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은 35도 불볕 더위, 산 위는 28~32도로 선선
동생과 함께 바위 길에서 옛날얘기 하며 더위 쫓아
아침 일찍 산행배낭을 챙기는 나에게 집사람이 놀라서 말했다.
"아니, 이 더운 날에 산엘 간다고? 왜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려는 거요?"
그렇게 쏘아 붙이는 집사람의 얼굴을 보니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 나무라는 듯 한 표정이다. '당신의 나이가 도대체 몇살인데 이런 철부지 같은 위험한 행동을 하느냐'는 나무람이 역력하다.
집사람의 걱정이 이해가 된다. 그날의 일기예보는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이 무려 35도. 올 여름 들어 첫 폭염경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했다. 그 기온이라면 가만히 집에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더위라 하겠다. 그런데 하필 그런 날을 잡아 산에 오르겠다고 하니 집사람이 놀랄 수 밖에! 그러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산으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열을 올렸다.
"당신이 뭘 잘 몰라서 그래. 산에 가면 숲이 무성해 시내보다 오히려 덜 더워요. 그리고 바람도 잘 불어 흘린 땀이 식으면서 더 시원하게 느껴지거든."
이 말은 사실이지만 집사람은 이를 절대로 수긍하지 않는다. 그러는 집사람의 걱정을 뒤로 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지난7월3일 나는 8살 아래인 막내동생과 서울지하철6호선 화랑대역에서 만나 불암산을 오르기로 했었다. 강한 만류에도 집을 나서는 나에게 집사람은 포기한 듯 신선한 오이와 파프리카를 푸짐헤게 썰어 챙겨주며 "제발 무리하게 산행하진 말라!"는 당부만 거듭했다.
9시40분쯤 화랑대역에 도착하니 동생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폐선된 옛 경춘선 철도 부지로 난 길을 걸어가다 네거리에서 원자력병원 방향으로 걸었다. 화랑대역에서 약 1km 걸어 원자력병원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서 대로를 벗어나 오른쪽 숲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부터 불암산 산행로가 시작되는 셈이지만 약2km정도는 서울둘레길 1구간과 겹친다. 그 길을 따라 걷다 삼거리의 쉼터에서 산행로는 서울둘레길과 헤어진다. 이정표를 보니 불암산정상까지 3km란다.
동생과 나는 쉼터에서 과일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정상을 향해 걸었다. 울창하게 숲이 우거진 데다 능선길이어서 좌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시원했다. 경사도 완만해 우리는 고향에서의 추억담부터 최근의 신변 이야기까지 나누며 걸었다. 그렇게 1시간10분쯤을 오르니 비교적 널찍하고 둥그런 공터가 나왔다. 공터 주변으로는 무너진 성곽에서 쏟아져 내린 크고 작은 무수한 돌들이 보였다. 활짝 트인 하늘엔 흰구름이 둥둥 떠가고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하늘색은 비취색에 가까운 파란빛이었다. 녹색 나뭇잎과 흰구름 떠가는 파란 하늘을 보노라니 30도를 넘는 더위가 실감나지 않았다. 기상청 발표 일기예보를 보니 12시가 막 지난 그때 그 산기슭에서 가까운 남양주시 별내동의 기온은 30도 였다.
바쁠 것 없는 산길의 시원한 그늘에서 마냥 쉬며 준비해 간 음료와 과일로 신선의 흉내를 내는 재미도 좋았다. 약간 흘렀던 땀이 식을 무렵 다시 오르기를 시작했다. 공터 부근의 안내판엔 '불암산성이 신라시대에 쌓은 성이며 그후 임진왜란때까지 여러 차례 개축됐다'고 씌어 있었다. 공터를 지나서도 30분쯤은 완만한 숲길이 이어졌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들은 흘러내리는 물결모양의 바위가 경사를 이루는 구간으로 들어섰다. 나무그늘도 별로 없는데다 한낮의 햇살을 받아 달구어진 바위가 뿜는 열기가 얼굴에 닿았다. 경사의 완급을 달리하는 바위길을 지나 정상을 향해 계속 올라갔다. 어느 구간은 철제 쇠줄을 잡고 올랐고 또 한동안은 튼튼하게 설치된 데크 계단도 걸었다. 잔등에 쏟아지는 햇살은 뜨거웠고 땀은 비오듯 흘렀지만 일망무제로 트인 산중턱이라 바람은 시원했다.
숨이 차면 데크 길의 난간을 잡고 서서 주변에 펼쳐지는 도시와 산들의 경치를 감상했다. 산의 정상이 가까와 지면서 한없이 길고 가파른 데크 길이 계속돼 산꾼들의 인내력을 시험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오르내린 '데크 로드'이지만 그 때마다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구름 몇 조각만 떠다니는 하늘에선 초여름 한낮의 불볕이 사정없이 쏟아져 바위산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약해지면 바위의 열기가 사정없이 얼굴과 코속으로 달려들곤 했다. 파린 하늘아래 펄럭이는 태극기가 바로 머리위에서 손짓한다. 태극기가 있는 그 봉우리가 불암산 정상인데 산꾼들은 '국기봉'이라 부르지만 공식명칭은 모르겠다. 데크 난간에서 급경사 바위벽에 붙어서 자라는 소나무들과 그 소나무들 뒤로 보이는 남양주 시가지가 어우러진 모습은 절경이었다. 오르다가 숨차면 서서 숨고르기를 번복하다보니 어느 새 정상 표지석에 닿았다.불암산의 정상(508m)은 태극기가 있는 봉우리 이지만 표지석은 그 보다 아랫쪽 바위에 세워져있다.
표지석 앞에서 다른 등산객에게 부탁해 동생과 기념 촬영을 했다. 오를 때마다 같은 장소에서 찍지만 느낌은 그 때마다 다른 것이 기념촬영이다. 우리는 주변의 연봉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정상 부근의 소나무 그늘에 있는 평상에서 늦은 식사를 즐겼다. 시간은 오후1시를 지나고 있었다. 준비해 간 과일과 막걸리까지 먹고 마시며 땀이 식어 서늘함이 느껴질 때까지 마냥 앉아서 놀았다. 그 때 부근의 기온은 31도, 서울 도심은 34도로 표시돼 있었다. 우리는 덕릉고개쪽 하산길을 택해 내려오다 도중에 당고개역 직행 코스로 들어섰다.
상계동의 넓은마당으로 내려가는 이 길은 경사가 매우 심한데다 안전 시설도 거의 없는 구간이다. 그런데 지난 겨울엔 없었던 데크 로드가 덕릉능선 분기점에서 하산지점 넓은마당까지 전체 구간의 약20% 정도엔 설치돼 있었다. 데크 로드 설치공사는 앞으로 계속 될 것 같았다. 데크 로드가 끝나면서 우리는 큰 바위들을 타고 넘거나 돌았고 미끄러운 모래흙이 구르는 위험구간은 기다시피 하면서 내려왔다. 정상에서 1km쯤 내려오다 맑은 물이 흐르는 바위에 쉬면서 세수도 했다. 최근 내린 비로 깊지 않은 계곡인데도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10여분을 더 내려오니 폭포약수터가 나왔다. 노원구 보건소가 5월말 실시한 수질검사 결과 '음용 적합'이라고 표시돼 있었는데 수량은 매우 적었다. 약수터앞 베드민턴 경기장엔 잡초가 무성한 걸 보니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약수터를 지나 숲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행로를 따라 30분쯤 걸어 지하철4호선 당고개역에 도착, 혹서일(酷暑日)의 '이열치열(以熱治熱)산행'을 마쳤다. 오후3시10분이었다. 동생과 헤어져 내가 사는 동네 신금호역 지하철역을 나오니 후끈했다. 오후4시가 지났는데도 34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날 서울의 낮최고 기온은 34.9도였다고 TV뉴스는 전하고 있었다. 형제는 용감했었나?
< 2023년7월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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