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硏 60주년 : 평화-통일-문화기행 - 1
부르면 화답할 듯 가까운 북녁 바라보며
분단의 슬픔 가슴에 새기고 걸었던 旅程
소리쳐 부르면 반갑다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손짓하여 부르면 화답하는 손동작이 보일만큼 가까웠다. 아주 가까운 두 곳의 거리를 표현할 때 쓰는 지호지간(指呼之間)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지호지간의 거리이지만 거의 70년 세월동안 갈 수가 없어 바라만 보는 그곳에서 나는 민족의 비극을 직접 보고 온몸으로 느꼈다. 물리적 장애라곤 헤엄치면 금방 건널 수 있을 허리띠처럼 폭이 좁은 강과 바다뿐이다. 무슨 잘 못 때문인지, 누가 막았는지는 이제 묻거나 따지지 말자. 그러기엔 너무 굳어버린 보이지 않는 장벽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있겠는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이 좁은 물길을 건너 거침없이 오고갈 수가 있을까?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에서 바라 본 황해도 연백군 해안마을
예년보다 빨리 온 초여름 같은 봄 더위가 걷는 이들을 힘들게 했던 5월19일 한낮의 강화도. 나를 포함해 70을 넘긴 대학교동문 7명이 강화도 북단의 철책길, 월곶 돈대, 강화평화전망대, 교동도 망향대 등지를 둘러봤다. 일행 중 세 분은 80을 코앞에 둔 노인이다. 일행 7명은 모두 강화도나 좁은 물길 너머의 이북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자신들의 혈육이 남과 북으로 헤어져 통한의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 못지않은 비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들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민족의 아픔을 온 몸으로 새기며 밤새워 토론했고 독재와 불의에 항거했던 같은 서클 선후배들이기 때문이다. 이날 만남은 함께 몸담았던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 창립60주년을 맞아 기획한 ‘평화·통일·문화기행’ 첫 행사였다. 여러 차례의 회합과 의견수렴을 거쳐 우리들은 올해 휴전70년을 맞아 민족의 아픔과 비원이 서려 있는 군사분계선 근접지역 몇 곳을 답사하기로 했다. 철조망이 갈라놓은 현장을 살펴보며 조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어 보기로 한 것이다. 여러 차례 연이어 답사하며 가능한 한 많은 선후배들이 만나 서로의 의견과 느낌들을 공유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기획이다.
첫 행사는 일행 7인이 탄 다인승 SUV차가 19일 아침8시쯤 서울지하철 교대역 14번 출구를 출발하면서 시작됐다. 일행 중 막내인 후배가 손수 운전한 차는 출근시간의 혼잡을 뚫고 올림픽대로로 진입, 이어 김포시의 한강 둑 위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렸다. 왼쪽은 아파트와 고층건물들이 우후죽순 솟듯 들어 찬 김포시가지였다. 그 풍경 속엔 고속 성장하는 우리나라의 풍요와 평화, 그리고 역동적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상황은 급변한다. 통행을 가로막은 높고 튼튼한 철조망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민족의 젖줄이자 대동맥 한강이 보인다. 고요히 흘러가는 물결의 평화로움은 접근조차 금지하는 비정한 철조망 때문에 살벌한 모습으로 바뀌고 만다. 자세히 보면 철조망은 강 건너 일산시가지 쪽 둑에도 강을 따라 길게 쳐져있었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의 평화로움을 양안의 철조망이 철저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민족을 갈라놓은 군사분계선 남쪽에 군사작전상 필요에 의해 설치된 민간인 출입통제선이 대도시까지 깊숙이 파고든 서글픈 현장이었다. 이 또한 70년 전 멈춘 민족상잔의 상흔이었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 할 수도권 대도시 주민들이 아직도 그 때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슬픈 현실이다. 언제쯤이면 집 앞의 한강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까?
이런 상념 속을 헤매다 보니 차는 어느새 강화대교를 건너 월곶 돈대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쯤 지났다. 월곶 돈대는 조선시대 이 곳에 설치됐던 월곶진의 방어시설이다. 월곶은 옛 시절 서울, 인천, 연백 등지로 통하는 나루가 있었던 해상요충지였다. 하나로 합쳐진 한강과 임진강 물은 돈대 앞을 지나 서해로 흘러간다. 그런데 그 물길의 모양이 제비꼬리를 닮아 돈대 안에 세워진 정자가 연미정으로 불린단다. 고려 때도 있었던 이 정자는 강화 10경의 하나 이지만 정묘호란 땐 인조가 신흥국 후금의 강압에 의한 굴욕적 '형제 관계' 강화조약을 맺은 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영조 때 중건된 후 여러 차례 보수된 정자 양쪽엔 수령 500년을 넘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
그러나 이 연미정에서 우리는 현실로 다가오는 민족분단의 슬픔을 직시했다. 눈 아래로 흘러가는 물결 너머가 바로 못 가는 북녘 개성시와 개풍군이기 때문이다. 강화도와 이북지역의 최단 거리는 불과 2.3km란다. 청명한 날이었기에 우리들은 북녘산하를 맨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북쪽에서 흘러 온 임진강물이 남쪽의 한강물과 만나 함께 어울려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화합의 길목 아닌가? 연미정에서 약간 오른쪽에 작은 섬 유도가 있다. 1996년 대홍수 때 북한지역에서 떠내려 온 소 한 마리가 여러 날 이 섬에 갇혀있다가 구조돼 남쪽의 소와 부부의 연을 맺은 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유도는 비무장지대여서 남북이 서로 바라만 보다가 합의하여 남측 군이 구출, ‘평화의 소’란 이름을 얻었다. 이 소를 제주도산 ‘통일염원의 소’와 부부로 살게 한 것. 소들도 이룬 남북통일을 사람들은 왜 못 이룰까?
연미정을 나와 간척지 가장자리의 똑 바른 2차선 도로를 달려 강화도 북단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로 향했다. 도중에 현역 해병이 근무하는 초소에서 신원확인 후 통행증을 받았다. 엄격한 검문에서 총성은 없었지만 전선이 가까이 있음을 실감했다. 도로 오른쪽에는 아주 높고 튼튼한 철조망이 이중으로 설치돼 있고 그 사이엔 보도가 있었다. 철조망 밖은 곧 바로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고 바다를 건너면 이북 땅이다. 이 철조망이 바로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이자 민간인 통제선인 셈이다.
일행은 평화공원 주차장에서 내려 신분증을 제시 한 후 약간 경사진 도로의 보도를 10분쯤 걸어가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에 도착했다. 날씬한 현대식 3층 건물이다. 전망대3층 북측을 향한 넓은 방에서 안내자의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가까이는 개풍군해안, 그 뒤로 좀 멀리엔 송악산이 보였다. 개풍군 왼쪽으로 연백평야와 예성강이 이어지는 곳. 방안에는 지형 파노라마와 배율 높은 망원경들이 설치돼 있어 자세하게 북한의 농촌마을들도 볼 수 있었다. 마침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안내자의 설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 너머를 자유로이 오가는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우리 일행은 전망대 옥상과 앞마당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바다 너머의 송악산에서도 우리들을 볼 수가 있겠지. 마당가 약간 높은 곳엔 ‘공산군을 제압하자’는 뜻을 담은 制赤峰 표지비와 지금은 퇴역한 해병대의 상륙돌격장갑차(LVT-P7)가 서있어 승공통일의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일행은 11시쯤 전망대에서 내려와 강화도 서쪽의 섬 교동도로 갔다. 옛 시절엔 다리가 없어 배를 타고 오갔지만 이날은 2014년7월 개통된 3.4km의 2차선 최신형 사장교인 교동대교를 건넜다. 하늘 높이 솟은 두 주탑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철제 밧줄들이 참 예쁜 다리다. 얼마 전까지는 이 다리 앞에서도 통행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요즘은 옮겼는지 없었다. 다리를 건너 해안선에 쳐진 철조망 옆으로 난 시멘트 포장 농로를 통해 망향대로 갔다. 도중에 차에서 내려 철조망을 따라 한동안 걸었다. 철조망 안쪽의 간척지에 만들어진 논에서는 벼가 자라고 있었고 바깥은 갯벌이다. 그러나 한낮의 햇살이 너무 뜨거워 노인들이 오래 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400∼500m쯤만 걷고 차로 이동, 망향대(望鄕臺) 입구에서 내려 10분쯤 걸어 12시에 망향대에 올랐다.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269-1. 망향대는 6.25때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난 나온 많은 주민들 중 150여명이 뜻을 모아 1988년8월15일 세운 망배비와 망배제단이다. 마주 보이는 바다 건너편이 직선거리로 3km밖에 안 되는 연안읍. 연안읍의 진산 비봉산과 남산, 연대지와 연백평야가 손에 잡힐 둣 보인다. 이날은 망향대에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소형차로 이동 카페(망향카페)를 운영하는 안도씨는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망향의 한을 달래고 간다했다. 우리는 시원한 음료와 커피를 마시며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예성강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수로 활동 중이라는 카페 주인이 그 노래를 듣더니 자기는 예성강 노래는 모르지만 대신 알고 있는 임진강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이 노래는 이북에서 유행했던 노래이지만 몇 차례의 남북교류 행사 덕에 남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애조를 띤 가사가 듣는 이들의 마음도 울렸다. 그에게 부탁해 기념사진을 찍고 대룡시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길가의 지석감리교회에도 잠깐 들렸다. 하늘높이 솟은 종탑과 십자가가 특이했다. 대룡시장은 교동도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이지만 넓이가 좁고 규모도 작아서 20여 분이면 한 바퀴 둘러볼 수가 있다. 시장골목들도 어른 두 세 명이 옆으로 서서 걷기가 힘들 정도다. 북한에서 피닌 온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모여 장사하면서 생성된 시장이다. 이 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치 60년대의 모습에서 멈춰버린 듯 한 풍경이다. 그야말로 옛날 다방과 이발관, 시계포 등의 모습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곳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미리 수소문 해두었던 시장 부근의 맛집에서 돼지갈비와 새우젓을 함께 넣어 끓인 ‘젓국갈비’와 밴댕이회무침에다 막걸리 반주로 여로에서 쌓인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대룡시장 골목을 두루 구경하고 강화도 특산품 순무김치와 가래떡도 각자가 필요한 만큼 샀다. 교동도에서 재배한 순무와 쌀로 만들어 김치가 단단하고 떡이 차지다고 한다. 시장에서 떠난 일행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공자초상화를 가져와 안치했다는 교동향교에 들렸다. 고려 인종5년(서기 1127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데 충렬왕12년(1286년) 안향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 온 공자초상화가 여기에 모셔져 있단다. 안향은 1289년에 유교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전파한 사람이다. 향교 입구 하마비에서 향교까지 가는 길옆에 늘어선 감나무들의 연두색 잎사귀가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향교를 나와 120년도 더 돼 거의 국가등록문화재급에 속하는 '옛 교동교회'와 한글점자를 처음 창안한 박두성 생가에 들렸다. 옛 교동교회는 1899년에 교동읍성 근처의 초가에서 시작됐으며 1933년 상용리에 땅을 기증받아 이전했다. 그 후 땅 기증자와 교회의 장로가 상당기간 갈등을 겪었지만 화해해서 1990년에 신축한 현재의 교동교회로 옮겨갔다. 그렇지만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뀐 옛 교동교회와 부지는 그대로 기증한 집안이 소유하고 있다. 옛 교동교회 바로 앞엔 밭을 교회부지 일부로 기부한 분의 아들 박두성씨 생가가 있다. 일제시대 20여 년간 맹아학교 교사를 지낸 박씨는 비밀리에 만든 한글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을 1926년 세상에 알렸다. 시긱장애자 계몽에 힘쓴 박씨는 점자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도 만들었다.
이어 일행은 이날 마지막 여정으로 '심은(沁隱) 천자문 서예관'에 들렸다. 심은 전정우관장은 강화도 출신으로 연세대 화공과를 나와 우리 일행과 동문이기도 했다. 심은천자문서예관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이용해 2000년9월 설립됐지만 2022년10월 전관장 사유지인 지금의 장소로 이전했다. 현재 이 서예관에는 서예, 한국화, 도예품 등 많은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전정우관장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129가지의 글씨체로 쓴 천자문(千字文)이나 167년 만에 재현된 추사체 작품, 그 밖에 2층 양옥건물 여러 개 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서체의 글들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가로로 쓴 혼융체(混融體) 천자문은 서단에서도 귀한 보물로 간주한다. 한자의 서체는 보통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5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심은 전정우 관장은 2004년10월부터 시작해 은나라 갑골문자, 초나라 죽간, 한나라의 목죽간 서체 등 다양한 글꼴들을 총망라한 129가지의 서체를 개발했다. 이는 서예계에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일로 평가한다. 이 서체들은 행정안전부에서 지역보물로 선정돼 국비지원을 받아 교육용 팔각정은 물로 천자문을 형상화한 조소작품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은 천자문마을로 명명됐다. 심은선생은 국내 서단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초대전을 가질 정도로 유명하다. 심은선생의 서체 개발에 얽힌 이야기와 서예와 서체에 관한 상세하고도 뜻 깊은 설명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일행은 6월의 2차 ‘평화·통일·문화기행’행사를 기약하며 귀경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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