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상류 12.5km를 걷다
강과 주변의 산들이 어우러진 걸작품
얇게 언 강 얼음판 위험 무릅쓰고 건너
열차 지연되자 환승열차 출발 늦춰줘
그곳은 명실상부한 비경(秘境)이었다. 인적 드문 깊은 산간계곡을 굽이돌아 흐르는 강과 좌우의 산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대자연의 걸작이었다. 눈 쌓인 산들 사이로 넓지 않은 강줄기가 지나고 얼어붙은 강물은 하얀 눈 이불을 덮었다. 얼지 않는 곳은 강이 숨을 쉬기 위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군데군데 보이는 얇은 얼음은 그 아래를 흐르는 물빛과 어울려 비취처럼 파르스름했다. 넓게 펼쳐진 눈밭들도 몇 군데 있었지만 대부분의 물줄기는 하얗고 파르스름한 띠처럼 굽이굽이 계속되었다. 쉬지 않고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둔치의 돌멩이들을 하얗게 어루만져주는 곳-그곳은 발원지에 가까운 낙동강상류 비경 길이었다.
전국을 얼어붙게 한 동장군이 기승을 부린데다 중부지방엔 많은 눈까지 내린 1월26일 아침8시. 30여 년 전 같은 회사 한 부서에서 1년 동안 함께 일했던 선후배 동료 5명이 서울 청량리역에서 만났다. 각각 다른 부서에서 차출돼 한시적 과제를 마친 후 원래의 부서로 돌아갔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만나 옛 추억을 더듬었다. 제일 연장자와 막내는 무려 15년 넘게 나이가 차이 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8시22분에 출발하는 강릉행 KTX열차를 타고 비경을 찾아 떠났다. 차창밖엔 계속 내리는 눈에 덮여 은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날의 행선지는 영동선 철로가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연변 낙동강비경 길의 한 구간. 우리들은 이날 ‘낙동정맥 트레일’ 코스의 일부인 경북 봉화군 석포면 영동선 승부역에서 소천면 분천역까지 12.5km의 낙동강비경을 걷기로 했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 이 지역은 그야말로 깊고 깊은 산간오지였었다. 기록을 보면 영동선 철도는 1940년 묵호에서 탄광지대인 철암까지만 개통되었다. 그 후 1953년 중앙선 영주에서 철암구간, 그리고 10년 후에 황지본선과 동해북부선 일부가 개통되면서 영주에서 강릉까지 193.6km가 이어졌는데 이 구간을 영동선으로 부른다. 영동선 기차는 산간벽지와 동해안을 지나기 때문에 경치가 무척 좋다.
차창 밖의 은세계에 매료돼 감탄을 연발하는 사이 열차는 벌써 횡성, 평창을 지나 강릉역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장의 안내방송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열차가 12분 지연도착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눈이 내려 선로가 미끄러워 감속 운행한 탓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KTX열차가 예정대호 10시1분 강릉에 도착하면 10시13분에 떠나는 동해산타열차를 탈 계획이었다. 그런데 12분 지연되면 환승할 시간이 없어져버린다. 부리나케 역무원에게 승차권을 제시하고 우리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기상상황에 의한 감속운행은 이해되지만 그 때문에 승객들이 곤경에 빠져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 결과 역무원은 우리들을 위해 동해산타열차를 강릉역에서 12분 늦게 출발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편하고 빠른 환승을 위해 미리 하차할 객차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친절한 서비스에 감사하며 우리들은 짐을 챙겼다.
강릉역에서 환승하는 승객은 우리 외에도 5명이 더 있었다. 플랫폼에서 대기하던 역무원들이 우리들을 신속하게 산타열차로 안내해주었다. 산타열차출발도 오래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산타열차’란 이름은 분천역 부근에 조성된 산타마을과 연관해서 붙여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타열차는 정동진역에서 7분간 정차하며 관광객들의 기념촬영을 도와주었다. 우리들도 정동진역 표지판 앞에서 동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약하게 날리는 눈발이 겨울여행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객실은 승객이 별로 없었고 깨끗한 식당 칸에도 한 사람만 책을 읽고 있었다. 주방시설도 돼있었지만 휴업상태였고 음료수 판매대는 없었다. 테이블들은 둘러앉아 식사하고 대화하기 좋았다.
12시가 안 되었지만 아침 일찍 나온 탓에 시장기가 느껴져 준비해 온 음식들로 점심식사를 했다. 편안한 테이블에 앉아 갖고 온 가양주도 몇 잔씩 반주하며 남쪽으로 달렸다. 왼쪽으로는 동해의 창파가 펼쳐지고 오른쪽엔 눈 덮인 산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열차는 동해역을 지나 내륙 신간으로 접어들었다.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눈발은 본격적으로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열차는 그 사이 석탄생산지로 유명한 태백시의 철암역을 지나고 있었다. 창문엔 여행의 낭만과 정취를 북돋우는 정감어린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기차여행’ ‘타보기 전에 절대 알 수 없는 동해산타마을열차‘등등. 또 선반 위 넓고 긴 공간엔 ’영동선의 긴 봄날-철로변 인생‘이란 제목의 긴 시도 적혀 있었다. 훌훌 떠나고 싶은 시인의 심정이 표현돼 있었다. 눈 오는 날 떠나온 겨울 기차여행의 재미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한 사람뿐인 승객에게 부탁해 식당 칸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오후12시51분 우리들은 승부 역에서 내렸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행정구역상 이 곳은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 이다. 우리를 태우고 온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떠난 후 우리는 역 앞을 흐르는 강가로 나갔다. 폭이 넓지 않은 강을 건너가는 시멘트 다리 앞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다리는 물이 조금만 불어나도 잠기는 간이교량이었다. 낙동강비경 길은 강을 건너지 않고 곧장 가도록 돼있다. 시맨트 포장된 곳과 맨땅이 반복되는 길이다. 우리는 미끄럼에 대비해 아이젠을 착용하고 걷기 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따라 길도 구불구불 계속 됐다. 겨울철이라 강물은 많지 않았지만 얼음이 얼었고 그 위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얇게 언 얼음은 파르스름하게 보였다. 강물 좌우로 펼쳐진 둔치의 돌들에도 눈이 내려 동글동글한 흰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걸어갈수록 산은 높아지고 하늘은 좁아졌다. 그래서 이 구간을 ‘낙동강 세평하늘 길’이라고도 하는가보다.
그런데 걷기시작하고 30분도 채 안 돼 커다란 복병을 만났다. 승부에서 분천까지 전 구간을 폐쇄한다는 현수막이 길을 막고 있었다. 시설개보수에 따른 사고방지를 위해 올해 말까지 폐쇄한단다. 안내를 따른다면 다시 승부역으로 되돌아가서 기차를 타고 이 구간을 통과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지 않은가. 봉화군청으로 전화했지만 “통행을 허가할 수 없다. 굳이 간다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당신들의 책임.”이라고만 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우리는 도보여행을 강행키로 했다. 현수막을 넘어 우리들은 강변의 돌길을 걸었다. 주변 산들은 강폭만 남긴 채 바짝 붙어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세평이란 말이 실감났다. 바람도 불지 않았고 새소리도 안 들렸다. 가끔 강 옆의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소리만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얼음판과 울퉁불퉁한 돌길을 조심하면서 걸었다. 사뿐사뿐 내리는 눈송이들까지 우리를 반겨주니 신선을 만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태고의 신비가 머물러 있는 심산유곡에서 움직이는 건 우리들과 눈송이, 그리고 얼음장 아래를 흘러가는 물뿐이었다. 그 조용한 산곡의 강변을 걸으며 우리들은 참으로 많은 추억들을 불러냈고 새로운 추억거리들을 만들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새로운 모습의 절경들이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굽이치는 하얀 얼음 띠도 봤고 그 어떤 비취반지보다 색상이 고운 얼음장들도 만났다. 길이 좋아 아이젠은 모두 벗었다. 길은 때로는 시멘트 구조물 옆을, 또 어떤 곳에선 수직절벽을 감도는 ‘나무 데크’로도 이어졌다. 그렇게 두 시간쯤을 걸어 우리는 작은 간이역 양원역을 지났다. 이 역은 기차가 정거하지 않는 산간마을 주민들이 자비로 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 역사’란 명에를 안고 있다. 무작정 기다리다 손짓으로 열차를 세워 탔던 주민들의 염원이 스린 작고 따뜻한 대합실인데 오래전 영화 ‘기적’을 촬영한 곳이란다.
이정표를 보니 목적지 분천역까지 6.7km, 지나 온 승부역까지는 5.6km란다. 갈 길이 아직 멀었다. 길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건 우리가 금단의 구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지의 길에서 잇따라 나타나는 절경들에 감탄하며 걷다보니 꽤 넓은 공터에 폐업한 듯한 찻집 건물 한 채가 있었다. 출입문은 단단한 빗장에 못질까지 돼 있었지만 ‘용골 쉼터’란 간판과 메뉴판은 선명하게 부착돼 있었다. 찻집 앞에선 가파른 산길이 우리를 막는다. 지나 온 길은 굴곡은 심했지만 평탄했고 가파른 경사는 없었다. 핸드폰의 GPS지도를 보니 강이 기다란 말굽자석처럼 멀리 굽이쳐 흘러 산길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그재그로 수직상승하는 길엔 튼튼한 말뚝들에 연결된 밧줄이 있어 그나마 힘을 덜어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 마루에 올라섰다.
계곡 저 아래에 강을 건너는 철교가 보였다. 우리는 그 철교 옆에 부설된 보행통로를 지나면 곧 바로 분천역으로 갈 수가 있다. 이제 고생이 끝났다면서 고개 마루의 이정표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급전직하의 산길을 역시 지그재그로 달리듯 내려갔다.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눈길만큼이나 미끄러웠지만 내려가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10분도 안 돼 우리들은 산중턱의 터널을 관통한 철도가 강을 건너는 철교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말 큰 난관은 그곳에 있었다. 중간 중간 있는 안내 리본들과 이정표를 따라왔는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길이 없었다.
갑자기 우리가 서있는 절벽이 하늘만큼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철교 옆의 보행로는 튼튼한 철문이 완강하게 막아버렸다. 게다가 주변의 철조망도 ‘월장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듯 무척 높았다. 진로는 막혔고 퇴로는 방금 내려온 그 급경사길 뿐이었다. 넘볼 수도 없는 철조망 옆엔 ‘터널통행 금지’와 ‘체르마트 길 우회’란 글귀와 화살표만 야속하게 표시돼 있었다. 강으로 내려가는 길도 없었지만 그러기엔 절벽이 너무 가파르고 높았다. 방금 지나 온 고개에 서있던 이정표엔 ‘승부역7.6km, 분천역 4.7km,라고 표시돼 있었기에 암담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은 승부역에서 떠난 지 3시간만인 오후4시. 분천역에 도착해 국밥이라도 먹고 열차를 타려했던 계획은 공염불이 되었다. 이젠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나아갈 길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혹시라도 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지 살피며 갔다. 강 양쪽엔 트럭이 다닌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강이 얼어붙어 어쩌면 도강이 가능할 것 같다는 희망 하나만 붙잡고 갔다. 일행보다 한참 앞서 가던 나와 다른 동료 한 명에게 아까 내려갈 땐 보지 못했던 산길 하나가 보였다. ‘산나물채취 금지’ 현수막이 걸렸는데 입구를 굵은 나무 등걸로 얼기설기 막아놓은 나물채취꾼들의 길이었다. 길을 쳐다보니 완만하지만 조금씩 내려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그 길로 가면 강으로 내려갈 수 있음을 직감했다. 가야산 산골에서 자란 나의 본능적 감각도 판단에 도움을 준 것 같았다.
뒤쳐져서 보이지 않는 세 사람을 소리쳐 부르며 둘이 먼저 강가에 내려갔다. 깊이가 얕아 보이고 징검다리 흔적 같은 돌 몇 개가 보이는 곳으로 갔지만 건널 순 없었다. 높은 곳에서 볼 땐 좁게 보였던 강물의 폭이 무척 넓었다. 얼음위엔 눈이 덮였지만 얼음두께나 물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땐 큰 돌을 던져서 시험하곤 하는데 꽝꽝 얼어붙어 돌을 집을 수도 없었다. 내 생각엔 건너다 얼음이 꺼져도 큰일을 당할 깊이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온 몸의 신경을 발아래 모운 채 살금살금 발을 밀며 얼음위로 들어섰다. 중간쯤 들어가니 ‘쩡쩡 뿌지직’ 하며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조심 하면서 건너가 모래 턱에 내려서니 마치 목적지에 다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얼음 위엔 내가 눈을 밀어낸 자취가 길게 나있었다. 그 자취를 따라 동료도 건너왔고, 뒤처졌던 세 동료들도 부근의 얼음판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강 하류에 있는 철교 아래까지 가서 포장된 길로 올라갔다. 철교 하나 건너는데 무려 35분이 걸린 셈이다.
목적지 분천까지는 길이 좋아 조금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걸어 분천역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퍼지고 있었다. 열차출발 10분쯤 전이었다. 역광장에서 보니 역 건물 오른쪽엔 ‘분천역산타우체국’ 간판이 붙은 긴 건물이 붙어있었다.
역사 맞은편엔 분홍색 하트와 별들이 장식된 촬영장소, 광장 중앙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끄는 눈썰매와 대형 성탄절 트리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최고령선배를 기다렸다가 함께 영주행 무궁화열차에 탔다. 한가지 특기하고 싶은 일화 한 토막이 있다. 나이 많은 선배를 끝까지 곁에서 살피며 함께 온 막내의 전광석화 같은 막걸리 배달이다. 열차 출발시간이 겨우 5~6분 밖에 안 남은 시각이었지만 선배의 부탁을 받자마자 역앞의 대로를 잽싸게 달려 넘어가 1.5리터 들이 옥수수 청주 한 페트 병을 사 온 일이다. 아마도 80고령이신 선배님은 후배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갈증이 심했을 것이다. 막내의 수고 덕분에 우리들은 열차에서 다른 승객들의 눈총을 모른 채 하면서 갈증을 풀 수가 있었다. 약 한 시간 후 영주역에서 청량리행 KTX열차를 갈아타면서 즐겁고, 숨 가빴고, 힘들었던 여정을 마쳤다. 9시5분에 청량리에 도착. 역 맞은 편 먹자골목에서 김치찌개 푸짐하게 끓여 몇 잔의 반주로 뒤풀이까지 했다. 추억에 남을 겨울 기차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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