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만에 남산 숲속의 둘레길 걷고
옛 추억 더듬으며 새 추억 만들었다
가을과 낙엽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호젓한 서울 남산둘레길. 80을 넘긴 선배 한 분과 70대 중반의 初老 동료 셋, 그리고 60대 중반의 후배 한 분이 만나 걸었다. 심산유곡을 방불케 하는 울창한 숲길에서 색깔을 달리하는 우산을 받쳐 들고 가랑비를 벗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저마다 가슴속엔 지난 시절 크게 유행했던 대중가요 ‘가을비 우산 속’을 읊조리며 첫 사랑과의 달콤했거나 씁쓸했을 추억을 곱씹었을지는 모르겠다. 세월은 흘러 머리엔 백설이 난분분히 내려앉았지만 옛 추억의 색상들은 오히려 더 진해진 채로 다가왔을 같다.
약 30년 전 회사 창립30주년기념 특별기획 <30年 社史> 편찬을 위해 1년 동안 함께 일했던 선후배 다섯이 26일 만났다. 이들은 당시 각각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 회사의 명령에 따라 한시적으로 운영된 팀에서 만나 일한 인연을 공유하고 있다. 맡았던 업무들이 끝나자 이들은 원래의 소속부서로 흩어졌었다. 그 후 세월의 흐름을 타고 은퇴와 함께 각자의 삶을 살아온 옛 동료들인지라 반갑고 정겹기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중 제일 후배는 진로를 크게 바꾸어 미국에서 의료사업으로 크게 보람을 이루었다.
가끔 그 후배가 귀국하면 그 때마다 삼삼오오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해서 8명의 팀원 중 다섯이 만난 것이다. 지난7월 초순 미국의 후배가 카카오 톡 대화 중 가을에 또 서울에 가니 만났으며 좋겠다고 한 일이 발단. 그 후 제일 연장자 선배가 함께 산길을 걷자고 한 데서 이루어졌다.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강원도의 울창한 숲길 못지않은 길이다’고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 https://ih0717.tistory.com/197 )을 읽은 그 선배의 제안에 따라 옛 동지들이 이날 다시 뭉쳤다.
계속 맑았던 날씨였는데 이날엔 ‘종일토록 비’가 예보돼 걱정도 했지만 내리는 비의 양이 적다는 것에 희망을 품고 강행한 걸음이었다. 준비물은 우산과 소매 긴 상의 차림에 간단한 간식거리뿐. 서울지하철3호선 동대입구 역에서 오전10시반에 네 사람이 먼저 만났다. 아주 약하게 가랑비가 솔솔 내려 걷기엔 정말 기분 좋을 정도였다. 제일 선배 분이 상당히 늦게 도착할 것 같으니 먼저 출발하라는 연락을 해왔기에 출발했다.
숲이 우거진데다 말끔하게 단장된 장충단공원을 지나 동국대학 교문 쪽에서 시작되는 300여개의 계단을 올라 남산을 순환하는 둘레길 북측구간에 도착했다. 국궁연습장 석호정이 있는 왼쪽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2차선으로 포장된 도로이지만 차량통행이 제한된 곳이다. 이 길은 걷기에 좋아 평소엔 보행자들이 많지만 이날은 비가 내려 매우 한산했다.
약 200-300m쯤 가다 오른쪽 소나무생태 복원구역에 들렸다. 오랫동안 출입을 막았다가 최근 재개방 된 이곳엔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해 수목이 질 가꾸어져 있다. 그 숲 사이로 난 흙길 한 바퀴를 돌아서 입구로 나오면 400m쯤 된다. 도중에 서울시내와 그 너머 북한 주능선이 흔히 보이는 곳에 섰지만 운무에 가려 온통 뿌옇게만 보였다. 마침 맨발걷기를 하러 나온 여자 분이 우리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 사람은 맨발걷기의 좋은 점과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효험 등을 우리에게 들려주며 한 바퀴를 함께 걸었다.
다시 남산둘레길로 나온 우리는 국립중앙극장 근처의 남산둘레길 전용버스정거장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걸었다. 남산 타워로 가는 전기버스들만 다니는 이 길은 약간 오르막이다. 삼거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한양도성이 이 도로 때문에 헐리고 도로에 그 흔적이 표시된 곳을 지난다. 그 근처에서 일행은 도로를 벗어나 왼쪽 숲속으로 난 흙길로 들어갔다. 표지판엔 남산둘레길로 표기돼 있다. 숲이 울창한데다 바닥엔 야자수 매트 등이 깔린 구간도 많아 걷기에 쾌적하다. 바로 오른쪽 위로 찻길이 지나가지만 통행량이 적어 산길은 적막하게 느껴진다. 구불구불하고 오르막 내리막이 교차되지만 영락없는 깊은 산속의 호젓한 산길분위기다. 강원도나 지리산 숲길 같은 운치가 물씬 풍긴다.
우리는 중간에 있는 정자에서 쉬었고 수시로 기념촬영을 하며 혼자서 우리를 뒤쫓아 오는 선배를 기다라며 걸었다. 도중에 있는 팔도소나무단지엔 낙락장송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10여 년 전 남산생태를 복원하면서 전국에서 옮겨 온 소나무들을 심은 곳이다. 나무들 앞엔 출신지 지자체 이름이 큼직한 돌에 새겨져 있다. 가랑비는 소리 없이 계속 내렸다. 그렇지만 나뭇잎에 맺혔다 후두둑 후두둑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이 들리기도 했다. 가을비가 얌전하게 내리는 남산둘레길의 운치는 한없는 정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일행 중 막내는 자기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가을비 우산 속’이란다.
소나무단지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과일과 떡, 과자로 간식을 하며 지난날의 추억담들을 나누고 있을 때 80을 넘긴 선배가 잰 걸음으로 다가오셨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한 ‘원 팀’을 이루어 걸었다. 온갖 초생식물들이 무성한 늪지대와 그 아래를 흐르는 도랑물도 봤고 각종 수련과 마름 같은 수생식물이 수면을 초록으로 뒤덮은 연못도 지났다. 남산의 생태와 경관이 잘 보전된 이 일대를 야생화원 혹은 야외식물원이라 한다. 더 가니 조금 넓게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끝나고 숲속으로 들어가는 좁은 흙길이 이어졌다. 길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엔 행선지 화살표가 여러 개씩 방향을 달리하며 달려있다. 그중 <남산둘레길>이란 화살표 이정표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갈림길에서 길을 놓치기 일쑤다.
야생화원을 지나면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숲이 깊고 마주치는 사람들도 비교적 적어 조용하다. 그래서 야외식물원을 지나 차가 다니는 남측순환로까지 약1km의 숲길구간에 사색의 공간이란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사색의 공간엔 반딧불이, 일명 개똥벌레들의 서식지도 있다. 인구 1000만명의 세계적 대도시 서울에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생태보존지역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산을 벗어도 그다지 젖을 염려가 없는 숲길에서 우리는 우산을 쓰고 걸으며 정말 멋진 빗속의 초가을 운치를 맘껏 즐겼다.
사색의 공간을 벗어나면 길은 널따랗게 포장된 남산 남측순환도로에 닿는다. 오래된 벚나무가 양쪽으로 우거져 터널을 이룬 내리막길이다. 일방통행이어서 남산 위에서 백범광장이나 남산도서관 쪽으로만 자동차나 저전거가 차도를 달릴 수 있다.
우리는 길옆 보행자통로를 700m쯤 걸어 백범광장으로 내려왔다. 가랑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거의 비를 의식하지 않았다. 백범광장 아래 일부 복원된 한양도성 성곽과 남산공원 표지판 앞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약3시간에 걸친 < 가을비 우산 속 >의 걷기를 마쳤다. 우리는 남대문시장 골목의 오래 된 음식점에 들려 돼지고기무침과 빈대떡, 냉면에 막걸리로 뒤풀이를 했다.
< 2023년9월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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