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 숲에서 번뇌를 잊다
우리나라 최남단 도시 서귀포는 이국적 냄새가 강하다. 40세에 요절한 천재이자 비운의 화가 이중섭은 1951년 난리를 피해 이곳에서 일본인 부인, 두 아들과 함께 약1년 동안 살았다. 그가 살았던 초가집으로 가는 동네 골목엔 커다란 잎을 여인네 치맛자락처럼 드리운 야자나무들이 우거져 정말 이국적 풍경을 연출한다.
우리는 이화백의 거주지에서 제주여행 사흘째 일정을 시작했다. 이 집과 그가 산책했던 주변거리는 이제 근처의 문화거리와 이어져 서귀포의 관광명소가 됐다. 방 두 개와 좁은 부엌 하나, 그리고 마당 귀퉁이에 있는 작은 원두막 모양의 정자에는 아직도 그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 같다. 그 집 바로 위에는 이중섭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을 나와 문화거리를 걷고 바로 이어지는 올래 시장에서 넉넉한 제주인심도 확인했다.
이어 우리는 한라산 산간도로를 달려 그리 멀지 않은 사려니 숲으로 갔다. 이 숲은 지난2002년 유네스코에서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해발 500∼600m에 위치한 이 숲에는 졸참나무, 단풍나무, 산딸나무 등 천연림과 인공림인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울창해 제일 좋은 ‘치유의 숲’으로 꼽힌다. 이 숲 사이로 이어진 15km쯤 되는 숲길은 경사가 완만해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하늘을 가리며 곧게 벋은 나무와 무성한 가지로 햇빛을 막는 나무들이 어우러진 숲길엔 기분 좋은 공기가 가득했다. 산책로는 붉은 색을 띠고 있어 보색 관계인 녹색과 멋진 대비가 되고 있었다. 길이 붉은 것은 화산에서 나온 자갈들 때문인데 이를 제주도에선 송이라고 한다. 이날은 안개가 짙어 오후인데도 숲에서는 안개가 감돌고 있었다. 중동 호흡기 질환(메르스) 여파로 넘쳐나던 중국인 관광객들도 없어 숲속은 정말 고요했다. 금도끼, 은도끼를 든 산신령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길섶에 만발한 산수국과 나무 아래 공터에 군락을 이룬 무성한 고사리들도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이름 모를 산새들의 아름다운 울음소리까지 어우러진 숲길에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신선들이 노는 곳이 이럴 것 같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찾아간 곳은 수년전 상영된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장소로 잘 알려진 서연의 집. 위미 항 근처에 있는 이 집은 지금 카페가 되었다. 2층짜리 작은 건물이지만 바닷가에 있어 절경이다. 좋은 풍경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우리도 어렵게 자리를 잡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여행의 피로를 달랬다. 그리고 이 집 종업원을 통해 재미있는 음식점을 발견했다. 태국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부부가 경영하는 태국음식점 ‘반싸바이’였다. 우리는 거기로 가서 이름도 생소하고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음식 세 접시를 시켰다. 의외로 맛있었고 우리 입맛과도 비슷해 좋았다. 흘러나오는 태국 음악을 들으며 우리가 동남아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을 내기도 했다. 항구에 들어 찬 불 밝힌 배들을 뒤로 하며 하루의 여정을 마쳤다.
나흘째 날은 일요일이었다. 여행객에게 일요일과 평일의 차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느긋하게 잤다. 그리고 서귀포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떠오른 본태(本態)박물관으로 갔다. 한라산 남쪽 산록인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에 있는데 일본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이자 동경대교수인 안도 타다오(74)씨가 설계해서 더 유명하다. 기하학적 형태를 원용한 건물은 물과 빛을 끌어들여 자연과의 통합을 추구했다고 한다. 경사진 공간에 4개의 건물로 구성됐는데 조선시대의 각종 생활유품들과 함께 현대의 걸작들도 소장돼있다. 그중 깜깜한 공간에서 시차를 두고 각종 색깔로 변하는 수백 개의 작은 전구로 표현되는 설치미술작품은 환상적이었다. 또 수련이 핀 연못에 비치는 사각 형태의 건물모습도 일품이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인 나에게도 그것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모슬포로 가서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갔다. 제주도 특산품 자리 돔 구이와 물 회는 육지여행객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힘을 얻어 근처의 송악산에 올랐다. 주차장에서 해변을 따라 송악산 가는 길엔 일본 침략기에 뚫은 동굴들이 여러 개 남아있어 아픈 역사를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바닷가 절벽위로 난 산책로는 눈 아래에 펼쳐지는 푸른 바다와 어울려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산 정상은 깊게 파인 분화구이지만 물은 없었다. 그곳에서 잘 보인다는 마라도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로 옆에 있는 종처럼 생긴 산방산만 흐릿하게 보였다. 그 사이 해는 벌써 서산머리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성산 일출봉 근처의 숙소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서귀포 시가지를 지날 때 한라산 정상 부근에 피어오르던 붉은 저녁노을이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제주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내일은 서울로 간다.
* 이 글은 2015년7월 초순 메르스파동(중동호흡기증후군)으로 제주도가 한산했던 때 4박5일 일정으로 다녀 온 여행기 중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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