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떨군 나무들이 그린 멋진 水墨畵에 매료
온 하늘을 파아란 화폭이 가렸다. 그 넓은 청색 도화지에 온갖 나무들이 무수한 동양화를 그려 놓았다. 마구 휘갈긴 듯한 것도 있고 가는 붓으로 정성껏 세밀히 그린 것도 있다. 게중에는 붉은 색을 점점이 칠했거나 녹색의 소나무들이 보이는 채색화도 간간이 보인다. 모든 그림들이 볼수록 오묘한 뜻을 담은 듯 느껴진다. 스쳐가는 바람이 뭐라고 설명해 주는 것 같은 데 알 수가 없다. 나는 이런 풍경과 바람의 속삭임이 좋다.
얼마 전엔 11월 날씨답지 않게 추운 한파가 몰아쳤었다. 그러더니 최근 며칠은 약간 더위를 느낄 정도로 따스한 날들이 계속됐다. 내가 팔당호와 양수리가 내려다 보이는 예봉산에 올랐던 날(11월17일)도 그랬다. 껴입은 옷가지들은 산길을 오르면서 하나씩 벗었지만 잔등과 이마에선 땀이 흘렀다. 해발 683m인 이 산에는 정상으로 가는 길이 다양하다. 나는 그 중 경사가 급한 빠른 길로 올라갔다.
중앙선 전철 팔당역에서 내려 팔당댐쪽으로 10분쯤 걸어 철로 굴다리를 통과, 마을앞을 지나 10분쯤 더 가면 등산로 들머리에 닿는다. 그 주변엔 아직도 늦가을의 단풍이 마지막 붉음을 뽐내고 있었다. 등산길은 입구에서부터 급하게 상승한다. 혼자 찾은 산길인데다 평일이라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급할 게 없는 날이었다. 자연이 연출하고 그린 멋진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며 비탈진 산자락으로 들어갔다.
조금전까진 단풍이 아직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었다. 그랬는데 겨우 20분 정도 올라갔을 뿐인데 완연한 겨울 풍경으로 바뀌었다. 나무들은 이미 잎을 잃고 앙상한 가지들만 파란 하늘에 걸려있다. 지나간 여름 무성하게 우거진 푸른 잎들로 만들어 주던 그늘은 이제 밝은 초겨울 햇살이 졸고있는 양지로 변했다. 등뒤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목 뒷덜미에 따뜻하게 닿는다.
등산로 곳곳엔 쉼터가 마련돼 있어 가파른 경사가 주는 고달픔을 달래준다. 나도 작은 능선의 쉼터 벤치들에 앉아 가쁜 숨을 돌리고 물 마시고 간식도 먹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변 경치도 즐기고 하늘도 쳐다본다. 특히 이날 내눈은 잎들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들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빚는 조화에 꽂혔다.
나뭇가지들은 대부분 검은 색깔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가지들은 어느새 하늘에 펼쳐진 청색 도화지에 그려진 동양화로 변한다. 어느 솜씨좋은 화가가 굵은 붓과 가는 붓을 섞어가며 그려낸 작품처럼 느껴진다. 어느 것은 청색 화폭의 절반만 채웠고 다른 어떤 것은 꽉 채웠다. 가로로 그린 것도 있고 세로 그림도 있다. 그야말로 내 생각에 따라 자유자재로 그림의 내용과 모양이 바뀐다.
이 길은 경사가 심한 구간엔 긴 나무 데크 계단도 5개 설치돼 있다. 산길을 오르다 조망이 좋은 곳들에 멈추면 그때마다 멋진 채색 동양화가 펼쳐진다. 햇살이 퍼지면서 옅게 피어 오르는 안개는 산들의 중턱에서 머물렀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의 산과 강줄기도 한폭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 강줄기 너머 도시의 희고 넓은 시가지도 그림속에 녹아든다. 다만 그 시가지 위를 구름과는 다른 짙은 회색 스모그가 수평으로 덮고있어 파란 하늘과 도시의 경계처럼 보인다. 멀리 보이는 서울 시가지는 청색 하늘과 회색 스모그 아래 백색으로 펼처져 있었다.
팔당역을 출발한지 한시간 반만에 예봉산 정상에 닿았다. 기상청의 강우측정 레이더 시설의 하얀 건물이 새파란 하늘에 우뚝하다. 주변의 연봉들이 모두 발 아래로 보인다. 하늘은 완전한 청색이다. 산 아래엔 옅은 안개에 싸인 다른 산과 들, 호수와 강줄기, 도시가 약간 흐릿하게 펼쳐진다. 다행히 햇볕은 쨍쨍 빛났고 살랑거리는 바람은 한없이 상쾌했다. 심호흡을 하고 남에게 부탁해 정상표지석에 기대 기념 사진도 찍었다.
하산길에 정상 부근의 양지 바른 곳에서 햇빛바라기 하면서 땀에 젖은 속옷을 벗어 나무에 걸고 준비해 간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먹을 거리들을 꺼내 산상의 오찬도 즐겼다. 이 곳은 내가 이 산에 오를 때마다 찾았던 나만이 아는 장소다. 천지가 조용했다. 세상의 온갖 잡소리가 안 들리니 적막함이 찾아 든다. 그 적막감에서 오히려 평온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한 시간여 신선 흉내를 내다가 산을 내려왔다. 오를 때 만큼 심하진 않지만 내리막길 경사도 만만치 않다. 그뿐 아니라 발목까지 덮는 낙엽쌓인 길이 눈길 못지 않게 미끄러웠다. 한 눈 팔아서도 안 되고 팔 새도 없다.
발밑을 조심하며 나무줄기나 바위를 손으로 잡으며 내려왔다. 불과 한 시간반 만에 가을에서 겨울로, 또 한 시간반 만에 겨울에서 가을로 계절을 두 차례나 뛰어 넘었다. 신선인들 이보다 더 즐거울 순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서울행 전철을 탔다. 아직도 원하는 시간에 가고싶은 곳에 가고 산을 오를 수 있음에 감사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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