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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산서 누린 행복

등산이야기

by 솔 뫼 2021. 8. 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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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한강엔 도미부인 전설 흐르고-!


산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파랑과 푸름, 하양이 연출하는 낙원이었다. 파란 하늘엔 하얀 구름이 옆으로 길게 떠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봉우리들 위로 쏟아지는 한여름 뙤약볕을 가려주려는 하늘의 천막인가 보다. 첩첩한 푸른 산들 사이를 돌고 돌아 남북에서 흘러와 ‘두물머리’[兩水里]에서 만난 한강물이 반가움을 나누는 정경이 한가롭다.


다산 정약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漢水를 도미강이라 주장했는데 지금의 팔당 주변으로 보고 있다. 그 강물 위에 전설 속 절세미인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순애보도 함께 흐르는 것 같다. 그 전설에는 천신만고 끝에 백제 개로왕의 갖은 회유와 핍박을 뿌리치고 도망쳐 나온 도미부인이 탄 배가 떠있다. 부인은 자기 때문에 두 눈을 뽑힌 남편 도미를 곧 만나겠지! 만남의 정을 나눈 강물은 다시 파란 하늘빛을 반사하며 바다처럼 넓은 팔당호에서 또 한 번 파란 향연을 펼치며 숨을 고른다.


해발 657m의 산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아름답고 고요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온갖 소음이 사라진 그곳엔 오직 평화로움만 넘치고 있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그 모습에서 희로애락을 찾을 수 있으며 미움과 다툼, 질시와 배반, 더러움과 추악함을 느끼겠는가? 한여름 더운 햇살이 쏟아지는 산 아래세상은 인간들이 내뿜는 모든 탐욕들까지도 잠재운 채 평화로이 펼쳐져 있었다. 불과 두어 시간의 발품만 팔면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산위에 있다. 그래서 나는 복중더위를 무릅쓰고 혼자서 그 산, 검단산(黔丹山)에 올랐다.


20여일 이상 계속되는 폭염과 무더위를 피해 8월5일 아침8시쯤 집을 나섰다. 나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푸른 숲이 우거진 산길을 찾는다. 서울 주변의 수많은 산들이 나의 가장 좋은 피서처인 셈이다. 검단산은 지난해 서울지하철5호선이 하남시까지 연장돼 접근이 매우 편해졌다. 40여분 만에 하남검단산역에 도착, 지상으로 나오니 이른 시간인데도 열기가 훅하고 밀려든다. 출구에서 대로를 따라 10여분쯤만 걸으면 검단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스쿨 근처의 마을에 도착한다. 이날은 호국사와 현충탑 방향의 길을 택했다.


지하철역을 출발한지 30여 분만에 산행로 입구에 들어섰다. 산행로는 입구에서 나무 데크 길이 10분쯤 계속되다가 흙길로 바뀌지만 둘 다 평탄하다. 안내판을 따라 가다보면 정상을 2.37km 남긴 곳에서 현충탑 갈림길이 나온다. 나는 그 길로 가지 않고 곧장 정상쪽으로 걸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평탄한 숲속 길은 조금씩 고도를 높이지만 경사가 완만하다.


하늘을 가리고 치솟은 전나무와 잎 넓은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 무척 시원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으니 길은 갑자기 예각으로 '之'자 모양의 꺾어지기를 반복하며 높이를 급하게 올렸다. 이어 전망이 탁 트인 쉼터가 나온다. 저 멀리 미사리 한강과 하남시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도 식힐 겸 준비해 간 얼음 물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다시 5분쯤 오르니 검단산의 유명한 곱돌약수터가 나왔다. 태조 이성계였는지, 태종 이방원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사냥하다 마셔보고 감탄했다는 그 샘터다. 나도 물 한 컵을 받아 마셨더니 뱃속까지 서늘해졌다. 샘터를 지나 조금 더 가니 널찍한 광장이 나온다. 안내판에 표시된 헬기장이다. 등산로에 들어선지 1시간쯤 됐다. 일부 등산객들은 아예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등산 대신 놀이를 위한 장기전을 펼칠 태세들이었다.


나는 잠시 쉬면서 갖고 온 등산 스틱을 펼쳐 적당한 길이로 조율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경사가 무척 심한 깔딱 길이다. 검단산 등산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스틱 잡은 팔에 힘을 주며 한발 한발 오르는 수박에 없다. 경사의 완급을 논하지 말자. 숨차고 힘들면 속도를 늦추거나 서서 잠시 쉬어라. 목마르면 물마시자. 그렇게 걸었고, 그렇게 쉬었다. 그 경사구간을 다 오를 때까지는 아무도 없었다. 앞에도 뒤에도 없었다. 오직 나 혼자였다. 묵묵히 발밑을 조심하며 한 걸음씩 올라갔다. 숨이 턱에 닿을 무렵 정상 바로 아래의 능선에 올라섰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반겨준다. 숨찼고, 힘들었고, 비 오듯 땀 흘린 시간은 20분쯤 만에 끝났다. 정상 100m라고 적힌 안내판이 반가웠다.


산행시작 1시간30분쯤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엔 헬기가 내려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터가 있다. 그 공터의 동쪽 양수리와 팔당호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정상표지석이 있다. 내 가슴에 닿는 둥근 뿔 모양의 표지석에 기대 기념사진을 찍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잠시 만났던 건장한 청년이 포즈까지 가르쳐주며 찍어주었다. 유도선수인 그는 체중감량을 위해 가파른 산을 매일 오른다고 했다. 그의 감량목표 20kg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그리고 바로 옆 전망대에서 다른 여자등산객에게 부탁해 멋진 팔당호를 배경으로 다시 기념촬영을 하고 하산 길에 들어섰다.


정상에서 1km쯤 내려오니 혼자 앉아 쉬기에 알맞은 공터와 그늘이 보였다. 산행로에서 살짝 벗어난 능선이었다. 준비해 간 떡 한 팩과 얼음이 덜 녹은 물 한 통, 솔잎발효액, 토마토 한 개와 달걀 두 개를 꺼냈다. 솔잎발효액은 집사람이 10여 년 전에 청정지역에서 딴 솔잎으로 담가 묵혀둔 것이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위의 호젓한 능선에서 즐기는 점심은 시중의 그 어떤 음식점보다 맛있게 느껴지는 법. 더구나 기분 좋게 힘 쓴 후의 식사 아닌가.


이 좋은 식사에 한 잔의 반주가 빠질 순 없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등산을 즐기는 나이지만 가능한 한 산에서는 술을 적게 마시려고 노력한다. 특히 혼자 산행할 땐 거의 안 마신다. 그러나 이날은 더위도 피할 겸 오래 머물 생각에서 막걸리 한 통을 준비해 왔다. 1시간 이상 계속된 산상 단독오찬에서 떡과 달걀을 안주삼아 막걸리 반통을 마셨다. 나머지는 하산 이후의 몫으로 남겼다. 경사 심한 산길엔 많은 위험이 숨어있어 술꾼으로 불리는 나도 강력한 절주를 택했다.


하산 길의 경사 역시 올라왔던 길 못지않게 심했다. 발밑을 보니 낭떠러지에 올라선 기분이다. 팔당댐을 지나온 강물이 미사리 조정경기장으로 흐르고 강 건너엔 예봉산이 반갑다고 손짓한다. 그 산도 내가 자주 올랐던 정든 산이다. 내가 행글라이더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글라이더에 의지해 멋진 활강을 했을지도 모른다. 발아래 펼쳐지는 산과 강의 멋진 조망을 즐기다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중에 만난 몇몇 산행객에게 정상이 가까웠다는 희망을 안겨주며 발밑에 신경을 집중했다.


도중에 마련된 쉼터의 아름드리 소나무 그늘에서 솔잎발효액과 남겨 둔 토마토를 먹었다. 오후의 시간이 정말 멋지게, 시원하게 흐른다. 급하게 산을 내려 가야할 이유도 없기에 마냥 느림의 즐거움을 누리며 걸었다. 도중에 있는 구한말의 정치가이자 최초의 미국 국비유학생이었던 유길준선생의 유택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서유견문>이란 책을 남기고 이곳에 잠든 개화사강가는 유택에 누워 요즘의 우리나라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상념에 젖다보니 어느 새 산 아래 마을에 도착했다. 여름날 늦은 오후의 더위가 숨을 막는다. 단걸음에 역으로 달려가 지하철을 타니 '설국열차'를 탄 것처럼 써늘하다. 남겨 온 막걸리가 배낭속에서 언제 마실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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