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몸 감싸고 세상을 살펴
하늘과 호수가 못 만나게 막아
하늘과 호수는 똑 같이 파랬다. 밑변이 넓은 원뿔모양의 후지산은 눈에 덮여 새하얗게 빛났다. 호수와 하늘이 직접 파랗게 만나려는 것을 하얀 후지 산이 가운데서 훼방놓고 있었다. 드넓은 호수를 둘러 싼 나무들의 새잎들은 연둣빛 반짝임을 산들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고 있었다. 온 천지가 파랑, 하양, 연둣빛 뿐인 것 같았다. 그 흔한 구름들조차 이 색깔들을 겁내어 모두 자취를 감춘 듯 했다. 구름이 사라진 하늘에선 눈부신 태양이 화사한 봄빛을 땅으로 한껏 쏟아 붓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호수 전망대에 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흰 눈으로 온 몸을 단장한 후지산이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일본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의 다누끼호수 규카무라마에 후지전망대에서 바라 본 4월13일 오전의 풍경이었다.
지나 간 시절 같은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며 청춘을 불살랐던 네 사우가 지난 4월12일 사흘 일정으로 일본 후지산 둘레길 트레킹에 나섰다. 아침부터 온갖 부산을 떨며 집을 나선 네 사람은 오후1시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마침 다른 언론사에서 근무했던 한 사람도 한 팀이 되어 동행했다. 탑승권 발행과 짐부치기, 통관수속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오후3시10분 비행기를 타고 시즈오카 공항으로 날아갔다. 약 두시간의 비행 끝에 일본 중부 태평양 연안의 조용한 도시 시즈오카 공항에 내렸다. 토오쿄오(東京)에서 서쪽으로 약200km 떨어진 곳이다. 때마침 굵은 빗방울들이 잠시 떨어져 우리들을 당항스럽게 했다. 거기서 버스로 1시간쯤을 달려 시즈오카역 근처의 시골여관 같은 숙소 '쿠레다께 인'에 여장을 풀었다. 함께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42명. 몆개 여행 팀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은 표준시를 사용하지만 시즈오카는 서울보다 해가 30~40분쯤 빨리 진다. 오후6시인데도 벌써 땅거미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종일 부실한 식사로 견뎠기 때문에 허기가 질 시간이기도 했다. 객실 배정을 끝내기 무섭게 숙소 근처 시즈오카 철도역사 8층 음식점으로 몰려가 민생고를 해결했다. 일본식 샤브샤브 집이었는데 식탁엔 돼지고기가 수북히 차려져 있었다. 각종 채소와 양념을 셀프 서비스로 가져와서 익혀 먹었다. 쇠고기도 무료이지만 주문해야만 갖다 주었다. 고기 등 식재료는 추가부담 없이 무한 제공되었다. 우리 넷은 같은 식탁에 앉아 생맥주를 유료로 주문해 마셨다. 음식은 평범했지만 기억에 남을 일도 있었다. 옆 식탁에 앉은 20살 전후의 일본 아가씨 7명이 내지르는 굉음에 가까운 소란이었다. 인내의 한계를 넘는 소음에 내가 못 참고 서툰 일본 말과 영어를 섞어 큰 소리로 주의를 주고 말았다. 식사 후 우리 넷과 또 한 사람은 아주 비좁은 객실에 모여 몇 잔의 술을 더 마시고 첫 날 일정을 마쳤다. 나는 세사람이 배정된 방에서 잤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다음 날 아침 5시반도 안 돼 잠이 깼다. 전날의 비행기 탑승과 간밤의 상당한 음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70대 중반의 나이가 아침잠을 설치게 했으리라. 숙소식당으로 내려갔더니 6시반부터 배식한단다. 동행한 한 분과 근처 시즈오카역까지 산책하고 와서 식사대열 맨 뒤에 섰다. 객실도 좁았지만 식당도 아주 작아 40여명이 뷔페식 식사를 하느라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면 무척 조심해야만 했다.
오전8시 숙소를 출발, 후지산과 어우러지는 풍광이 절경인 후지노미야의 다누끼고(田貫湖)로 갔다. 버스로 약 90분정도 달려가는 거리란다. 시가지를 벗어나 한참을 가다보니 창밖에 하얀 눈을 덮어 쓴 원뿔 모양의 후지산이 구름 위로 솟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발 높이가 일본에서 최고 높은 3,776m란다.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사진도 찍었다. 산 중턱엔 구름 한 층이 감돌고 있어 신비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호수로 가던 도중 우리들은 일본의 100대 폭포중 하나로 선정된 시라이토 폭포에 들렸다.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된 이 폭포는 높이가 20m쯤 되는 널따란 절벽을 타고 10여개의 물줄기가 흰색 실타래들처럼 쏟아지는 모습 때문에 '흰색 실의 폭포(白糸の滝)'로 불린다. 오랜 세월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깊고 길게 패여 들어 간 골짜기 저쪽 끝에서 폭포의 물줄기는 이른 오전의 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계곡에 놓인 다리에서 봐도 멋있고 아래로 내려가 가까이서 보니 더 장관이었다. 서로서로 사진들을 찍어 주느라 20여 분동안 부산을 떨고나서 일행은 버스로 20분쯤 달려 다누끼고로 갔다.
후지산은 약 1200년전 대분화로 산 주변에 5개의 호수가 생겼는데 다누끼고도 그 중 하나란다. 그 후 후지산은 1702년12월16일부터 보름동안 계속 된 대분화 후 지금까지 잠잠하다고 한다. 그 마지막 폭발 때의 지각변동으로 수위가 크게 낮아진 다누끼고를 인공으로 보수해 현재 수위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공호수라고 한다. 입구에는 두 개의 대형 갈색 문설주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엔 영문자 대문자로 'TANUKIKO'라고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입구를 지나면 호반을 따라 펼쳐진 넓은 잔디밭에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친 텐트가 산재해 있었다. 다누끼고(田貫湖) 남측 캠프장이다. 호수 너머에도 북측 야영장이 있다.
말이 호수이지 굉장히 넓어 보는 지점이나 각도에 따라선 바다 같기도 하다. 캠프장을 지나 멋지게 펼쳐지는 주변 경관에 감탄하며 호반길을 걸었다. 하늘에서 본다면 차양이 좀 긴 운동모자(캡)의 차양을 왼쪽으로 놓고 옆에서 본 형태다. 우리는 호반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위치에 따라서는 저 멀리 있는 하얀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신록이 짙어지는 나무들과 찰랑대는 파란 호수물이 청명한 하늘을 반사해 더욱 푸르게 보였다. 길은 거의 수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호수가 깊숙히 파고들어 차양의 앞부분쯤 되는 곳이 가장 후지산이 잘 보이는 다누끼고 규가무라마에 후지(田貫湖 休暇村前 富士) 전망 데크였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수풀 안쪽으로 깊이 파고든 호수의 수면 저 끝에 파란 하늘에 우뚝 솟아오른 하얀 후지산이 있었다. 뭔가 모를 위압감이 나를 안온하게 누르는 듯 느껴졌다.
나의 문장력으로는 호수와 주변 수풀과 멀리 있는 후지산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아름다움과 느낌을 설명하거나 표현 할 길이 없다. 문득 900여년전 고려의 문장가 김황원이란 분의 전설같은 실화가 떠오른다. 중국 요나라 사신을 한시로 기를 죽여 해동제일( 海東第一)로 추앙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어느 날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 주변의 능라도와 강 건너의 절경에 취한 후 소감을 글로 남기려 했다. 그는 부벽루에 걸려있는 많은 시인들의 글들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모두 떼어버렸다. 그리고 자기가 멋진 글을 써서 걸기로 했다. 그러나 쉽게 떠 오를 줄 알았던 글이 도무지 안 떠올라 온 종일 고민하다 해가 저물고 말았다. 그만큼 경치가 뛰어나 해동제일의 문장가인 그도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우 7언율시 2행만 써 둔 채 울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고 한다.
그가 썼다는 글은 지금도 부벽루에 두 줄만 걸려있다고 한다.
자료에 남아있는 그 글은
<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
평양성을 끼고 흐르는 강물 넓기도 하여라. / 강건너 멀리 아득한 벌판 동쪽에는 점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
나도 김황원의 심정을 가슴에 담고 사진 찍기를 마친 일행들과 함께 호반 길을 걸었다.
울창한 삼나무 숲속으로 이어진 길에선 햇빛이 안 들어올 정도로 컴컴한 곳도 있었다. 그러다 밝은 곳으로 나오면 후지산이 끝이 뭉툭한 뿔모양으로 우뚝 서서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처럼 보였다. 산천 경계 좋고 함께 걷는 도반들이 좋은 데 술 한잔의 풍류가 어찌 없을 손가? 우리 일행 다섯은 물가 공원의 낙시터옆 나무 식탁에 앉아 서울에서 준비해 간 술로 대낮에 이태백을 흉내내며 풍류를 즐겼다. 하얀 후지산이 무척 부러워 했을 것 같다.
풍류를 즐긴 장소는 조금 전에 사진 찍은 전망대에서 도보로 30분쯤 거리인 호반광장 근처였다. 우리는 일행들이 다 지나갈 무렵에야 털고 일어나서 뒤쫓았다. 10분쯤 가니 세 갈래 갈림길에 이정표가 서있었다. 우리는 고다누끼 습원(濕原) 표지를 따라 다시 숲길로 들어가 15분쯤 걸어가니 널따란 습지대가 나왔다. 가운데로 보행용 데크가 설치돼 있었고 굵고 긴 원뿔처럼 높게 자란 멋진 활엽수 한 그루가 습원 안에 서있었다.
습원을 지나니 길은 시골마을 안으로 이어졌다. 골목길 담장엔 새빨간 동백, 화려한 분홍빛 진달래, 늦게 만개힌 벚꽃, 만발한 유채꽃, 이제 잎을 피우는 고목나무 들이 길손들을 반겨주었다.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마을을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후지산이 훤히 보이는 마을길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마을길 옆에는 맑은 물이 흘러드는 얕고 넓은 물담은 논같은 곳도 있었다.
우리는 마을 근처에 있는 진바폭포를 구경했다. 수량도 많지 않고 높지도 않은 세 줄기 물이 떨어지고 있는 아담한 폭포였다. 폭포를 떠난 우리들은 버스로 10여분을 이동, 쇼지고(精進湖)옆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일본사람들이 즐겨 먹는 카레까스와 우동이었다. 맛은 괜찮았지만 카레소스가 적어 더 달라해서 먹었다.
이어 버스로 20여분 달려 사이고(西湖)로 가서 약3km거리의 숲길 아오키가하라 코스를 걸었다. 당초 계획했던 박쥐동굴 견학은 생략했다. 경사가 비교적 평탄한 숲길이었지만 나무가 무성해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그렇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고 간간히 피어 있는 분홍 진달래가 녹색의 숲속 풍경과 대조돼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나무들도 크게 굵은 것은 없었다. 이날도 우리 팀 다섯은 숲길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서 한 잔의 소주를 나누어 마시는 여유를 즐겼다. 좁게 이어지는 흙길에서 삼림욕을 즐기며 40분쯤 가니 철조망으로 경계지은 야생조류공원이 있었다. 안내판엔 이 공원에서 볼 수 있는 30종류의 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공원앞의 돌비석과 대형 입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날 행사를 마쳤다. 보라색 벚꽃을 주렁주렁 매단 수양벚나무들도 무척 아름다와 거기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노천 온천탕 시설을 갖춘 가와구치고 옆에 있는 호텔 유카리노모리로 향했다. 102년 전에 문을 연 유서깊은 호텔인데 일부객실에선 후지산이 보인다. 저녁식사 시간까지 약 두 시간의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노천 온천욕을 즐겼다. 노천 온천장에서도 후지산이 보이는 게 자랑거리이다.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산속의 밤이어서 쌀쌀했다. 일행 다섯은 다시 객실에 모여 남은 팩소주와 소형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소주를 나누며 여행 마지막 밤을 즐겼다.
1,000엔 지폐 뒷면 후지산 그린 전망대 一景
파노라마 전망대 오르며 '느림의 위대함' 절감
사흘째 아침식사도 같은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하고 40분을 달려 명소로 소문난 모토수고(本栖湖)의 1000엔 전망대로 갔다. 호수가의 언덕인 이 곳에 서면 호수면 너머의 후지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이곳에서 보이는 후지산 전경은 일본의 1000엔 지폐 뒷면 왼쪽에 그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해발고도 900m인 이곳엔 아직까지 벚꽃이 피어 있었다. 기온도 평지보다 쌀쌀했다. 배낭에 넣었던 바람막이 재킷을꺼내 입었다.
모토수고 전망공원을 떠나 버스로 10분쯤 이동, 그 곳에서 이번 여행의 주요 행사인 파노라마다이 전망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전망대는 해발 1,328m 고지에 있는데다 경사가 심한 길을 올라가야 했다. 당초 계획은 이 전망대를 체력문제로 못 오를 분들은 버스로 이동해 산을 넘어 오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 11km를 걷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 보행거리를 줄이고 대신 모두 다 함께 파노라마 고지를 넘기로 했다.
이 길은 후지산이 1200여년전 폭발할 때 흘러나온 용암과 화산재가 섞여 풍화된 곳이라 푸석푸석 한 데다 경사가 무척 심하다. 등산로는 딱 한 코스뿐이며 심한 지그재그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등산로 밖을 밟으면 미끄러질 위험이 매우 큰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전9시부터 앞사람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어 천천히 올라갔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지 한 시간만에 정상인 파노라마다이에서 멀지 않은 에보시다께(烏帽子岳,해발1290m) 봉우리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 후 정상으로 향했다.
에보시다께 봉에서 능선길은 한참 동안 고도를 낮추다가 다시 가파르게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마침내 산행시작 1시간40여분만에 정상인 파노라마台(해발1,328m)에 올랐다. 정말 전망이 사방으로 탁 틔었고 멀리 있는 후지산조차도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힘들게 올라 온 많은 사람들이 한데 엉겨 저마다 멋진 순간과 절경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 일행 전원도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혼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망사진 찍느라 빠졌다.
우리 일행 42명은 반대편 능선을 따라 쇼지고(精進湖)로 하산을 시작, 1시간만에 내려왔다. 중간 중간 쓰러진 고사목들도 있었고 계곡에 놓인 나무다리는 위험하리만치 낡은 것도 있었지만 무사히 내려왔다. 다만 85세의 노인 한 분만이 거의 다 내려와서 미끄러져 발목에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심하지 않아 안심했다. 우리는 서둘러 시즈오카 공항 근처로 달려와 일본식 정식으로 마지막 점심을 먹고 모든 여정을 마쳤다.
이틀동안의 트레킹을 통해 우리는 후지산의 서쪽 방면을 통과하는 둘레길 중 극히 일부인 약15km쯤 되는 거리를 걸었다. 둘레길 전체 구간 거리는 125km라고 한다. 인천공항엔 저녁9시에 도착했다. 밤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과 주변의 휘황한 불빛은 정말 아름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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