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어 설 무렵 젊은 여자들 세 사람이 들어와 두릅전등을 주문한다. 우리 팀 막내가 그냥 헤어지기엔 섭섭했던지 말을 건넸다. 그들은 우리에게 “오늘 여기서 묵어갑니다. 금계에서 떠날 때 꼭 들리세요.”며 자기들이 지나온 경치 좋은 코스를 알려주었다. 그들과 헤어져 빗속으로 나오니 오후4시다. 너무 노닥거렸나 보다. 그렇지만 막걸리 한 잔의 위력일까? 빗줄기가 약해지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가볍게 느껴진다. 상당히 가파른 비탈길이었지만 콧노래까지 부르며 걸어갔다. 앞에 보이는 고개만 넘으면 경상도란다. 영남과 호남, 호남과 영남은 이렇게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깝게 붙어있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을까?
그렇지만 비탈길은 역시 길고 힘들었다. 안내 책자를 보니 적어도 7km는 훨씬 넘을 것 같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말없이 걸었다. 젊은 사람이 앞에서 끌고, 고령의 선배가 뒤에서 미는 형국이다. 고령의 선배가 힘들어 하면 그에 맞춰 앞선 사람들이 속도를 늦춘다. 우리가 어디 남인가? 간간히 쉬고 물도 마셨다. 비가 오는데도 목이 마르는 것은 내리는 빗물을 피부에서 바로 흡수하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겠지? 시멘트 포장된 임도는 지친 길손들을 놀리듯 경사의 완급을 반복하면서 울창한 숲속을 꼬불꼬불 돌면서 높아져만 간다. 경상도 가는 길이 이다지도 힘들 줄이야!
그렇게 힘겹게 오르기를 계속한 끝에 마침내 우리는 고개 마루에 올라섰다. 거기엔 세운지 얼마나 됐는지 모를 정도로 글자가 군데군데 지워진 도경계 표지판이 서 있어 우리를 반겨주었다.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세운 것인데 ‘여기서부터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이란다. 이 길을 통해 제안재, 오도재, 등구재를 넘어 멀리 남원군 산내, 운봉장을 오갔단다.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바로 내리막은 아니었다. 한 두 차례 더 오르막 계단 길을 오르다 평탄한 길이 시작됐다. 시멘트 포장된 임도 주변으로 운무에 싸인 연봉들이 이어지고 멋지게 자란 소나무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선계와 속계를 넘나드는 기분이다.
그렇게 40여분을 걸어가니 아담한 창원마을이 나온다. 수령 300년이 넘었다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당산 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산골답지 않게 비교적 논이 많고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많았다. 예전에는 이 곳에 조정에서 거둔 물품들을 보관했던 창고가 있어 ‘창말’이라 불렸단다. 창말을 지나니 산자락에 끝없이 이어지는 고사리 밭이 나온다. 지난해 자랐다가 말라죽은 고사리가 갈색으로 덮혀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새로 돋아나온 고사리 순들이 연두색이다. 그 모양이 콩나물 같기도 하고 주먹 쥔 아기 손을 닮은 것도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사리 밭들이 일손이 없어 꺾을 때를 놓치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런 가운데 한 밭에 서있는 표지판 하나가 빗속에 애처로웠다. 거기엔 “농민들의 목숨입니다. 제발 꺾어가지 마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창원마을을 지나자 길은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내리막길이기를 기대했던 우리들을 실망시키기에 추호의 부족함도이 없었다. 게다가 그 길은 비에 젖은 찰흙이어서 발이 푹푹 빠지는데다 눈길보다 더 미끄러웠다. 올라가고, 옆으로 가고, 내려가고, 조심조심 또 조심하다보니 옆 돌아볼 새도 없었다. 그런 길이 지겨울 정도로 계속 되었다. 큰 ‘ㄷ’자를 터진 곳을 아래쪽으로 해서 산자락에 비스듬히 눕혀놓은 형세의 길을 우리는 정말 힘겹게 걸었다. 한 시간 훨씬 넘게 생고생을 한 끝에 우리는 이날의 민박지인 금계마을에 도착했다. 경사심한 산비탈에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다. 구름이 짙게 끼어 오후7시인데도 어둠이 짙어지면서 가로등이 켜졌다. 말 못할 서글픔과 쓸쓸함이 엄습해왔다. 어두워질 무렵 생판 낯선 고장에 들어선 나그네의 심경이 이렇겠지!
어두워지는 동네 어귀에서 우리는 민박집을 찾아 나섰다. 가까운 곳에 불이 켜진 민박집 광고간판이 있어 들어가 물었다. 그러나 그 집에선 잠만 잘 수 있다는 데다 주인여자의 불친절까지 느껴져 다른 집을 찾았다. 근처 음식점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날 이 마을의 민박업자들이 대부분 함께 야유회를 가서 늦게 올 것이란다. 큰길가에 서있는 종합안내판에 적힌 민박집이 모두 전화를 안 받는다. 사방은 깜깜해졌는데 먹고 잘 곳을 정하지 못한 나그네들의 심정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데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했던가? 실마리는 그 불친절했던 민박집 아줌마로부터 풀렸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온 우리가 그 집에 다시 들어가 물었더니 “아마도 이 집은 할 것 같다.”라며 한 집을 알려주고 마을 전화번호부까지 갖다 주었다. 그렇게 해서 연락된 민박집 아주머니가 달려왔고, 바깥양반은 트럭 형 자동차를 몰고 와 우리를 집까지 태워주었다. 마침 그 집은 황토방을 겸하고 있어 금상첨화였다. 우리들은 그 방에서 뜨끈뜨끈한 밤을 지낼 수가 있었으니까. 먼 길을 걸어 온 우리들을 위한 맛있는 저녁상이 나왔다. 그 때가 밤10시20분. 급히 장만하느라 반찬이 부실하다면서 연신 미안해했지만 고달프고 배고픈 나그네들에겐 진수성찬이었다. 밥과 국 빼고도 반찬 그릇이 무려 17개였다. 산에서 나는 나물들을 모두 모은 듯 한 밥상이었다. 그래서 민박집 이름을 ‘산모음’이라고 했을까? 주인아줌마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식당도 운영한다고 했다. 그리고 무척 다변가여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었다. 고생하고 걱정했던 일은 그렇게 풀렸다. 잠들기에 앞서 나무보일러에 커다란 장작을 더 넣어 불꽃을 돋우고 맘껏 찜질하며 잤다. 이것이 우리들의 두 번째 행운이었다.
산촌의 아침 해는 평지보다 조금 늦은 6시쯤 떠올랐다. 사흘 내내 흐리고 비 뿌렸던 하늘이 이날은 거짓말처럼 구름 한 점 없이 개었다. 산뜻한 산촌의 아침공기는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지리산 북쪽 칠선계곡 입구 맞은편에 있는 이 마을에서는 천왕봉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천왕봉은 지리산 최고봉이지만 그 민박집에선 가장 낮게 보였다. 이날 걸을 길은 약24∼25km로 우리가 이번에 걷는 구간 중 가장 멀다. 그 이유는 거리가 짧은 금계∼동강(12.7km)구간과 동강∼수철(12.1km)구간을 하루에 걷기로 했기 때문이다. 또 이 구간에서는 밥 먹을 만한 집이 없어 점심을 미리 준비해 가야 한다. 7시에 아침식사 후 여주인에게 부탁한 김밥을 챙기고 마음씨 좋은 바깥주인이 직접 산나물을 달여서 만든 음료수도 물통에 담았다. 질경이, 당귀, 엉겅퀴를 달인 물이라고 했는데 시원했다. 상냥하고 다변가인 주인 여자는 민박집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주고 마을 밖 큰길까지 따라 나와 전송해주었다.
대로변을 따라 흐르는 넓은 개천이 엄천강 상류란다. 칠선계곡의 맑은 물이 이 강을 흘러 동강마을로, 그리고 남강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아주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의탄교를 지나니 바로 칠선계곡 입구 도로 표지판이 나왔다. 그리고 곧 바로 왼쪽의 계단을 타고 산길로 올라서니 우거진 대나무들이 터널처럼 엉겨있고 건너편엔 우리가 잤던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어제 등구재 주막에서 만난 여자들이 가르쳐 준대로 절경이었다. 그 마을 동쪽의 법화산 자연석에 부각된 거대한 불두상(佛頭像)은 멀리서도 인자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발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엄천강 물줄기가 아침햇살을 받은 연두 빛 나뭇잎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절경이었다. 그 광경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내 글 솜씨가 원망스럽다.
그 절경을 뒤로하고 오른쪽에 펼쳐지는 칠선계곡 입구의 신록에 물든 경치를 곁눈질 하며 한참을 가니 의중마을 당산나무가 반겨준다. 안내판에는 수령이 600년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그곳에 선 둘레길 안내판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길이 두 갈래로 표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쉬며 GPS지도까지 살펴본 후 의중마을 가운데를 통과하는 왼쪽 길을 택했다. 나중에 보니 우리가 간 길이 조금 질러가는 코스였지만 경치는 훨씬 더 좋은 것이란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산골마을 길과 담장가 꽃들이 아름다웠다. 불두상이 가장 크게 보이는 언덕에서 어제 만났던 커플을 다시 만났다. 그들에게 부탁해 기념촬영을 하고 우리도 신록의 바다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이 우거진 숲 사이로 스며들어 긴 빛줄기를 만든다. 우리들의 몸도 연한 초록색으로 변했다. 빗방울 머금은 풀잎들에 역광으로 비치는 햇살에 물방울들은 오색영롱한 보석이 되어 반짝인다. 그 보석들 위로 산들바람이 지나가자 오색구슬들이 우르르 굴러 떨어진다.
길은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끝없이 숲속으로 이어진다. 얕은 계곡물을 넘기도 하고 굵은 바위위도 지나간다. 잠시 길을 놓쳐 험한 바위지대를 헤매기도 했다. 그렇게 나아가니 눈앞이 탁 트인다. 언덕 아래엔 2차선 도로가 있었다. 칠선계곡 입구에서 우리가 걸었던 길이다. 그 옆엔 잠시 헤어졌던 엄천강 물줄기가 콸콸 흐르고 있다. 그 강에 걸린 모전교가 멋진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 부근이 신선이 노닐 만큼 절경이라는 용유담이디. 지리산 둘레길도 여기에선 그 도로와 합류했다. 도로 왼쪽엔 푸른 강물, 오른쪽엔 우리가 걸어왔던 산자락이다. 숲을 벗어났기에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밝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길이 약간 오르막이어서 덥기까지 했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햇살을 최대한 가린 채 묵묵히 걸을 수밖에!
그렇게 한참 가니 도로에서 왼쪽 강을 따라 갈라지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판이 없었다. 일행 중 최고령이신 분은 벌써 도로를 따라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있을 때 멀리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앞질러 갔던 커플의 여자가 멀리서 우리를 발견하고 불렀던 것이다. 길은 엄천강을 따라 이어졌다. 강가엔 길쭉하게 생긴 논들이 있어 우리는 그 논두렁길도 걸었다. 물을 가득 담은 논들을 지나니 시원한 그늘이 나온다. 강은 곳곳에 절경을 만들며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의 위치가 지리산의 북쪽이기 때문이다. 강가의 작은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편편한 공터 나무그늘에서 쉬며 간식을 했다.
공터를 떠난 우리는 낙화된 벚꽃들이 온 길을 붉게 뒤덮은 곳에선 낙화를 피해서 걸었다. 길은 다시 큰 도로와 만났다. 한적하고 넓은 길을 일행 넷이 휩쓸면서 걸었다. 뜨거운 햇살만이 우리를 좀 성가시게 할 뿐 세상은 우리들 차지인 것 같았다. 이윽고 길은 다시 전형적 시골 산길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 산길들은 모두 시멘트로 포장이 돼있어 더 덥게 느껴졌다. 논과 밭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나왔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됐지만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높은 곳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들이 논밭 사이로 하얗게 굽이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 야트막한 고개에 올라서니 커다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질은 그늘을 이룬 마을이 보였다. 유명한 동강마을의 당산나무들이다. 금계마을을 떠난 지 다섯 시간만이다. 당산나무 아래 있는 나무 마루에 걸터앉아 컵라면을 끓여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었다. 힘든 걸음후의 밥맛은 꿀맛 그대로였다. 커피도 끓여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할 때 근처에서 일하던 청년 둘이 우리 곁에 와서 쉬었다. 중장비 기사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수철마을까지 간다고 하자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가느냐?’며 걱정을 했다. 그리고 스마트 폰으로 지도를 찾아 자세히 코스 설명까지 해주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고맙고 착한 것 같다. 청년들과 헤어진 우리들은 식사 후의 식곤증을 느낄 새도 없이 길을 떠났다. 길은 마을 앞 넓은 비탈에 있는 논밭들 사이로 계속되다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났다. 가로수도 없는 똑바른 오름길인데다 안내표시도 안보여 지루하고 힘들기가 말할 수 없었다. 그랬지만 똑 발라서 힘들었던 구간은 사실 2km정도밖에 안 됐다.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힘들게 느껴졌을 것이다. 도중에 오토바이를 탄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이 길이 맞는단다. 원기백배해서 좀 올라가니 민족의 아픈 현대사가 응어리진 현장이 나타났다. 방곡마을에 조성된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었다. 좌우이념대결과 6·25와중에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으로 속절없이 스러져간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시설이다. 지친 걸음을 멈추고 원혼이 된 희생자들의 명복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추모공원을 지나자 길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늘 속으로 이어진 길엔 물이 넘치는 계곡도 함께 이어져 더위가 사라졌다. 물소리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소리가 피로를 씻어 주었다. 이처럼 시원한 길은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담긴 상사폭포까지 이어진다. 얼마나 애달픈 사랑이었기에 폭포이름까지 ‘相思’가 되었을까? 폭포를 지나니 지난날 밭이었음직한 평평한 비탈이 나왔다. 키가 높이 자라지 않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란 사이로 일하는 농부 한 사람이 있었다. 가죽나물 농사를 짓는다는 그는 그 곳에 큰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산청읍에 살지만 자기 고향도 그곳이란다. 뭔가 말 못할 먹먹함이 느껴졌다. 전쟁으로 고향 잃은 사람만이 실향민일까?
거기서부터는 비교적 넓고 완만한 임도가 숲 사이로 쌍재를 지나 산불감시초소까지 이어졌다. 안내책자에는 그 거리가 2.5km로 돼있었지만 무척 지루했다. 사방이 탁 트인 능선에 있는 감시초소엔 50대 후반의 남자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매일 출퇴근한다는 그는 그 봉우리를 650고지라고 했다. 거기에선 우리가 하루 밤 자야하는 수철마을이 발아래에 보였다. 멀리 보이는 산청읍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우리는 하산을 서둘렀다. 그런데 쉬울 줄 알았던 길은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지나왔던 길의 지루함과 피곤함은 훨씬 수월했다. 그런 산길이 1.4km나 이어진 끝에 널찍한 임간도로에 있는 고동재에 도착했다. 그때가 5시쯤 됐다. 고동재에 있는 장승의 전자음성 안내가 ‘5시 이후 입산금지’를 반복해 알려주었다.
그런데 진짜 지루함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도상 수철마을까지는 3.6km이지만 내리막길이라 쉬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꼬불꼬불 내려가는 길은 걷고 걸어도 끝이 없었다. 등산화 앞부분에 닿는 발가락이 고통을 호소했고 발바닥도 화끈거렸다. 까닥하다간 발에 물집이 생길 것 같았다. 내리막길이 이처럼 괴로울 줄은 예전엔 몰랐다. 나이 많은 분의 피로감은 나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그분의 입에선 ‘더 못 걷겠다.’는 푸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우리가 걸어왔던 능선 너머로 넘어갔다. 고통을 참으며 1시간여를 내려오니 수철마을이 나왔다. 마을 앞 공터에 도착하니 6시30분이었다. 서둘러 민박집을 찾으니 딱 한 집뿐이란다. 다행히 식사가 제공된단다. 서둘러 여장을 풀고 숙소와 조금 떨어진 그 집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지나온 집들보다는 좀 부실한 반찬이었지만 불평할 형편이 아니었다. 곁들여 마신 소주반주가 부실한 반찬을 보충해 주었다. 그리고 온도를 한 껏 높인 전기구들방에 피곤한 몸을 뉘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당초엔 5박6일로 계획했었지만 걷는 속도가 빨라 하루를 줄였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잠이 깼다. 그 바람에 모처럼만에 TV 아침뉴스를 들었지만 재미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넘치는 세상이 될까? 식사 후 7시50분쯤 민박집을 나섰다. 안내책자엔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는 무쇠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철점(鐵店)이 있어 무쇠점 또는 水鐵洞으로 불렸다. 또 가야왕국이 이 곳에서 마지막 철을 구운 전설이 있다.’고 적혀 있다.
동구밖 100m쯤 되는 낮은 언덕에 선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오늘의 목적지 성심원까지 11.9km라고 적혀있다.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가니 20분쯤 간 곳에 커다란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최근에 관광목적으로 계곡물을 끌어와 만든 것 같았지만 시골스런 운치는 있었다. 번갈아 기념촬영을 하고 농로를 따라 20분쯤 가니 왼쪽으로 규모가 큰 농공단지가 있었다. 주변의 농촌풍경과 어울리진 않았지만 농촌인력 고용효과는 클 것 같았다. 잘 알려진 브랜드 제품 공장이었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른 시간인데도 할머니 한 분이 채소밭에서 허리 구부린 채 일을 하고 있어 인사를 했다. 그렇게 시멘트 포장길을 한 시간쯤 가니 강이 있었다. 지리산의 맑은 물을 낙동강으로 실어가는 경호강이다. 이 강은 오늘 우리가 가는 길과 거의 나란히 흐른다.
경호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주변 경관도 좋았다. 우리는 경호1교 근처의 지리산 둘레길 산청센터에 들려 민병권소장에게 산청군 관할지역의 둘레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안내 자료도 얻었다. 그는 설명 후 “이왕 힘든 걸음을 했으니 경호강을 따라가는 평탄한 코스대신 선녀탕쪽 계곡길을 가시라. 약 4km가량 더 멀고 힘은 들지만 절경이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코스 들머리를 놓치지 않도록 친절히 알려주었다. 센터에서 기념촬영 후 우리는 경호강을 건너는 경호1교를 지나 잘 정비된 경호강 제방 길을 걸었다. 아직 어린 적단풍과 새잎 돋아난 벚꽃 가로수가 우리들의 길동무가 되었다. 그렇게 걸어가다 내리교를 건너 선녀탕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경호강 제방길과 헤어졌다.
농촌 길을 따라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걸었다. 이름을 모르는 마을도 몇 개 지났다. 높은 산들이 길가까지 바짝 내려온 길을 지나니 계곡도 나왔다. 계곡입구의 마을앞에는 계곡을 가로질러 굉장히 높은 둑을 쌓아 만든 저수지가 있었다. 지도를 보니 내리저수지다. 근처의 신록에 물든 산들이 모두 이 자수지에서 거꾸로 선채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명경처럼 푸르고 잔잔한 저수지 물은 거꾸로 잠긴 근처의 산들을 식혀주고 있었다. 호수처럼 넓은 저수지와 주변의 산천이 멋지게 어우러진 절경 이었다.
저수지를 지니면서부터 길은 숲이 우거진 산속 임도로 이어졌다. 급하면 차령 두 대가 비켜갈 수 있을 정도의 넓고 경사도 완만한 길이었다. 마지막 몇 송이 남은 철쭉꽃들이 꽃비처럼 우리들 머리와 어깨위로 떨어져 내렸다.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던 선배도 이젠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 걷는다. 그렇게 걸었고 선녀가 없는 선녀탕에선 맑은 물과 계곡의 아름다움만 즐겼다. 그렇게 걷다 헤어졌던 길을 다시 만났고 조금 더 가서 목적지 성심원에 도착했다. 성심원은 가톨릭재단 작은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인데 나환자(한센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그곳에서 둘레길 지도나 안내책자, 기념품 몇 점을 샀다.
우리들은 안내센터에서 택시를 불러 7km쯤 떨어진 산청읍내로 나와 서울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택시 기사가 알려준 터미널 근처의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돼지고기 양념구이에 막걸리와 소주로 반주하고 산청읍 재래시장에서 두릅 한 다발을 사서 버스에 올랐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4박5일동안 지나 온 84km의 추억들이 뒤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경치들 위에 비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산청시장에서 산 두릅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집사람은 값도 싸고 향기가 특히 강하다며 좋아 했지요. < 1차 걷기 기행문 끝 : 2차 걷기에서 계속 됩니다. >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 시리즈 10회 중 제2회 분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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