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물에 나이를 흘려보내고
천진한 아이처럼 신나게 놀다
맑은 계곡물이 70객 초로들의 나이를 앗아가 버린 하루였다. 그보다는 모두가 나이를 스스로 벗어 물에다 던져버린 하루였다고 해야겠다.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계곡폭포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얼굴들엔 개구쟁이 못지않은 장난기들이 넘쳐흘렀다. 입은 옷 그대로 물에 빠지고 넘어지며 친구들 얼굴에 물을 퍼붓는 그들에게서 70을 넘긴 애늙은이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흐르는 물에 세속의 나이를 흘려보내고 물살보다 더 빨리 동심의 세계로 달려간 시간이었다.
장마 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23일 오전 10명의 노인들이 서울대 교수회관 맞은 편 관악산 계곡 버들골에서 한바탕 신나는 전을 펼쳤다. 이름 하여 탁족회. 국내 최고 사립명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동기동창인 이들 중 9명은 낙성대역에서 만나 두 대의 승용차로 왔다. 다른 한 사람은 현장에 미리 와서 물놀이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점거하고 일행을 맞았다. 그는 3년여의 제주도 생활을 마감하고 관악산 근처에 새 둥지를 터서 살고있다. 수목이 울창한 산길은 최근 수시로 내린 비에 젖어 미끄러웠다. 계곡물은 콸콸 소리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우리들만의 조용한 모임을 훼방놓을까봐 우려했지만 다른 피서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맑은 물소리와 나뭇잎에 스치는 산들바람이 노인들을 맞아주었다.
물 바로 옆 두 곳에 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쳐놓으니 훌륭한 잔치상이 만들어졌다. 아침잠을 설치고 시장에 나가 준비해 온 푸짐한 족발, 서울 대치동의 전통 있는 집에서 사 온 김밥,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부인이 정성껏 만들어 싸 준 떡볶이, 친척이 손수 재배한 찰옥수수, 한국인의 입맛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는 인절미와 명문제과점의 빵, 그 위에 맥주와 과일들까지 차려진 진수성찬이었다.
다섯 사람씩 나뉘어 앉아 먹고 마시며 신선놀음은 시작됐다. 술과 음식들이 한 순배 돌고나자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이 모임 본연의 목적인 濯足이 시작된 것이다. 급류가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소(沼)였지만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빠지는 물이었다. 물속의 바위에 걸터앉거나 바위를 짚고 엎드려서 물장구 치고 물싸움까지 하다 보니 옷과 몸은 몽땅 젖었다.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신나는 童心으로 몰아갔을까? 나도 신나서 물속을 걸어다니다 미끄러져 물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었던 핸드폰까지 목욕을 시켰지만 다행히 잘 작동되었다.
홍일점 친구도 발로 물을 차가며 친구들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이 모임 참석을 위해 사흘 전에 미국에서 날아 온 ‘원더 우먼’의 발장구 실력이 여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흐린 하늘에선 한 두 차례 약하게 빗방울을 뿌리기도 했지만 濯足 아닌 濯身은 계속 됐다. 이쯤 되면 탁족을 넘어 목욕이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한 시간 훨씬 넘게 물속에서 놀다 자리로 나와 잠시 숨 고르며 과일과 음료를 즐겼다. 그리고 일부는 다시 물속에 들어가 옛 추억담들을 나누며 미진했던 탁족의 여운을 마저 즐겼다. 그렇게 세 시간가량의 물놀이를 마친 일행들은 놀았던 자리를 깨끗이 정리했다. 모두가 힘을 합쳤지만 틈틈이 미리 미리 정리해 준 홍일점 친구덕에 뒷정리는 손쉽게 금방 끝났다.
세 대의 승용차에 분승한 일행은 계곡에서 내려와 강감찬장군의 기마상이 포효하는 낙성대공원 카페에 모였다. 옥외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이어가다 한 달쯤 후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장의 기념사진속에 동심에 젖은 모습들을 남기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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