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흑돼지고기볶음에 반주를 곁들인 푸짐한 정찬은 할배 길손들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제주의 대표생수 브랜드와 이름이 같은 삼다수 숲길을 걸으러 갔다. 이 길은 오래전부터 사냥꾼과 말몰이꾼들이 이용했던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그 길을 주민들과 제주개발공사가 함께 보존하며 주변에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 결과 2010년에 아름다운 숲 경진대회에서 ‘어울림상’까지 받았다. 특히 2017년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대표명소로도 지정됐다. 이를 반증하듯 삼다수 숲길 지하에는 천연 화산암반수가 다량 매장돼 있어 ‘제주 삼다수’ 생산 공장도 근처에 있다.
식당에서 30분쯤 버스로 이동, 숲길입구에 내렸다. 봄철 제주의 상징과도 같은 유채꽃이 넓은 밭에 홀짝 피어 우리를 맞았다. 포장이 안 된 흙길이라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있었다. 길옆엔 연두 빛 새싹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키 작고 꾸불꾸불한 관목(灌木)들이 많았다. 흙탕물이 튈까봐 간간이 지나는 차량을 조심하며 걸어 삼다수 숲길로 들어섰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삼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길은 세 코스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는 중간거리인 2코스(약5km)를 걸었다. 숲길은 비교적 넓었고 평탄했지만 아기자기한 멋은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잘 관리된 넓은 삼나무단지는 장관이었다. 또 곳곳에 연두색 신록이 넘치는 수많은 단풍나무들이 있고 바닥엔 사람 허리 정도 자란 조리대들이 넓게 퍼져 자라고 있었다. 대나무처럼 하늘로 솟아버린 삼나무 아래서 펼쳐지는 단풍나무들의 연두 빛 향연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냥 ‘예쁘고 보기 좋았다’고만 해두어야겠다.
그런데 비에 젖고 곳곳에 물까지 고인 숲길이었지만 미끄럽지가 않았다. 그 까닭은 길에 깔린 콩처럼 생긴 적갈색의 작은 송이들 때문이다. 송이는 화산에서 품어져 나온 작은 돌들인데 흡수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숲 가운데엔 꽤 깊고 넓은 건천이 있었지만 비가 그친 탓인지 흐르는 물은 없었다. 꽃보다 더 고운 단풍나무 새싹의 연두 빛에 감탄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숲길 입구에 되돌아 왔다. 가볍게 간식을 나누어 먹고 물도 마시며 여행 둘째 날의 일정을 마쳤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숙소행 버스에 앉으니 가벼운 피로감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4시 반쯤 호텔에 도착, 저녁 식사 때까지 쉬기로 했다.
나는 이날 저녁 일행과 헤어져 제주도에서 노후의 삶을 꾸리고 있는 대학동창을 만나 식사했다. 서울토박이인 친구는 국내 굴지의 회사에서 25년을 근무한 후 대학교수로 퇴직한 공학박사이며 국가자격증도 3∼4개나 가진 재주꾼이다. 제주에서 일을 마치고 급히 달려온 친구도 서귀포에는 음식점 아는 곳이 없었다. 둘이서 궁리 끝에 찾아 간 맛집은 또 흑돼지전문집이었다. 그 집은 이날 하루 종일 우리 일행을 태워준 버스 기사가 알려주었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실감났다. 마주 앉은 친구와 나는 시간 가는 줄도 잊은 채 옛 추억들에 젖어 서귀포의 맛과 밤의 운치를 즐겼다. 친구는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준 후 보슬비 내리기 시작한 밤길을 달려 돌아갔다.
호텔에서는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객실에서 다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나도 일행과 어울려 몇 잔의 슬을 마시며 여행 마지막 날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과음의 폐해를 잘 아는 착한 할배들이라서 적당히 마신 후 자러갔다. 비는 그 사이 억세게 거세어졌다. 나도 내일의 즐거움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만 내일은 비가 그쳐주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바람도 헛되이 비는 다음날까지도 계속 내렸다. 전국적인 비인데다 제주도 산간엔 호우주의보까지 발령됐다. 물론 간간이 그치기도 했지만 비바람은 강약을 거듭하며 우리들의 애를 태웠다. 마지막 날 오전에 가려던 사려니 숲길은 갈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일정을 바꿔 다시 해변을 따라가는 올레길5구간 중 6km쯤을 걷기로 했다. 산더미처럼 커다란 파도가 해변의 검은 현무암 위를 덮치며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빗방울을 흠씬 머금은 바닷가의 잎새들이 더 푸르게 보였다.
길가 이정표를 보니 ‘쇠소깍’이란다. 무슨 뜻을 가진 지명일까? 조금 더 걸으니 5명의 해녀석상이 반긴다. 비록 돌로 만든 해녀상이지만 그 허벅지에 손 얹고 기념촬영을 하려니 쑥스런 생각이 들었다. 비는 계속 내려 우산을 썼다. 10여분쯤을 가니 흙탕물이 콸콸 넘치는 건천이 나왔다. 물의 속도가 엄청나다. 제주를 자주 다니는 가이드도 이처럼 물이 넘치는 건천을 처음 본다고 했다. 여름장마철이면 흙탕물이 무섭게 흘러내리던 고향마을앞 개천이 생각난다.
길은 개천을 따라 계속 이어지다가 마을 안쪽을 통과했다. 마을길을 따라 야트막하게 쌓은 정겨운 돌담들이 비에 젖어 더 검붉게 보였다. 마을을 지나니 다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들어선다. 올레 길은 계속 바다가의 마을들과 좁고 정감 넘치는 산길들을 지났다. 어느 집의 마당엔 탐스런 감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 귤은 무척 크지만 너무 시어 인기가 없는 여름 귤이란다.
또 한 곳의 길가엔 노란 유채꽃들 사이로 운치 있게 자란 해송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비는 약해지긴 했지만 계속 내렸고 우리들은 구경하면서 쉬엄쉬엄 걸어갔다. 도중의 정자에서 피곤한 다리도 좀 쉬게 해주었다. 해변을 떠라 나지막하게 쌓아올린 방파제 곳곳에는 하얀 네모 판에 재미있는 경구들이 적혀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취중 진담 나중 진땀’ ‘하르방, 할망 돼서도 손목잡고 이 길을 걷자’ 등등.
전망 좋은 바닷가 언덕에서 저 멀리 보이는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비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어느 지점에는 사진액자 모양의 빈 네모 틀들이 설치돼 있어 맘껏 멋진 자세로 촬영도 했다. 어느 마을의 돌담위에는 무성하게 자란 동백나무가 수많은 붉은 꽃을 피워 길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무에 달려있는 꽃들도 예뻤지만 나무 아래 길바닥에 떨어져 빨갛게 누운 꽃들 또한 한없이 예쁘기만 했다. 동백꽃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멋지게 지은 정자가 나왔다. 벌써 6km를 걸어 오전의 일정이 끝났다.
일행은 가이드가 안내하는 돌솥비빔밥 전문점에서 막걸리 반주해 오전의 피로를 풀었다. 이번 여행에서 식사는 우리들이 자비로 해결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날 점심은 여행사에서 부담했다. 우도에 들어가지 못 했기에 왕복 승선료로 점심을 산 것이다. 종업원은 좀 퉁명스러웠지만 맛은 좋았다. 코로나에 따른 거리두기는 여기도 엄격히 적용돼 넷과 셋으로 멀찍하게 떨어져 앉았다.
식사 후 보슬비를 맞으며 버스에 올라 5.16도로 옆 해발 600m 고지대에 있는 한라생태숲으로 갔다. 2009년9월 개장된 한라생태숲은 196ha에 제주도의 각종 식물 333종 28만여 그루를 심어놓은 곳이다. 원래 이 땅은 산림청이 개인들에게 빌려 줘 1995년까지 방목장으로 활용됐던 곳이다. 13개 테마 숲과 암석원 등이 조성된 광활한 공원과 같았다. 수목보호를 위해 출입문에서 방문자 전원의 연락처를 적어야 했다. 심어진 각종 나무들이 무성해질 훗날엔 또 하나의 멋진 명소가 될 것 같았다.
생태숲을 둘러본 일행은 이번 여정의 마지막 코스인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갔다. 여기도 엄격한 방문자 체크 후 입장했는데 울창한 삼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안내서에 따르면 산림청 소유 국유지 300만평m조성됐으며 삼나무 등 각종 나무들 수령이 30년을 넘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일반에 개장됐으며 하루 최대 수용인원을 1,0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잘 정비된 산책로와 자연관찰원, 야영장 등 각종 편의시설도 갖춰진 명소다. 휴양림 가운데 있는 절물약수터의 물맛은 정말 시원했다. 다만 코로나 예방을 위해 바가지를 모두 없애 흘러넘치는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셔야 했다. 가이드는 일행에게 약 한 시간의 여유시간을 주었지만 일행들 모두 30여 분만에 입구로 나왔다.
모든 일정을 마친 할배들을 태운 버스는 오후4시30분쯤 공항에 내려주고 헤어졌다. 날씨는 얄밉게도 우리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푸른 하늘을 내밀었다. 서울행 비행기 시간이 무려 세 시간가량 남은 시간이었다. 일행은 코로나 방역 거리두기 때문에 두 팀으로 흩어져 공항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데 예정보다 한 시간쯤 늦게 탑승을 시킨 비행기였지만 이륙이 늦어져 40분 가까이 비행기에 탄 채 기다려야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서 약 두 시간 가량 늦어진 10시가 다 돼서야 김포공항을 나올 수가 있었다. 공항과 날씨는 우리를 힘들게 했지만 여행은 마냥 즐거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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