 나무 등걸에 기대앉아 과일과 간식으로 휴식을 즐겼다. 이 아름다움, 이 멋진 광경을 나의 짧은 글재주나 말솜씨로는 표현 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곳곳에 작은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실개천도 있었다. 어느 구간은 튼튼한 나무계단길이 꼬불꼬불 이어진다. 간간이 뱀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있어 숲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후좌우 보이는 것이라곤 쭉쭉 곧게 하늘로 뻗은 아름드리 나무둥치들 뿐이었다. 나무 밑둥치들이 갈색이 아니라 녹색이었다면 대나무 밭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그 나무들 사이로 햇살의 줄기가 내려 꽂히고 있었다. 그 숲속 아트막한 언덕의 느티나무 아래 이 숲을 가꾼 임종국선생이 잠들어 있었다. 2002년부터 이 숲을 관리하는 산림청이 선생의 묘를 이장, 화장한 후 수목장으로 이 곳에 모셨다고 한다. 비록 산림은 다른 사람 소유로 바뀌었지만 이 아늑한 곳에 누워서 선생은 오늘도 푸른 숲과 새소리, 바람소리를 즐기시리라 믿는다.
숲내음에 취하고 살랑바람과 새소리를 벗하다보니 어느 새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올라갔던 임도를 되돌아 내려와 주차장 근처의 음식점으로 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시골밥상이란 메뉴가 맘에 들어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런데 무려 14가지의 반찬과 함께 밥 두 그릇이 차려졌다. 말로만 듣던 남도지방의 넉넉한 인심을 실감했다. 이 좋은 안주에 막결리 한 잔이 없을 소냐. 서울의 장수막걸리보다 양이 많은 통에 담겼는데 단맛이 좀 강했다. 시원한 막걸리가 산길 걷느라 생긴 갈증을 단숨에 날려주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지방의 국도를 30여분 달려 예약해 둔 방장산 국립자연휴양림 휴양관으로 갔다. 숲속에 자라한 아담한 2층 건물의 2층 방을 배정받았다. 숲이 울창해 전망은 온통 수풀이요 멀리 보이는 산자락뿐이었다. 숲에서 풍겨오는 송진 냄새를 품은 산뜻한 공기가 가슴속 깊이 시원하게 파고든다. 아내와 손잡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숲속 길을 걸었다. 가로등이 켜질 때쯤 방에 들어와 준비해간 음식에 술 한 잔 곁들여 건강한 동반자임을 재확인 했다. 숲이 우거진 탓에 하늘이 좁아져 많은 별들을 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전 다시 한 번 숙소 주변 길을 산책한 후 오랜 친구가 기다리는 함평으로 달려갔다. 중앙일보-동양방송 입사 동기인 친구는 40여 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의 전망 좋은 바닷가 한옥 마을에 기와집을 지어 낙향했다. 두 부부가 고향후배들을 도우며 여유롭게 사는 모습에서 넘쳐흐르는 행복감을 엿볼 수 있었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자그마한 정원, 텃밭이 그들의 금슬 좋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 며느리와 손자들이 한꺼번에 와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한옥 마루에서 내려다보는 집 앞 넓은 갯벌과 맑은 가을 하늘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우리들은 다시 함평읍내로 나와 전통시장골목의 맛 집에서 한우요리를 즐겼다. 함평한우의 고기 맛은 전국에서도 말아준다. 그 한우 생고기 육회와 비빔밥에 이 고장 특산 복분자술 한 잔을 곁들이니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간 우리 부부를 어제 만난 것처럼 자연스레 맞아주고 대접하는 친구 부부에게서 참된 우정과 사람의 정을 확인했다. “시골구석까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 자체가 큰 고마움이요 즐거움”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상경 길에 올랐다.
도중에 함평군 용천사 꽃무룻 공원에 들렸다. 내가 여행 다닌 전남 북서부 지역엔 곳곳에 새빨간 꽃무릇이 피어 황금빛 가을벌판에 붉은 띠를 긋고 있었다. 산길이나 국도의 길섶, 심지어 벼가 익어가는 논두렁에도 빨갛게 피어 있었다. 그 때문에 용천사나 근처 영광의 불갑사에서는 매년 이맘때면 꽃무릇 축제까지 열린다. 우리가 찾아 간 날은 축제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그래도 꽃은 여전히 예쁘게 피어 우리 부부를 열렬히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꽃무릇도 상사화처럼 잎과 꽃이 서로 보지 못한다. 다만 상사화는 잎이 시들고 나서 8월에 꽃이 피지만 꽃무릇은 9월에 꽃이 먼저 피었다 지고나면 잎이 난다. 가지고 올 수 없는 아름다움을 스마트 폰 사진에 담고 서둘러 서해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서쪽 하늘 중간에서 가을해가 운전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것처럼 보였다.
* 이 글은 2017년9월24-25일 다녀 온 장성 편백숲과 함평 여행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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