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다음 영동 제2절경’
명불허전(名不虛傳)! 조선의 문인 김효원(1542-1590)은 이 산을 ‘금강산 다음 영동 두 번째 절경’이라고 했다. 또 요즘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장가계’라고도 표현한다. 두타산에 올라보고서야 그 명성이나 명예가 이유 없이 퍼지지 않는다는 그 말을 실감했다.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뾰족뾰족 솟은 연봉들이 사방을 둘러쌌다. 굵직굵직하게 팬 장작처럼 보이는 바위들을 수직으로 세워 여려 층 포개쌓은 모습의 천인절벽(千仞絶壁), 그 바위들 사위에서 용틀임 하며 자란 천년노송들의 위용에 할 말을 잃었다.
밤새 내렸던 비가 그친 10월5일 아침7시 옛 시절 함께 지냈던 회사동료들 넷과 함께 산행 길에 나섰다. 서울에서 260km쯤 떨어진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 속세의 번뇌를 잊고 승려들이 도를 닦았다는 명산이다. 일행 중 제일 나이가 적은 동료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출발한지 3시간 반 만에 두타산 산행로 입구 무릉계곡관광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흐렸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개어 있었다.
주차료 2,000원, 입장료도 2,000원이지만 모두 ‘경로우대’‘여서 무료였다. 다만 마스크는 꼭 써야 입장이 허가된다. 안내소를 지나 계곡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바로 베틀바위-산성길 들머리 입간판이 반겨준다. 간판엔 원점회귀까지 총거리 7.3km인 등산로를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길고 짧은 5개구간으로 안내하고 있다. 우리들은 산행시간이 5시간정도 걸리는 가장 긴 코스를 선택했다. 비록 나이는 모두 초로이지만 산행엔 웬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 공개된 원시림과 비경
이날 우리가 택한 코스 중 베틀바위-산성길 구간은 경사가 심하고 위험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곳이다. 올해 6월10일부터 공개된 이 구간은 태고의 원시림과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 절경을 즐기려고 일부 등산객들이 무리하게 이 길을 오르다 사고를 당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이 때문에 안전한 산행을 위해 길도 새로 만들고 위험구간엔 나무 데크나 계단을 설치해 개방했다.
안내판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씌어 있다.
‘이 길은 동해시와 동부지방산림청이 무릉계곡숲길 안전관리 및 산림보호를 위한 공동산림사업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베틀바위 산성길은 태고의 원시림, 휴휴(休休) 이승휴 사섹의 길, 베틀 릿지 비경, 소원의 길, 두타산성터와 박달령을 지나, 용추, 쌍폭으로 이어지는 두타비경으로 ---(중략)---소원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길입니다.‘
기념촬영을 한 일행은 곧 바로 경사심한 산길로 들어섰다. 개방한지 4개월도 안 돼 100만 명 가까운 산행객이 다녀간 길이지만 계속된 가을비와 비 예보 때문인지 이날은 한산했다. 초입부터 돌부리 많은 급경사가 일행의 발목을 잡는다. 숨은 가빠지고 등줄기에선 땀이 흐른다. 앞 사람의 뒤꿈치가 얼굴에 닿을 정도의 급경사도 있었다. 발밑만 쳐다보면서 가쁜 숨 몰아쉬며 수직상승에 가까운 산길을 느릿느릿 올랐다. 그렇게 20분쯤 올라가 전망이 탁 트인 절벽에 서니 바로 아래 주차장이 내려다 보였다.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전망에 가슴이 후련해졌다. 고려 고승 휴휴가 사색하고 수도했다는 삼공암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 한 난관에 부딪쳤다. 제일 나이 적은 동료가 사색이 되어 증기기관이 수증기 내뿜듯 거친 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발자국도 못 가겠단다. 함께 천천히 올라가자고 아무리 권해도 막무가내로 내려가서 기다리겠단다. 정말 난감했지만 무리한 산행은 위험하기에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주차장에서 평탄한 무릉계곡을 따라 삼화사 쪽으로 오다 하산 길의 우리와 만나기로 했다.
낙락장송의 용틀임에 감탄
안타까웠지만 그를 남겨두고 넷은 베틀바위를 향해 힘든 산행을 계속했다. 경사가 심한만큼 고도는 순식간에 높아졌고 멋진 조망도 덩달아 시원하게 펼쳐졌다. 구름 몇 조각이 한가로이 떠가는 하늘과 뾰족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말 그대로 비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로 줄이 촘촘히 새겨진 것 같은 바위들이 켜켜이 층을 이룬 바위절벽엔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송들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몰아치는 심산계곡의 칼바람을 이기고 아름드리로 자란 낙락장송들의 기품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40분쯤을 올라가니 하늘로 가는 계단으로 착각할 만큼 가파르고 긴 나무 데크 계단이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계단 앞의 절벽엔 용틀임 모양의 굵은 가지를 자랑하는 노송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비경속의 비경이었다. 하늘까지 닿은 계단의 끝엔 송곳처럼 솟은 바위들이 하늘을 찌를 것처럼 보였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장가계’라고 했을 것 같았다. 계단의 경사가 심해 발밑을 조심하며 오르기 시작했다. 지루함을 잊기 위해 세면서 걸었다. 102개를 세니 나무로 만들어진 평평하고 넓은 데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거기가 바로 베틀바위(해발 550m)에 만들어진 전망대였다.
베틀바위 전망대서 선계 구경
산길이 한산했던 이유는 올라온 사람들이 모두 이 전망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넋을 놓고 감상하며 카메라에 담느라 바쁜 모습들이었다. 우리도 자연스레 그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고 또 보며 찍고 또 찍으며 신선들이 사는 세상을 담았다. 데크 아래와 건너편 산줄기들에도 온통 경이로움만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그 곳에서 벌어졌다. 못 오르겠다며 주저앉았던 그 동료가 거기까지 우리를 쫓아왔기 때문이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하산하던 청년 셋이 격려해주는 바람에 용기를 냈고 힘이 생겼다고 했다. ‘아무리 높아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뫼가 없다’는 말을 몸소 실현한 그를 한없는 박수로 맞아주었다.
맘껏 휴식을 취한 우리들은 다시 90개의 계단을 올라가 미륵바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무척 덩지와 키가 큰 미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산길이었다. 시간은 어느 덧 12시를 지났다. 아침밥을 거르고 떠나 온 일행은 심한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좁은 산길에서 어렵사리 두어 평 됨직한 터를 찾아 옹기종기 앉아 산상선경에서 오찬을 즐겼다. 맛있는 강원도 특산 막걸리 한 잔도 분위기를 돋우었다. 준비한 음식이 넉넉해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었다. 힘든 일을 한 후 맞는 휴식의 즐거움이 이럴 것이다.
식사 후 충분히 쉬고 나니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해발600m를 넘나드는 산길은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물리쳤다는 산성터와 비경12산성폭포를 지나 두타산 협곡 마천루까지 2시간가량 계속됐다. 높이도 470m정도로 낮아졌다. 그렇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또 다른 비경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질학적 설명을 따르면 금강산바위군에 속하는 이 협곡지대는 발바닥바위, 고릴라바위, 쌍폭포, 용추폭포 등을 품어 무룽계곡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들고 있다.
두타산협곡 마천루의 기암괴석 암벽
특히 깊은 계곡의 절벽바위를 따라 조성된 기나 긴 철제 잔도 데크는 주변풍광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계단의 철제난간을 잡고서 바라보는데도 아찔하게 느껴졌다. 경사가 심한 곳들이 많아 비나 눈이 올 때는 미끄러질 위험이 큰 구간이다.
길고도 가파른 철제 데크를 내려오면 두 줄기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지는 쌍폭포가 험한 산길에서 쌓인 피로를 한방에 날려 보내준다. 엄청나게 넓거나 높지는 않지만 수량이나 유속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폭포 앞에서의 기념촬영을 끝으로 힘든 산행은 끝났다.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약 2.5km 산길은 비교적 평탄했다. 도중에 있는 삼화사를 잠깐 둘러본 일행은 주차장으로 나와 약5시간에 걸친 멋진 산행을 마무리 했다.
산골의 해는 빨리 진다. 일행은 어두워지려는 산길을 달려 동해안의 명소 추암해수욕장 옆 유명한 리조트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근처에 사는 또 다른 옛 동료를 해변의 횟집에서 만나 그가 제공하는 성찬을 즐겼다. 막걸리와 소주, 맥주로 반주도 함께. 등대불과 휘황한 경관조명이 명멸하는 해수욕장의 멋진 밤경치가 사우들의 우정을 더욱 짙게 해주었다. 열기를 식히려는 듯 보슬비도 살짝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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