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팠던 시절 벗겨 먹은 소나무 속껍질
작은 도토리처럼 생긴 노란 구슬들을 잔뜩 매단 뾰족뽀족한 꽃들이 아침 햇살에 더 샛노랗습니다. 한 두 송이가 아니라 수 십, 아니 수 백송이가 온 나무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 꽃들을 감싸듯 펼쳐져 있는 바늘 모양의 파란 잎들이 록색의 병풍을 친 것처럼 꽃들을 품고 있습니다. 요즘 봄동산을 더 푸르게 단장하는 소나무들의 모습입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강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송기(松飢)! 송기를 아십니까? 그리고 그 단어에는 반드시 연상되어 떠오르는 말, 배고픔이 있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에서는 송기를 '송구'라고 했습니다. 소나무들이 노랗게 매달았던 꽃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로 흩날리던 송화가루를 보며 우리들은 자랐지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우리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지난 해나 재작년에 자란 똑바로 곧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겉껍질을 살짝 벗긴 후 안에 있는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 씹었지요. 그러면 약간 단맛이 느껴지는 데다 송진 맛과 떫은 맛이 섞인 속껍질이 계속 씹힙니다. 그 껍질에서 나오는 물만 빨아 먹다가 찌꺼기는 내뱉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나무 가지를 마구 꺾다가 어른들한테 들키면 무척 혼이 나곤 했습니다. 당시엔 산이 헐벗어 소나무나 기타 잡목들을 조림해서 관리하던 때였으니까요.
어른들 얘기에 따르면 일제시대 말기 양식이 떨어지는 봄철이면 이렇게 벗긴 송기를 모아 밀가루나 쌀가루를 섞어 디딜 방아에 찧어 떡처럼 만들어 먹었답니다. 그렇지만 제가 어렸던 시절엔 송기로 떡해서 먹는 사람들은 보지 못 했지만 무척 배고프게 살은 건 사실입니다. 도시락 못 싸오던 친구들은 부지기 수였으니까요. 간혹 내 주변 친구들이 송기를 씹어 먹고서 변비가 생겨 무척 고생했던 일들은 더러 있었지요. 오늘 아침엔 모처럼 만에 청명했습니다. 동네 동산의 소나무를 온통 뒤덮은 송화를 보니 예외 없이 배고프게 자라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 2023년4월29일 오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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