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파묻힌 멋진 풍경 그리며 달려가
‘발목까지 푹푹 빠지게 쌓인 눈, 눈꽃의 무게로 축축 늘어진 나뭇가지들, 그 가지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의 휘파람소리, 차가울 만큼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겨울 햇살, 눈밭에서 반사되는 강렬한 햇살을 피하려 고글을 쓰고 조심조심 눈길을 걷는 사람들!’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아침잠을 설치고 나온 70대중후반의 노인들 다섯이 차를 몰아 달려갔다. 지나간 시절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선후배 사우들이다. TV 여행프로나 여행전문잡지의 화보에 펼쳐진 멋진 설경이 기다리고 있을 그 산으로 갔다. 매섭게 몰아치던 겨울 추위가 잠시 누그러진 데다 하늘 또한 명경처럼 파랬던 2월9일이었다. ‘눈꽃길 트레킹’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한겨울의 명산 태기산(泰妓山)이 목적지였다.
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아침8시 서울지하철 양재역 근처에서 출발했다. 일행은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제2영동고속도로(원주-광주고속도로)를 달려 오전10시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태기산 국가생태탐방로’입구에 도착했다. 횡성군에서 평창군으로 이어지는 국도 중간에 있는 해발 980m의 양구두미재였다. 거기서 태기산 정상(1261m)까지 이어지는 약4.5km 포장도로가 바로 눈꽃트레킹 길이다. 경사가 완만해서 걷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태기산은 진한의 마지막 왕 태기왕이 신라군에 쫓겨와 최후의 항전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은 계절에 관계없이 바람이 강한데다 겨울에는 눈이 무척 많이 내리는 곳이다. 그래서 태기산에는 풍력발전소도 있다. 하얗게 눈 덮인 산길에서 거대한 풍차가 돌아가는 모습을 감상하며 걷는 겨울 트레킹 장소로는 정말 멋진 곳이다.
주차장에서 트레킹 행장을 꾸린 일행은 포장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의 초입에는 눈이 없었지만 조금 올라가면 눈길이 펼쳐지리라 생각하고 걸었다. 바람이 거의 없어 풍력발전용 풍차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아주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올라가도 아스팔트 포장을 살짝 덮은 다져진 눈길만 계속됐다. 그 눈길마저도 절반은 녹아 포장도가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상상했던 눈길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중에 만난 눈썰매를 끌고 내려오던 두 청년들도 우리들을 실망시켰다. 눈이 녹고 없어 썰매를 전혀 못 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에 기대했던 만큼 눈은 없었어도 기쁨은 많았다. 가슴깊이 스며드는 맑고 상쾌한 공기가 서울에서는 좀체 맛보기 힘든 즐거움이었다. 또 하얀 눈에 덮인 주변의 높고 낮은 산들은 이 일대가 명실상부한 겨울나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조망 또한 별천지였다. 구름이 거의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반사돼 신비한 은세계도 펼쳐지고 있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한 말이 실감났다. ‘눈꽃길’을 포기하니 그야말로 멋진 ‘산길’트레킹이 우리 앞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약2km쯤 오르니 길가 눈쌓인 작은 언덕에 크고작은 형형색색의 바람개비들이 미풍을 받으며 돌고 있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세갈래 길에 '태기산 국가생태탐방로' 대형 입간판이 서있었다. 그곳에서 태기왕 전설이 깃든 산성과 태기약수터로 가는 숲체험길이 시작된다. 체험로 입구엔 하늘아래 첫 학교였다는 태기분교 건물이 눈밭속에 옛모습대로 복원돼 있었다. 그곳은 약간 그늘진 곳이어서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분교에서 나와 올라오던 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 간간이 얼어붙은 빙판길이 나오기도 했지만 신선한 공기가 넘쳐흐르는 해발1000m가 넘는 산길을 신나게 걸었다. 바람이 없어 아주 느리게 돌아가는 풍력발전용 바람개비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람이 없어 겨울속의 봄날 같은 따스함을 즐겼다. 도중에 두 차례 쉬며 준비해간 간식을 즐겼다. 정상 근처에 이르니 눈이 좀 많이 덮여있어 우리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우리는 큰 길을 잠시 벗어나 조릿대가 무성한 눈길을 걸으며 눈길 트레킹의 참맛도 느낄 수 있었다.
태기산 정상에는 국가주요 통신시설이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상표지석도 정상에서 상당히 아래쪽 넓은 마당에 서있다. 우리는 그 표지석과 주변의 멋진 조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점심식사를 즐겼다. 각자가 준비해온 음식 한두 가지 씩을 내놓으니 풍성한 식단이 차려졌다. 한 잔의 반주까지 곁들인 멋진 산상의 오찬이었다.
식사 후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하산길에 만난 산아래 마을 주민들은 올해처럼 눈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부는 해는 없었다고 했다. 그다지 심한 빙판길이 아닌데도 하산 도중 일행 중 두 사람이 각각 두 번씩이나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방심은 금물'임을 새삼 각인시켜준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렇게 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3시. 비록 눈꽃은 없었지만 5시간에 걸친 즐겁고 신났던 눈꽃길 트레킹이었다. 귀경 길에 영동고속도로 새말 톨게이트 근처의 맛집에서 돼지고기보쌈, 메밀전병, 감자전, 막국수로 뒤풀이 하고 밤길을 달려왔다. 그리고 종일 운전봉사를 한 사우의 동네로 가서 저녁식사까지 하고 여정을 마쳤다. 마음이 아직 청춘인 노인들만의 여행이었기에 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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