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안경으로 건너 편 북한군 초소-병사만 엿봐
피비린 내 풍겼던 치열한 민족상잔의 상흔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파괴하고 산하를 뒤흔들고 무너뜨렸던 포격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귀를 찢을 듯 요란했을 소총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눈 아래 펼쳐지는 푸른 산들은 그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녹색의 바다는 쾌청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6월 하순의 뜨거운 햇살에 맞서 짙고 푸른 빛을 시원하게 내뿜고 있었다.
내가 올라서있는 야트막한 언덕 바로 아래로 검은 철조망이 좌우로 구불구불 끝없이 계속된다. 무정해 보이는 철조망 너머엔 높낮이가 다른 수많은 산들이 뛰노는 어린 아이들처럼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산들 사이로 초록색 융단처럼 펼쳐지는 들판도 있고 멀리 떨어진 조금 높은 산봉우리엔 조그만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바람도 없는데다 34도를 웃도는 더위에 지쳤는지 날아다니는 새들조차 없었다. 오직 오후2시반을 지나는 초여름 한낮의 적막함만이 내려깔린 산마루. 6월23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육군25사단 비무장지대 안 초소 상승전망대에서 바라본 통한의 민족분단 현장이었다.
반세기도 더 지나간 시절 자유와 반독재, 통일을 외치며 군부독재정권에 맞섰던 대학선후배 10명이 6월23일 비무장지대의 언덕에 올라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함께 몸담았던 동아리 창립 60주년 기념 통일·문화기행 두 번째 행사로 서부전선 고랑포 부근과 비무장지대의 초소, 휴전선 가까운 민통선 부근 지역을 찾았다.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넘나들 때마다 검문소의 엄격한 확인을 거쳐야 했다. 삼엄한 검문절차를 거치며 우리는 갈라진 나라의 비애를 몸으로 진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언제쯤이면 이런 번거로움 없이 시원하게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달려 韓中국경을 넘어 갈 수가 있을까?
부부동반을 포함해 14명을 태운 대형SUV차는 아침7시30분 서울을 출발, 자유로를 신나게 달려 오전9시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고인돌 마을에 도착했다. 아득한 옛날 이 땅에서 살았던 선인들의 자취인 경기도 지정 기념물 청동기시대 탁자식 고인돌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많이 있었다던 고인돌들은 오랜 세월속에 대부분 파괴됐다고 한다. 근처 주민들은 재난이 생기면 지금도 이 곳에서 동네의 평안을 비는 굿을 한다고 한다. 일행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임진강가 돌무덤에도 들렸다. 강가에 만들어진 자연적 제방에 있는 규모가 상당히 큰 그 돌무덤은 발굴결과 4기로 밝혀졌다. 우리는 돌무지 무덤을 둘러본 후 10여분을 달려 숭의전으로 갔다.
숭의전은 고려태조 왕건을 비롯해 4명의 훌륭한 고려왕들과 16명의 고려충신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 개국 초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이름은 문종 때인 1451년에 지어졌으며 관리와 제례는 고려왕조 후손이 맡았단다. 안내판에는 ‘조선이 유교국가의 의례체계를 정비하면서 고려 왕족과 유민들을 회유하려는 의도에서 건립했을 것’이란 해설이 적혀 있었다. 숭의전은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가 있었으며 6.25때 모든 전각들이 소실됐었다. 그 후 1972년부터 1986년까지 복원했으며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숭의전 대제가 거행된다. 600여 년 전 멸망한 왕조의 혼과 영광까지도 오늘에 이어가려는 숭의전 앞에서 남북으로 동강난 민족의 현실을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퍼졌다.
숭의전을 나온 일행은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간접 표현한 ‘6.25참전국 국기화단’으로 향했다. 이 화단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전동리에 조성돼 있다. 참전한 16개국과 의료지원단을 보내 준 5개 국 등 21개 국가의 국기모양으로 만들어진 화단마다엔 각기 다른 화초들이 철철이 피어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동아리 창립 멤버인 선배가 10년에 걸쳐 만들었다. 매년 6.25때면 국내외 손님들을 초청해 기념회가 열리는 데 마침 이날 제8회 기념회가 열렸다. 외국대사로는 유일하게 필리핀 대사가 참석해 꽃밭조성과 참전의 깊은 뜻을 기리는 축사를 해서 박수를 받았다. 기념식 후 참석한 내외빈들은 맛있는 쇠고기 바비큐로 푸짐한 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 일행은 그다지 멀지 않은 육군25사단 관할지역에 있는 상승전망대로 갔다. 이 전망대는 민통선을 지나 다시 비무장지대(DMZ)안까지 들어가야 도착한다. 입구의 검문소에서 엄격한 확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전망대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UN기와 태극기가 게양된 2층 건물이 보였다. 마당엔 아라비아 수 5가 세 개 큼직하게 새겨진 돌비석이 서있었다. 이 전망대 바로 앞쪽 비무장지대에는 1974년11월15일 발견된 첫 번째 땅굴이 있는 곳이다. 이른바 북한이 파내려 온 제1땅굴인데 근처엔 그 굴의 모형도 있지만 우리는 거기엔 가지 않았다. 대신 당직 장교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배율 좋은 망원경으로 비무장지대와 북녘 땅을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최전방이라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된다고 했다. 또 정전협정에 따라 DMZ 안에서는 UN기와 태극기 외 어떠한 깃발이나 현수막, 조형물도 달거나 설치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2층의 전망대에서 오랜 시간 맨눈과 망원경으로 비무장지역과 그 너머의 북녘 산하를 바라만 보았다. 일행 중엔 비무장지대를 관할하는 부대에서 병역을 마친 사람들도 있어 더욱 감개무량해 했다. 20대 꽃다운 시절에 총칼 들고 지켰던 전선이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철옹성처럼 버티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저 가슴만 먹먹해질 뿐이었다. 무거운 심정으로 돌아서는 우리의 심정을 위로하려는 뜻인지 당직 장교는 전망대건물 계단에서 단체사진 한 컷만 촬영해 주었다. 그들의 전송에 필승으로 구호를 외쳐준 후 우리는 근처의 또 다른 전방초소 비룡전망대로 갔다.
이 전망대 입구 초소의 검문은 더 엄격했다. 돌려받은 신분증을 다시 제출하고 일일이 각자의 연락처와 주소를 다시 검문소 근무일지에 자필로 써야했다. 게다가 당직 근무자가 올라와 핸드폰 카메라에 밀봉 테이프까지 붙였다. 우리는 선도차를 따라 비무장지대 안쪽에 있는 전망초소로 올라갔다. 전망대 아래 좌우로 길게 쳐진 검은 철조망은 중앙 분계선이 아니고 우리 측에서 작전상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중앙 분계선은 그 너머에 있다고 했다. 전망대 왼쪽은 지금은 사라진 장단나루와 임진나루라고 한다. 의주에서 부산까지 이어졌던 국토의 대종주로가 지나던 곳이지만 지금은 인적 끊어진 군사완충지대에 갇혀있다. 우리 앞에는 아름답고 광활한 산하만 푸른 숲 아래 펼쳐져 있을 뿐 적대감 강한 두 군사집단이 첨예하게 맞서는 전선임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직 군인이 설명하고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멀지 않은 건너편 산봉우리에 북한의 초소건물과 깃대가 보였다. 바람이 별로 없어 잘 안 보였지만 걸린 깃발은 북한 인공기란다. 건물 앞 마당에 두 명의 병사가 오가는 것은 보였다. 거기까지의 거리는 불과 2-3km란다.
전망대를 내려온 우리는 선도차를 따라 50여 년 전 온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무장공비들이 뚫고 내려온 곳으로 갔다. 자동차 도로에서 내려 10여분 걸어가니 완강하게 쳐진 높다란 철조망이 나왔다. 그 앞 풀밭에 국군복장의 집총병사들 조형물이 여러 개 서 있었다. 그 옆 산 아래엔 초병이 근무하는 초소 모형도 있었다. 모두가 철조망 너머 임진강변에서 벌어졌을 그 당시의 상황들을 조형물로 설치한 것들이란다. 바로 앞의 철조망도 그렇게 설치한 것이란다. 뜨거운 뙤약볕을 무릅쓰고 자세히 설명하는 젊은 하사관은 작금의 하사관 대우 불평등 여론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늠름하고 군인정신 투철한 하사관에게 단결 구호로 인사하고 우리는 근처의 신라 경순왕릉에 들렸다.
기울대로 기울어져버린 나라를 구할 길 없음을 한탄하며 신흥세력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비운의 마지막 신라왕 김부(金傅)! 그 후 43년이나 더 개경에서 살다 서기978년에 숨진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 여기에 묻혔을까? 왕릉위의 무성한 잡초들만이 역사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 했다. 고려국법에 따라 죽어서도 경주로 돌아가지 못했던 그의 무덤은 무심한 세월 속에 잊혀 졌다가 약770년 지난 1747년에야 발견됐다. 무덤 앞 비석은 조선시대에 세워졌고 6.25때 맞은 총탄자국만 아픔을 더해주는 듯 했다. 우리는 이날의 마지막 여정인 고랑포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4시반.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를 이틀 넘긴 날의 해도 벌써 서쪽 산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임진강가에 번창했던 포구마을 고랑포는 지금 사진으로만 남았다. 강폭이 좁고 물깊이도 얕아 무장공비들도 그 근처로 침투한 고랑포는 교통의 요지였었다. 일제침략기 때는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민통선 안쪽 군작전지역이라 흔적도 없어졌다. 근처 임진강 절벽위에는 고구려성 고로고루성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그 성곽 치(雉)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은 사라져버린 고랑포의 한을 담아 흘러가는 듯 했다.
성곽 앞 넓은 마당의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는 가을철의 명소로 소문났지만 이날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화려한 가을꽃들을 상상하며 일행은 맛있는 저녁식사가 기다라는 파주 예술인마을 해이리로 향했다. 도중에 지나간 시절 미군기지가 있었던 마을에 잠시 들렸다. 미군기지가 있던 때 거기에서 크게 붐볐다는 술집 '라스트 찬스'는 지금 폐가처럼 보였다. 인적도 한산해진 시골마을 어느 집 마당엔 노랗게 익어가는 탐스런 살구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해이리마을에서 임진강 장어구이에 한 잔의 반주로 긴 여정의 피로를 풀었다. 자유로에서 바라 본 한강과 임진강 합수부의 낙조는 정말 천하일경(天下一景)이었다.
< 2023년6월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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