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친 맹추위 녹인 兄弟의 산행
불암산 칼바람은 매서웠다. 그러나 형제애는 그 칼바람을 따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따스하던 기온이 다시 영하10도로 곤두박질쳤던 며칠 전 동생과 함께 불암산으로 향했다. 추운 날 산행을 걱정하며 만류하는 집사람의 걱정을 뒤로한 체 깎은 배와 인절미, 커피 등 간단한 간식을 챙겨서 나섰다.
지하철6호선 화랑대역에 먼저 와서 기다리던 동생과 만나 서울둘레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서울둘레길은 태릉의 외곽철책을 따라 이어지다가 불암산 자락을 돌아 당고개역으로 계속된다. 우리들은 서울둘레길을 따라 걷다 도중에 있는 분기점에서 불암산 정상으로 향했다.
날씨가 추운데다 평일이어서 만나는 산행객은 많지 않았다. 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은 능선을 따라 계속된다. 바람은 강하게 불었지만 두텁게 입은 옷 때문에 오히려 더웠다. 도중에 두 차례 쉬면서 간식도 했다. 화랑대나 태릉쪽 불암산 자락은 매우 넓어 완만하고 걷기 좋은 흙길 능선이 매우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막판에 급경사로 치솟으며 암벽이 많은 불암산의 본색을 드러낸다.
우리 형제는 가야산(1430m)이 가까운 고장에서 자라 웬만한 바위산은 쉽게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불암산 바위 길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식 데크가 많이 설치돼 있어 별로 위험하진 않았다. 다만 데크의 경사가 무척 심하고 길기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직상승하는 고생은 감수해야 한다. 데크가 없는 구간에선 바위도 타고 올라가야 한다.
계단에서 바라보니 가파른 바위절벽의 경사가 실감이 났다. 그런데 그 깎아지른 듯한 바위벽에서도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놀랐다. 자태도 예뻤지만 나무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할 말을 잃었다. 흙도 별로 없는 가파른 바위벽 틈새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 냈을지 상상이 안 된다. 우리들에게 자기들처럼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르다보니 정상 바로 아래의 바위에 세워진 검은색 정상표지석이 보였다. 비석엔 해발508m라고 높이도 새겨져 있었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거기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우리도 그 곳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산의 정상은 표지석보다 뒤쪽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정상에 세워진 높다란 국기봉의 태극기는 강풍 때문에 거의 수평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그 정상에는 밧줄을 잡거나 손으로 바위틈새를 움켜쥐며 조심스레 올라야 한다. 우리들에게 그 정도의 바위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상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주변의 조망이 정말 장관이었다.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서울시가지 저 너머로 청계산, 관악산, 남산,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병풍처럼 이어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은 그야말로 명경처럼 파랗다. 힘겹게 올라와 정상에 선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이런 것이다. 그저 좋고 상쾌하고 신이 났다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하산 길에 정상에서 가까운 양지바른 너럭바위에서 준비해 간 음식들로 간단히 점심식사를 했다. 산 아래쪽에서 나무들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그렇지만 우리 앞의 커다란 바위가 바람을 막아줘 한없이 따뜻했다. 산상에서 동생과 나누는 점심은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 걷고 산에 올랐지만 산의 정상에서 함께 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여덟 살 아래인 동생은 6남매 중 막내다.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나는 서울로 왔다. 그 후 동생이 군복무를 마치고 공무원이 되면서 서울에서 살았지만 서로가 바빠 집안행사 외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동생도 이제 60대 중반을 넘은 은퇴생활자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자주 만나 걷거나 등산하며 지나간 시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고향의 추억들을 공유한다. 더군다나 형님 세분 중 두 분이 벌써 먼 길을 떠나셨기에 동생과의 만남은 더욱 애틋하고 즐겁기만 하다. 이런 걸 사람들은 혈육의 정이라고 하는 것 같다.
맛있는 산상의 오찬을 마친 우리들은 가파른 바위능선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다. 산을 오를 때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념사진 촬영도 했었다. 그런데 하산 길에서는 역시 동생이 날렵했다. 비교적 안전한 길 대신 동생은 경사가 좀 심한 지름길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적게 다닌 탓에 길을 찾기 힘든 곳도 있었다. 게다가 모래처럼 부서지는 흙이 많아 미끄럽거나 절벽처럼 가파른 바위들 난간으로 난 길들도 지나야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득하고 아찔했다.
그렇지만 동생은 거침없이 나를 인도하며 잘도 내려갔다. 그는 용감하기로 정평 있는 한국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한발 앞서 내려가 나를 잡아주고 흐릿한 산길을 용케도 찾아냈다. 비교적 등산엔 자신이 있는 나도 이처럼 가파른 길에선 한없이 조심스러워진다. 8년의 나이 차가 이런 차이를 만드는지, 아니면 동생이 산을 잘 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산에 올랐고 바위를 타고 넘었고, 수직에 가까운 험한 길을 내려왔다. 그 산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혈육의 정도 두텁게 했다. 산 바로 아래 연해있는 마을은 아직도 한 세대 전에나 볼 수 있었던 허름한 낡은 집들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골목길도 자동차 한 대도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우리는 그 마을길을 지나 당고개역 근처의 맛집에서 푸짐한 음식으로 뒤풀이를 했다. 약 5시간에 걸친 혈육의 정을 맘껏 즐긴 산행이었다. 이래서 형제는 좋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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