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60년대-1970년대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대학 선후배들과 2015년3월31일-4월1일 해남-강진 여행을 다녀와 쓴 글입니다>
안개에 젖고 역사에 빠지다
보슬비에 젖은 南道는 짙게 드리운 안개 때문에 열 발짝 앞도 흐릿했다. 막 움이 턴 연두 빛 새싹들은 대자연이 안개에 그린 봄 그림이었다. 짙은 안개를 등진 동백꽃은 석류꽃보다 붉었다. 그 사이사이를 개나리와 진달래 등 봄꽃들이 숨어들었다. 보드라운 봄비는 봄 동산의 생기를 마냥 북돋아 주었다.
대학시절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회원들이 3월31일 1박2일 일정으로 남도여행을 떠났다. 오래전에 계획했던 여행인데 막상 떠나는 날엔 비가 내렸다. 심한 봄 가뭄에 시달리던 중부 이북지방에선 단비였다. 그러나 소풍날 비가 왔을 때 느꼈던 초등학생 시절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칠년 대 한발(七年 大 旱魃)에도 하루만 참아 달라'고 했다던 옛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일행은 20명. 모두가 40년 넘게 사귀어 온 사람들이다. 또한 젊었던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학생운동 함께 했던 학우들이기도 했다.
충청도를 지날 때 뿌리기 시작한 비가 호남평야에 들어서니 세차게 내렸다. 워낙 넓은 들인데다 안개까지 짙으니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우리는 안개 속을 달렸다. 차창 가까이로 푸른 색깔의 들판이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가뭄에 지친 중부 이북지방에만 비가 내리고 남녘엔 안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우리는 정오쯤 영암 월출산 무위사에 도착했다. 국내 5대 아름다운 사찰로 손꼽히는 절이다. 인위적 조작을 말라는 절 이름 그대로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수수한 옛 모습 그대로다. 극락보전 벽에 그려졌던 불화들은 현재 벽 째 뜯어내 보존각에 모셨을 정도로 유명하다. 지금 벽에 있는 그림들은 그것을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극락보전 옆에 있는 선각대사 부도 비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선각대사는 왕건을 도와 궁예에 맞서다 죽었는데 28년 후 왕건이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죽인 사람이나 죽은 사람, 이긴 사람이나 진사람 모두가 부질없다는 것을 느꼈다. 절 마당 한편에 핀 비에 젖은 동백이 피에 물들었을 그 때의 아픔을 담은 듯 보인다.
나무에 아직 달린 동백꽃들도 붉지만 아래에 떨어진 꽃들 또한 붉다. 동백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위아래의 두 붉음이 어우러져야 한단다. 쳐다볼수록 그 말의 깊은 뜻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래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했을까?
무위사를 나와 강진만 서쪽의 작은 포구에 있는 병영으로 갔다. 만 건너편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병영은 지방의 군사주둔지를 일컫는 말이다. 고려 말부터 우리를 몹시도 괴롭혔던 왜구를 퇴치하려고 설치했던 병영이 그대로 지명으로 남았단다. 짙은 안개 속에서 왜구의 함성과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지 귀 기울여 본다. 그 왜구의 후손들이 또 우리를 약 올리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강진의 일미 돼지고기 숯불구이 정식에 막걸리 곁들여 여행의 즐거움을 더 한다. 점심식사 후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선현들의 자취를 찾아갔다. 작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백련사는 만덕산 동북쪽, 초당은 동남쪽에 있다. 한 때 번성했던 백련사는 지금은 작은 절로 남았지만 귀양 온 다산 정약용선생과 교유했던 혜장선사로 유명하다. 이 절 만경루에서 강진만 구강포를 내려다보면 속이 시원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은 안개에 가려 우리들의 안타까움만 더해주었다. ‘萬景樓’ 현판과 대웅전의 현판 ‘大雄寶殿’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이다.
이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약용은 귀양살이 18년 중 마지막 10년을 이곳에 집을 짓고 호를 다산으로 했다. 그가 살았던 집이 바로 다산초당이다. 현판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을 채자해 만들었다고 한다. 초당에서 조금 떨어진 천일각에선 강진만의 잔물결과 그 양편의 보리밭이 절경이지만 아쉽게도 구름이 가려 보지 못했다. 다산은 이 누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서 흑산도로 귀양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단다.
다산초당을 내려와 고려도공들의 숨결이 이어지는 청자 가마터로 갔다. 강진은 옛날부터 왕실에서 운영하는 관요가 많았다. 좋은 흙, 땔감. 그리고 운송에 편리한 바다가 연해 있었기 때문이란다. 현재 강진군이 운영하는 고려청자사업소에서 청자 재현과 제작 현장을 견학하며 선인들의 솜씨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발길을 재촉해 강진읍내에 있는 사의재(四宜齋)와 김영랑 시인 생가에 들렸다. 사의재는 귀양 온 다산이 처음 4년 동안 머물렀던 주막집 뒷방이다. 당시 사람들은 대역죄인으로 몰려 귀양 온 다산을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주막집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방을 내주었는데 다산은 이 방에 ‘사의재’란 당호를 걸고 지냈다고 한다.
또 옛 모습으로 복원된 김 시인의 생가에서는 마당에 있는 모란꽃나무 앞에서 그의 시 한수를 읊어봤다. 그렇지만 모란이 피려면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김 시인 생가를 둘러 본 후 회원들은 근처의 식당에서 술 한 잔을 곁들여 맛있게 식사하며 먼 길에 지친 피로를 풀었다. 저녁 식사 후 밤길을 달려 해남 땅끝호텔에서 하루 일정을 마쳤다.
둘째 날 일정은 6시 반쯤 사자봉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 일출을 보는 것으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운무는 깊어졌고 잦아들었던 비까지 솔솔 내려 한 발짝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 일행은 어둑어둑한 안개 속을 더듬어 전망대에 올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밑도 안 보이는 구름 속에서 신선놀음만 하다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산 길에 해변에 바짝 붙어 세워져있는 ‘땅끝’비에서 기념촬영 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맛있는 매생이 전복죽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일행은 달마산 아래에 있는 미황사(美黃寺)로 향했다. ‘남쪽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의 12km가 넘는 긴 능선과 어울린 미황사는 절집의 아름다움으로 소문난 곳이다. 이 절의 명물 괘불(보물 제947호)은 비를 내리게 하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우제 도중에 비가 쏟아져 괘불의 배접이 비에 젖어 떨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신라 때 창건돼 번성했던 이 절은 시주에 욕심을 부린 주지스님의 탐욕 때문에 망했다는 슬픈 전설을 안고 있다.
미황사를 둘러 본 동문들은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진도대교로 갔다. 영화 ‘명량’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은 육지와 진도 사이의 해협으로 물살이 무척 빠른 곳이다. 물 소리가 우레처럼 들린다하여 명량, 또는 ‘울돌목’이라고 부린다. 그러나 하루 두 차례 조류가 바뀌는 시점에는 흐름이 정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현상을 활용해 왜군을 무찔렀다는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은 역사책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일행은 시간에 맞춰 이 곳에 도착해 한참을 기다렸지만 물살이 정지되는 것을 보지 못 한 채 녹우당(綠雨堂)을 향해 떠났다.
해남 연동마을의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가집이다.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 공재 윤두서도 이 집안 사람이어서 유서 깊은 집이다. 녹우당 입구에는 최근에 현대식 유물전시관이 지어져 고산과 공재의 작품과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녹우당은 효종이 어린 시절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 준 집을 효종 사후에 일부 뜯어다 지은 사랑채다. 그러나 지금은 口자 모양의 종가 집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른다.
‘녹우당’이란 이름은 집 뒷산의 비자나무 숲에서 바람이 불면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푸른 비가 내리는듯하다는 은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마침 해남에 낙향해 살고있는 고산 선생의 직계 후손 윤재걸 동문이 이날 직접 안내까지 맡아 더욱 뜻 깊은 여행이 되었다.
녹우당 견학을 마친 일행은 두륜산 입구 음식점에서 이 지역 별미인 돼지고기 고추장볶음과 각종 산나물, 보리밥에 막걸리로 점심 식사를 하고 대흥사에 들렸다. 이 절은 묘향산에 있던 조선의 고승 서산대사가 자신이 사용한 가사와 발우를 맡긴 곳으로 유명하다. 이는 불가에서 자신의 법맥을 전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주문 근처에는 대흥사가 배출한 많은 선사와 고승들의 부도가 있다.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의 글이다. 그런데 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추사와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1840년 제주도로 귀양 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렸다가 이 글이 ‘촌스러우니 떼어라’하고 떠났다. 그리고 8년 후 귀양에서 풀린 추사가 다시 이 절에 들려 ‘도로 찾아서 걸라’고 했다. 이유는 8년여의 유배생활동안 그의 인생관이 바뀐 탓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대흥사에는 정조가 직접 하사한 금물로 쓴 표충사 편액과 1,000개의 옥돌 불상을 모신 천불전 등 많은 보물들이 있다.
대흥사 관광을 마친 일행은 당초 타려고 했던 대둔산 케이블카를 짙은 운무 때문에 단념하고 모든 여정을 마쳤다. 그리고 여기까지 동행한 윤동문이 실어 준 막걸리를 버스에서 나누어 마시며 즐겁게 귀경 길에 올랐다. 비록 모두 70을 넘겼거나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20대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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