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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호와 청태산에 반하다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1. 10.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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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물에 젖고 나무 향기에 취해


명경처럼 파란 수면에 거꾸로 비치는 건너편 산들이 한 폭의 채색화를 연상시킨다.


다시 찾고 싶은 호젓한 호반 길. 마냥 앉아있고 싶은 벤치. 건너편 산들이 거꾸로 잠긴 잔잔한 호수.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뚫리는 상쾌한 숲길. 공기가 달게 느껴진다는 말을 실감시켜 준 산골길. 그 길들이 좋아서 불원천리 달려가 걷고 쉬고 또 걸었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적었고 자동차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한가을 햇살 스며드는 산길엔 새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 길들을 이틀에 걸쳐 아내와 함께 돌아왔다.


지난21일 오전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여 달려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의 횡성호수를 찾았다. 지난2000년에 준공된 횡성 댐이 만들어 낸 인공호수다. 이 호수는 갑천면의 중금리, 화전리 등 5개 리(里)를 수몰시켰지만 내륙산간의 작은 도시 횡성에는 새로운 발전을 약속하는 희망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정든 고향을 빼앗긴 수많은 수몰지역 사람들의 아픔도 함께 스린 곳이다.


횡성읍에서 횡성호수까지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호수 가를 따라 만들어진 호반 길은 정말 걷기 좋은 산책길이다. 우거진 숲과 계곡 깊숙이 구불구불 파고든 호수의 물결을 보며 걷는 평탄한 길이 일품이다. 호반 길은 모두 6개 구간으로 구분되는데 총거리는 31.5km다. 구간에 따라 난이도가 차이나지만 전구간이 비교적 평탄해 인기가 높다. 전망 좋은 길 곳곳에 설치된 나무 데크 전망대와 찻집, 벤치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우리 부부는 이 호반 길 중 5구간(9km)의 절반정도를 1시간 반쯤 걸었다. 횡성호수로 고향을 잃게 된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조성된 망향의 동산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문화유적 화성정과 두 개의 석탑이 물속에 잠겨버린 옛 자리를 그리워하는 듯 했다.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안내소를 지나 조금 가면 호반길 입장 매표소가 있다. 입장료는 1,000원이지만 현지 상품을 살 수 있는 1,000원짜리 상품권을 준다. 결국 물건을 사면 입장료는 공짜인 셈이다. 우리도 나중에 더덕을 사면서 사용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한낮의 호반 길은 조용했다. 노인들 다섯 분이 그룹을 지어 걷기는 했지만 모두가 가을날 한낮의 여유로움을 한껏 즐기는 듯 보였다. 그들을 앞지르고 나니 그야말로 우리 부부만의 길이 이어졌다. 시계바늘 방향으로 걸으니 왼쪽은 수면, 오른쪽은 숲이었다. 곳곳에 설치된 나무벤치엔 나무로 만든 익살스런 인형들이 앉아서 맞아주고 있었다. 어느 벤치에는 나비 모형이 있었다. 길게 파고들었다가 곧 바다처럼 넓어지는 수면을 바람이 살랑거리며 스쳐가고 있었다.


한참을 더 가니 호수 가운데로 길게 반도처럼 벋어나갔던 산줄기가 땅콩의 가운데처럼 잘룩하게 좁아진 곳이 있었다. 이정표를 보니 남은 앞길을 포기하고 잘룩한 곳을 넘어 출발점으로 가면 5구간 전체 거리의 절반쯤 된다고 했다. 우리는 허리를 넘어 출발점으로 걸었다. 호수를 내려다보는 길옆에는 왕국건설을 꿈꾸다 태기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한 태기왕의 슬픈 사연이 기록돼 있었다. 태기왕은 삼랑진전투에서 혁거세군에게 쫓겨 이 곳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부족국가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태기산에서 패해 왕국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 호수물 아래 어딘가에 그의 꿈도 잠겨 있을 것 같다.


바다처럼 광활한 수면 위로 호수 건너편의 산들이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호수 물위에 설치한 나무 데크 쉼터에서 호수 주변의 산들이 물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장관을 한참동안 넋 놓고 즐겼다. 호반 길은 드나들기를 반복하며 굽이굽이 돌아 출발지점에서 끝났다. 매표소 근처에 설치된 걸대엔 거인 발자국 모양의 나무판 두 개가 걸려 있었다. 한쪽 발바닥엔 ‘호수에’, 다른 쪽엔 ‘물들다’라고 적혀 있었다. 내 마음도 이미 호수에 물들었는데.


횡성호수를 뒤로하고 청태산에 있는 국립 횡성숲체원으로 향했다. 점심은 가는 도중 횡성군 갑천면 소재지의 음식점에서 먹었다. 지방도로 주변에 펼쳐지는 한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신나게 달려 숲체원 안내소에 도착, 3주일 전 예약한 객실을 배정받았다. 친환경을 최우선으로 운영하는 국립숲체원은 객실에서 음식조리나 음주를 금지한다. 난방은 전기로 하며 식사는 사전에 예약을 받은 분량만 식당에서 제공한다.


객실에 여장을 푼 후 숲길산책에 나섰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상큼한 공기에서 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다만 단풍이 들지도 않은 상당수 나무들이 갑자기 닥친 한파에 잎들이 얼어 말라버린 것은 아쉬웠다. 단풍이 저버렸을까봐 걱정했던 일이 오히려 우스웠다. 청태산 자락의 울창한 숲속에 개설된 산책로는 무수히 많다. 난이도와 거리를 감안해 걸으면 된다. 우리는 객실 위쪽 산자락에 난 ‘새소리’ 길을 걸었다. 경사가 거의 없는 길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좋았다. 낙엽송 등 침엽수가 풍기는 향기에 취하고 산속의 석양빛을 벗삼아 우리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을 맘껏 누렸다.


산중은 해가 빨리 넘어가고 어둠도 빨리 찾아온다. 저녁식사를 위해 안내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 15분 거리에 있는 둔내읍의 한 음식점으로 나갔다. 서산으로 막 넘어가려는 붉은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산길을 달렸다. 그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강원도 토속음식 곤드레 비빔밥과 감자전에 한통의 메밀 막걸리 반주가 주는 행복감에 맘껏 젖을 수가 있었다. 반쯤 남간 막걸리를 들고 어두워진 산길을 달려 숲체원으로 돌아왔다. 음력 열엿새의 둥근 달이 밝아 별보기는 포기해야 했다. 전기난방 장치에 뜨끈하게 덥혀진 통나무집 마루바닥의 따스함을 베고 첫날의 일정을 마쳤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나 혼자 먼저 일어나 ‘편안한 등산로’라고 적힌 산책로를 걸었다. 1.8km인 이 길은 전 구간 경사도가 낮은 나무 데크 길이어서 유모차를 밀고도 갈 수 있다. 기온은 영하1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싸늘한 공기가 오히려 상쾌함을 더해주었다. 이 길 제일 높은 곳에 원두막 형태의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에 오르니 해가 솟고 있었다. 앞산 그림자가 뒷산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햇살을 받은 봉우리와 능선은 노랗게 황금빛으로 변했다.


살짝 서리가 내린 나무 데크는 미끄러지기 쉽다. 발밑을 조심하며 내려와 아내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식사할 수 있었다. 국 한 그릇과 두부조림, 김치와 나물반찬이 전부였지만 담백하고 맛이 좋았다. 국내 유수의 청정 자연식품 공급회사 P에서 관리하는 음식이란다. 명성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았다. 식사 후 뜨거운 물을 얻어 객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전날은 구름이 약간 끼었었는데 이날은 쾌청이었다. 우리는 다시 산책하러 나갔다. 전날 걸었던 새소리 길을 거쳐 숙소 위쪽 산 능선을 향해 올라갔다. 거기엔 새소리 길의 나무와 비교할 수 없는 울창한 낙엽송 숲이 있었다.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도 있었고 심호흡 방법을 적어놓은 푯말도 있었다.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산중거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즐기다 산 아래로 내려왔다. 가까운 도시에 사는 동서내외가 달려와 함께 걷기로 했기 때문이다. 안내소에서 만나 함께 아침에 나 혼자 걸었던 데크 길도 걷고 조금 전에 지나온 길도 한 번 더 걸었다.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며 걸어서 그런지 피로하지도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한 가을의 햇살이 해맑기만 했다.


오전 내내 숲에서 보내고 다시 둔내읍의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에 술 한 잔 반주로 점심식사를 하며 청태산 일정을 마무리 했다. 귀로에 봉평 장터로 가서 이효석의 체취가 담긴 메밀전병도 먹고 산나물, 옥수수 등 특산품과 막걸리도 한 통 샀다. 동서와 헤어진 후 지려는 해를 붙잡을 듯 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봉평 막걸리 한잔 마시며 추억에 남을 친환경 여행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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