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窓시절 추억 곱씹으며 바위에 올라 우정 다져
紅一點 동창이 부탁한 虎皮는 못 만들고 내려와
'울던 애기의 울음도 그치게 했다'는 호랑이들의 놀이터 인왕산에 올랐다. 서울의 서쪽에 우뚝 솟아 장안을 굽어보는 산이다. 해발 고도야 겨우 338m로 야트막 하지만 산세는 결코 만만하지 않은 바위산이다. 산 전체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 인데다 바위들 대부분이 드러나 있다. 이 산을 오르려면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가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곳에 따라선 경사가 무척 급한 계단이나 바위 틈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튼튼한 데크 로드가 많이 설치돼 있어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지만 급경사 구간이 수시로 가로막아 땀 꽤나 흘리며 올라가야 한다.
초가을 기운이 완연해진 9월19일 53년전 같은 학과 입학동기로 만나 대학 캠퍼스를 누볐던 동창생 넷이 인왕산에서 호연지기를 뽐냈다. 몇일동안 오락가락 하며 뿌려대던 가을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린 하늘에다 옅은 운무까지 내려 깔렸다. 이 때문에 기대했던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지는 선명한 서울장안의 조망은 흐릿하게 밖에 볼 수 없었다. 반면 태양이 구름에 가린 탓에 초가을의 따가운 햇살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은 없었다. 게다가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도 두배로 선선했고.
오전10시 서울지허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출발한 일행은 한성과학고교 계단길을 통과해 안산자락길과 인왕산길을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건너 인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로 입구는 인왕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나무 데크 로드가 있어 걷기에 아주 편했다. 우리는 조금 올라가다 경사가 가파른 갈래길 데크 로드로 들어가 인왕산 남동쪽 사면에 있는 해골바위 아래 도착했다. 독립문역을 출빌한지 30분만이다. 커다란 바위인데 움푹 둥글게 패인 커다란 홈이 두개가 있어 그런 무서운 이름이 붙었을 것 같다. 마침 만난 여자 산행객에게 부탁, 바위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물 한잔을 마시며 숨을 고른 후 가파른 경사길을 올랐다. 도중에 높고 널따란 암벽 아래에서 행해지는 무속신앙인들의 굿장단 북소리와 징소리도 들었다. 산에서 행해지는 무속인들의 굿은 분명히 금지된 행위이지만 단속의 손길이 쉽게 닿지 못 하는 것 같다. 굿 소리를 뒤로 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감아돌아 우리는 한양도성 성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부터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비교적 널찍한 산행로를 걸었다. 평일인데도 산행로에는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들 중엔 프랑스에서 왔다는 흑인여성도 있었다. 그녀는 산길 계단에서 바라보는 서울 모습이 멋지다며 엄지 척 사인까지 해주었다. 일행 중 이 길이 초행이어서 힘들어 하는 친구가 있어 그늘진 바위에서 과일, 과자, 커피로 20여분의 휴식을 즐겼다.
산길은 나무 또는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이어졌다. 간간이 경사 심한 바위 틈으로 이어지는 곳도 있었다. 그런 바위들엔 발 디딤 홈이 계단처럼 이어져 패어 있었고 양 옆에도 튼튼한 밧줄 손집이가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초행이라는 친구는 계속 힘들어 하며 올랐다. 바위 틈이나 길가 곳곳에 분홍빛 싸리꽃이나 파란 달개비꽃, 보라색 구절초 등 가을의 전령사들이 피어 가을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꽃들을 감상하며 완급을 조절했고 산들바람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말리며 올라갔다.
힘들면 길 옆에 앉아 쉬고 목 마르면 물 마시며 우리는 역을 출발한 지 약1시간20분만에 정상의 바위에 올라섰다. 다른 사람들과 서로 기념촬영을 해주며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즐겼다. 특히 유난히 힘들어 했던 친구의 즐거움은 더 컸을 것 같았다. 정상에서의 즐거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올라올 때와는 반대편인 자하문 고개쪽 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이 길도 정상 부근은 경사가 심한 데크 로드와 바위길이 조금 나오지만 대부분 구간은 경사가 완만한 시멘트나 돌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힘들어 하는 친구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내려오다 사직동, 통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과일과 인절미를 먹으며 20분쯤 쉬었다. 그리고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산길을 통해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와 통인동시장 골목으로 하산했다. 내려오면서 혹시 삼척동자의 울음까지 그치게 했다는 호랑이가 있을가 살폈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紅一點 동창이 "호랑이를 잡으면 가죽만 가져오라" 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우리는 말끔히 정비된 재래시장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칼국수집에서 산행의 뒤풀이를 즐겼다. 4인용 식탁 하나와 주방쪽 배식구와 입구 창문쪽에 붙어있는 길다란 식탁에 2-3인이 목노에 옆으로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좁다란 식당인데 팥칼국수와 들깨칼국수, 그리고 어묵탕이 일미였다. 술을 팔지않아 우리가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막걸리 두 통을 사와야 했지만 정말 맛있고 분위기 좋은 뒤플이였다. 이런 게 바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리라. 회비 1만원씩 내고 차액은 지난해까지 동기회를 이끌었던 회장이 부담해 더욱 분위기가 짱이었다. 반세기에 걸쳐 다진 우애가 한층 더 깊어진 산행이었다.
< 2023년9월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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