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娑婆世界)와 선계(仙界)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와 친구 세 사람이 닷새 동안 걸었다. 그것도 날마다 20km내외의 장거리였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와 억세게 몰아치는 바람도 맞았다. 그런가하면 바람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땡볕 속을 온 종일 걷기도 했다. 그랬지만 아무도 불평이 없었다. 너무 신나고 즐거운 길에 무슨 불평불만이 있을 손가? 그것도 모두 제 발로 나선 길인데?
연두색 신록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그 사이사이로 철을 잊은 붉은 철쭉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노란 수선화, 새빨간 홍도화와 이름 모를 각종 꽃들까지 길을 수놓고 있었다. 그런 길을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사방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넘침도 없었고 모자람 또한 없는 공간뿐이었다. 세파의 잡음도 안 들렸고 마음을 유혹하는 손짓도 없는 길을 우리는 걸었다. 피곤이 부르면 길가에서 쉬었고 높은 고갯길에서 땀에 젖고 숨이 차면 물마시며 숨 고르고 넘었다. 정처(定處)는 있어도 마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며 걸었다. 선계인들 이 보다 더 좋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가 이 일을 꿈꾼 지는 두 해전부터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사정, 이 핑계 저 핑계 끝에 길에 나선 건 4월22일 오전11시. 서울 반포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우리는 버스로 세 시간 만에 춘향의 얼이 깃든 남원에 내렸다. 간간이 차창에 부딪치며 흘러내리던 빗방울도 멎어 있었다. 터미널 건너편 감자탕 집에서 소주 한 잔 곁들여 점심 먹는 것으로 84km를 걷는 여행은 시작됐다. 상에 올라온 곰취, 고사리, 가죽, 두릅 등 산나물 반찬이 산골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식당을 나와 택시로 지리산 둘레길 22개 구간중 제1구간이 시작되는 님원시 주천면 지리산둘레길 남원안내소에 갔다. 거기서 직원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둘레길 출발점 표지판 앞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당초 계획은 이 곳에서 숙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일러 좀 더 가서 자자고 했다. 안내소 옆을 흐르는 개천을 건너 민박집 안내판들이 많이 보이는 내송마을을 지나니 곧 산길이 시작됐다. 걷는 사람은 우리뿐 이었다. 비가 내릴 듯 흐린 날이라 숲길은 곳에 따라선 어둑어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중에 길손을 위한 쉼터도 몇 군데 있었고 이름 모를 고개도 여러 개 넘었다. 안내책자에 실린 이름들을 보니 개미정지, 솔정지, 구룡치, 사무락다무락 등 정겹기 짝이 없다. 정지는 쉼터, 치는 고개라는 뜻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사무락다무락은 무슨 뜻일까? 안내책자를 보니 무사하기를 비는 마음을 담아 쌓은 길옆의 돌탑들이란다.
숲은 점점 깊어지고 산길은 가팔라졌지만 걷기엔 아주 좋았다. 옛 시절 마을사람들끼리 어울려 이웃마을 장을 보러 넘나들던 길이란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와 도란도란 나누었을 이야기 소리가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들 사이로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다. 길은 좋았지만 역시 고갯길 걷기는 힘들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났던 여인이 들려 준 말이 실감난다. ‘저 큰 산을 넘는 길인데 무척 힘이 들 것.’이라고 했다. 안내책자에선 ‘아이들과 즐겁게 넘을 수 있다.’라고 했지만 아이도 아이 나름일 것 같다. 솔직히 둘레길이라기보다 등산로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음식점에서 담아 온 물을 마시고 초콜릿으로 입을 즐겁게 하면서 걸었다. 그렇게 산 고갯길을 걸어 안내소 직원이 알려준 회덕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서 더 가면 어두워지니 그 마을에서 민박을 하라.”고 했다. 찌푸렸던 하늘에선 드디어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어두워지지는 않았고 걸은 거리는 6km였다. 안내소 직원은 우리들의 걸음실력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우리는 마침 만난 어느 아주머니에게 민박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노치마을에 좋은 민박집들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게 객지에 나온 우리들의 첫 행운이었다.
책자엔 두 마을 사이의 거리가 1.2km라고 적혀 있었다.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한 굽이를 돌고나니 들판 길에 서있는 민박안내판이 보였다. 무작정 전화하고 그 집을 찾아갔다. 빗방울은 상당히 굵어졌다. 찾아간 집엔 노부부와 서울에 살다 마침 다니러 왔다는 큰 아들이 있었다. 모두가 친절했고 방도 넓고 깨끗했다. 게다가 다른 손님도 없었다. 넓은 거실에서 두리반 가득히 차려내 온 밥상이 푸짐했다. 특히 싱싱한 곰취와 생두릅, 김치찌개가 지친 길손의 입맛을 돋우었다. 주인이 손수 재배하고 뜯어 왔다는 두릅과 곰취를 더 달라고 해서 쌈 싸먹었다. 주인의 정만큼이나 맛있는 밥상이었다. 식사 후 한껏 덥혀놓은 널찍한 방에서 두 사람씩 누워 유리창에 부딪치는 요란한 빗소리 들으며 잠들었다.
빗소리 들으며 잠을 깼다. 뜨거울 정도의 방에서 잔 찜질효과 때문인지 몸이 가뿐했다. 서둘러 행장꾸리고 엊저녁과는 약간 달랐지만 싱싱한 산나물과 따스한 국을 곁들인 밥을 맛있게 먹었다. 아침에 일찍 일하러 가야한다는 아주머니 때문에 일찍 아침밥을 먹자고 했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바람에 아줌마는 오늘 아쉽게도 할 일이 없어졌단다. 그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기념 인증 샷’ 후 빗속으로 나섰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모두가 아슬아슬하게 머리는 잘리지 않고 상투부분만 잘렸다. 아주머님의 서투른 솜씨가 빚은 참사(?)였다. 주변 산에 갈대가 많아 마을 이름도 ‘갈대 노(蘆)’자를 쓴 ‘蘆峙’가 됐다지만 주변 산엔 갈대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른 봄날이어서 덜 자란 탓이리라.
백두대간이 바로 이 마을 앞을 지나간다, 해발 500m에 위치한 이 마을에 내린 비는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간단다. 마을을 나와 조금 걸으니 멋있는 소나무들이 늘어선 길 오른쪽으로 넓은 저수지가 있었다. 그 근처에 있는 정자와 어우러진 풍광이 여름날엔 시원할 것 같았다. 저수지 옆 얕은 산자락에서 내려다보니 밤새 내린 비에 흠뻑 물을 담은 봄 들판이 가을의 풍요를 예고하는 듯 했다. 비옷과 우산으로 비바람에 맞서며 우리는 묵묵히 걸었다. 갈래마다 서있는 지리산 둘레길 나무기둥 이정표가 우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꽤 넓은 개천이 나왔다. 우리는 그 개천 뚝방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 갑자기 길이 끊기는 바람에 우리 모두 아연실색했다. 개천 정비공사중인 듯 커다란 돌무더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지혜를 모아 산길에 난 길 흔적을 따라 힘겹게 올라갔다. 그러나 산 능선에 도착해서야 그 길이 어느 집 산소로만 가는 것임을 알았다. 정말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허탈감에 빠진 채 큰 길까지 거의 500m나 되돌아 나와 좁고 미끄러운 논두렁길을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걷고서야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 순간적으로 놓친 이정표 하나 때문에 왕복 1km나 되는 거리를 빗속에서 생고생했다. 우리네 삶의 어느 구비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돌이킬 수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리라.
비바람 탓인지 허탈감 때문인지 모두가 춥고 힘들어 했다. 다음 목적지 인월은 아직 멀었는데 비바람은 마냥 사나와지기만 했다. 전국적으로 비 예보가 있었지만 우리는 내심 틀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예보는 이날따라 틀리지도 않았다. 대책 없이 비에 흠뻑 젖은 채 강풍에 날아가려는 우산과 사투를 벌이며 걷다보니 운봉읍내에 도착했다. 민박집을 떠난 지 두시간반. 걸은 거리는7.5km. 허탕까지 쳤지만 평지여서 보행속도가 빨랐던 것 같았다. 길옆 찻집에 들려 쌍화차와 커피를 마시니 온기가 되살아났다. 대구에서 왔다는 다방 여사장의 경상도 사투리를 전라도 남원에서 들으니 생경스러웠다. 물론 나에게야 고향 말이었지만. 다방 한쪽에서 오전10시가 겨우 지났을 뿐인데도 술추렴을 하는 두 농민의 모습에서 어렸을 적 내 고향의 비 오던 날 풍경이 어른거렸다.
운봉에서 인월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거나 도로였지만 몇 군데 짧지 않은 고개 길도 있었다. 운봉을 나와 우리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 길은 비보다는 세찬 바람을 안고 가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펼쳐 든 우산이 강한 바람 때문에 무용물이 됐지만 스위치가 잘 못돼 접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 버리기엔 아까운 새 것이었다. 그렇게 바람과 싸우며 한참을 가다 우리는 또 한 차례 비보를 접했다. 지나가던 택시가 외부 스피커로 길을 잘 못 들었다고 가르쳐 주고 갔다. 이 날은 비바람 못지않게 운수도 사나웠던가 보다. 널따란 들판 가운데로 난 질척거리는 농로를 지나 택시 기사가 가르쳐 준 길로 들어섰다. 다행히 약간 돌아오긴 했어도 아까처럼 완전한 허탕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가다 길옆 마을버스 정거장에서 잠시 비를 피했고 고개 마루를 넘을 땐 주인 없는 과수원의 농막에서 쉬었다. 비에 젖고 있는 하얀 사과꽃이 참 소박하고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 고개를 내려와 세 갈래 길에서 지나가는 트럭운전사에게 물으니 바로 왼쪽이 인월이란다. 그 시각이 오후1시30분 경. 약17km를 6시간도 안 돼 걸었다. 그것도 심한 풍우속에서 두 차례의 허탕을 쳤는데도 말이다. 오늘 여정은 여기까지다. 남은 시간이 아까웠다. 그렇지만 다음 구간은 거리도 먼데다 중간에 민박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더 갈 수도 없다.
운봉의 찻집에서 알려준 맛집 어탕(魚湯)집을 물어서 찾아갔다. 음식점 옥호가 두꺼비였지만 비가 오는데도 두꺼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수를 자랑하는 유명 브랜드 등산화도 이런 날엔 소용이 없었다. 신발을 벗으니 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비교적 한산한 구석자리를 잡고 메기 매운탕에 막걸리와 소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서울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카카오 톡으로 사진과 문자를 보내 무용담을 전했다. 오후 시간이 통째로 비었기에 느긋하게 먹고 마시며 얘기했다. 식사 후 음식점 주인이 소개한 민박집에 들어가 방의 온도를 한껏 높이고 휴식을 취했다. 민박집에선 식사가 안 된다고 했다. 피로를 푼 후 인월 시장 근처의 음식점에 가서 삼겹살 구어 식사하면서 맥주와 소주 곁들여 여행자의 여유를 맘껏 누렸다. 취기가 느껴질 즈음 방으로 돌아와 80살을 코앞에 둔 선배의 흘러간 노래에 장단 맞추며 시골마을의 밤을 즐겼다. 그러다 맥주 한 캔씩을 더 마셨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민박집 이름은 ‘해뜨는 집’이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침에 해는 안 뜨고 비만 내렸다.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어 비를 맞으며 아침밥을 먹으러 나갔다. 민박집에서 소개해 준 같은 마을의 집이었다. 그런데 밥집 이름은 ‘달뜨는 집’이었다. 그렇지만 민박집과 형제나 자매간은 아니란다. 다른 집들보다 1,000원이 비쌌지만 산나물 중심의 음식은 정갈했다. 특히 KBS의 인기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도 소개됐던 집이란다. 그런 만큼 안주인의 긍지가 느껴졌다. 특히 유리창 위쪽에 붙여놓은 ‘산을 밥에, 몸에 담다.’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했다. 산골에 와서 신선한 산나물을 통해 건강을 담뿍 담고 나왔다.
인월의 추억을 민박집 여주인 자매의 솜씨 좋은 사진에 담고 빗속으로 나섰다. 모내기를 위해 쟁기질 해 둔 논에 물이 가득가득 담겼다. 올해 모내기 땐 물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 논벌 사이로 곧게 뻗은 길가엔 새빨간 철쭉이 띠를 이루어 피었고 꽃이 진 벚나무 가로수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우장을 완벽히 갖추고 걸어가는 길손들을 부러워할까? 길옆 개천에는 어제부터 내린 비에 불어난 물이 황토 빛을 띠우고 있었다. 농로를 벗어나 차도를 따라 한참 가니 중군마을이 우리를 반긴다. 지난1994년에 민속관광마을로 지정된 곳이다. 마을 중심에는 중군정(中軍亭)이란 현액이 걸린 성문 모양의 건물이 우람하게 서있었다. 물론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그 건물 앞에는 마을 유래를 적은 돌비석이 있어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비문(碑文)에는 중학교 시절 역사시간에 재미있게 들었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고려말 우왕 시절 내륙 깊숙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물리친 이성계의 이야기였다.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이성계의 부장 퉁두란이 쏘아 맞혔다. 그러자 왜장이 떨어지려는 투구를 고정시키려고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이성계가 그 입속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성계가 이 마을에 중군을 배치해 중군리란 이름이 생겼단다. 또 우리가 잠을 잔 인월(引月)은 이성계장군이 전투에 나가기 전 하늘에 기도해 달을 끌어와 밤을 밝게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단다. 어쨌든 침노해온 왜적을 물리친 호국의 정신은 지금도 느껴진다. 마침 사흘 만에 처음 만난 둘레길 길손에게 부탁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중군마을을 지날 때 할머니 한분이 빗속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저 높은 산을 넘어야 하니 조심하라.”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중군마을을 지니니 길은 차량이 겨우 비켜갈 정도의 임도로 바뀌었다. 게다가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이어진다. 비에 젖은 마을과 산들의 모습이 운무에 살짝 덮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어느 집 담장에 비 맞으며 피어있는 홍도화는 색깔이 유난히 붉어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새빨간 홍도화의 전송을 받으며 계속 걸어가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임도를 계속 따라가든지, 아니면 좀 힘들겠지만 숲속 산길로 가야한다. 편안함을 찾든 멋진 경치를 택하든 그건 길손의 자유다. 연세 많은 선배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거침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선택은 확실히 옳았다. 원시림처럼 울창한 숲길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옛길의 정감은 걸어보지 않고서는 못 느낄 것이다. 힘들어 하는 선배를 위해 자주 쉬고, 속도를 줄이며 올라갔다. 그 바람에 일행은 오히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이래서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비에 젖어 길이 미끄러운 곳도 있었지만 이 길을 오고 갔을 옛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숨이 찰 때쯤 이면 오르막길은 수평으로 이어지거나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곳곳에 쉼터도 있었고 물이 철철 넘치는 계곡도 만났다. 비는 아주 약한 보슬비가 댔다가 조금 굵은 가랑비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나뭇잎에 맺혔다 떨어지는 비는 소낙비처럼 쏟아지기도 했다.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계곡가 주인 없는 판매점 천막에서 초콜릿과 통조림 등으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길손들만의 즐거움이다.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한참을 내려오니 화려하게 피어있는 겹 벚꽃이 일행을 맞아준다. 좀 더 내려가니 충북 보은의 정2품 소나무 못지않은 멋진 소나무가 우리들을 불러 세웠다. 밑둥치주변의 넓은 뿌리부분을 온통 붉은 철쭉으로 단장한 낙락장송의 위용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말 물어 볼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시골마을 길가에 이처럼 멋있는 소나무가 있다는 게 신기로웠다. 안내책자를 보니 장황마을에서 지금도 당산제, 산신제를 지내는 당산나무란다. 맑은 날이면 천왕봉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고 적혀있지만 아쉽게도 이날은 구름이 너무 얕게 드리웠다.
이 마을(전북 남원시 산내면)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까지의 구간이 지리산 둘레길 중 맨 처음 시범적으로 뚫렸다고 한다. 잠시 쉬면서 시계를 보니 12시10분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음식점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는 마을마다 음식점이 있는지 주의하며 50분을 더 내려가서야 노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은 이 마을을 지나면 2시간 이내엔 음식점이 없다고 했다. 그 분이 알려준 근처의 음식점을 찾아갔다. 장황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대정동이란다. 2차선 지방도로변에 있는 집이었는데 깔끔한 산채정식이 일미였다. 곁들인 막걸리 한 잔이 점심 맛을 더욱 좋게 했다.
푸짐하고 맛있는 식사를 마친 일행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이날 걸어 온 거리는 약7km, 금계까지 남은 거리는 무려 13km쯤 된다. 더군다나 전북과 경남의 도경계선 부근은 해발고도도 600m 정도로 높다. 그야말로 갈 길이 멀다. 비는 거의 그쳤다. 음식점 근처 마을의 소나무들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귀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숲속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시멘트 포장 임도와 마을길은 걷는 이들의 진을 빼기에 충분했다.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지루한 길의 연속이었다. 한 굽이를 돌면 또 따른 비탈길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시간쯤 가니 남향 기슭에 잘 조성된 전원주택단지들이 나타났다. 또 산간인데도 멋진 저수지까지 만들어 멋을 부린 곳도 있었다. 길의 경사도 조금 완만해지거나 내리막도 나타났다. 고생 끝에 참시 맛보는 쉬운 길이었다.
그럴게 40분쯤을 가니 산골짝답지 않게 넓은 다랑논들이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다랑논은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좁고 길게 굽었다. 그러나 이곳의 다랑논들은 상당히 넓은데다 둥글기까지 했다. 그 논들마다 물이 가득가득 담겨있었다. 그 논들을 지날 때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경사도 가팔라졌다. 이 길은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선에 있는 등구재로 이어진다. 또 다시 긴 고갯길과의 싸움이 벌어질 판이다. 그런데 숨이 가빠질 때쯤 아주 예쁜 주막집이 보였다. 등구령 쉼터란 나무현판이 걸려있었는데 평일이어서인지 사람이 없다. 막걸리 한잔 마시며 갈증을 풀 생각이었지만 아쉬웠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 투박한 기둥으로 지어 너와를 얹은 원두막이 보였다. 비도 피할 겸 거기로 가니 자갈 깔린 넓은 마당과 민박표시가 된 집이 있었다. 또 원두막 앞에는 각종 음식 메뉴가 적힌 작지 않은 건물도 있었지만 이 집에도 사람이 없었다. 그 집 아래쪽을 보니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소리쳐 불렀더니 주인이란다. 급히 달려온 여주인이 부쳐 내온 두릅나물 전과 희귀한 산나물 안주에 마시는 막걸리는 우리들을 세상에 부러울 것 없게 만들었다. 아직도 넘어야 할 높은 재가 앞에 있고 오늘 숙박할 금계까지 7∼8km나 남았지만 급할 것이 없었다. 창밖의 가랑비를 바라보며 멀리 경남 사천이 고향이라는 여주인의 구수한 입담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계속>
* 이 글은 2018년4월부터 9월까지 4박5일씩 세 차례에 걸쳐 지리산둘레길 270여km를 완주한
기행문 시리즈 10회 중 첫 회분입니다. 코로나 걱정 없었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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