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霧짙은 산길 걸으며 형제애 다져
형제가 힘께 걷는 산길은 힘들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 산길을 짙게 드리운 운무(雲霧)가 감싸주어 더욱 포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산길엔 막바지로 치닫는 한가을을 아쉬워하는 듯 단풍들도 그 절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어떤 나무들은 벌써 잎을 많이 떨어뜨려 겨울나무들처럼 보였다. 낙엽이 수북수북 쌓인 산길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조용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가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는 11월의 첫날은 잔뜩 흐렸다. 텔레비전 뉴스의 일기예보는 온종일 가을비가 예보돼 있었다. 다행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많은 비가 아니라고 했다. 동생과 오랜만에 가가로 한 산행인지라 취소하기 싫어 오전10시 수도권 전철 도봉산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물 한통과 간식용 인절미, 귤 몇 개와 등산 스틱, 우산 등을 챙겨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약 한 시간만에 도착한 도봉산역 부근엔 이미 밤새 비가 한 차례 지나간 후여서 땅이 젖어 있었다. 다행히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나는 한 발 늦게 달려 온 동생과 함께 10여분을 걸어 도봉산 탐방지원센터 근처에 있는 북한산국립공원 대형안내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능원사, 도봉사 앞을 지나 서울둘레길 도봉옛길구간 길을 따라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다 처음 나오는 야트막한 고개에서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능선으로 40분쯤 올라가다 잠시 쉬었다. 이정표를 보니 우이암까지 약 1.5km란다. 도봉 탐방지원 센터에서는 1.7km 되는 지점이었다.
벌써 한 가을이 지난 시점이라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 구간의 북한산 단풍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평일인데다 비 예보 탓인지 다른 등산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운무마저 낮게 드리워 좌우 산봉우리들은 거의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던 도봉산의 자운봉, 신선대 등 준봉들도 구름 위로 올라가버렸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우이암 능선의 높고 낮은 멋진 연봉들도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간간이 약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우리 형제가 산길과 산 전체를 전세 얻은 기분이었다. 붐비는 사람들도 없고 하늘은 하얀 데다 주변 연봉들마저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신선들이 사는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옛 선현들은 ‘別有天地非人間’이라 노래했을 것 같다.
약10분쯤 더 올라가니 운무에 가려지긴 했지만 왼쪽의 골짜기 건너 가파른 비탈에 소의 귀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거무스레하게 불쑥 솟아 있었다. 소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우는 우이암(牛耳岩)이었다. 도봉산에서 이어져 온 능선 바로 아래였다. 마침 곁을 지나던 여자등산객에게 부탁해 동생과 기념촬영도 했다. 그리고 준비한 간식을 하며 땀도 식혔다.
길옆에 선 이정표엔 우이암까지 0.7km 남았단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니 급경사진 곳에 있는 바위 앞에 '위험구간 이니 피해서 좌측으로 우회하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우리는 위험하다는 왼쪽 길을 버리고 이정표 지시대로 걸었다. 약간 내리막이지만 구불구불한 완만한 경사길이 조금 계속 되더니 가파르지만 안전한 계단식 데크 길이 나왔다. 꽤 길게 올라가는 계단이 우리를 우이암 가는 능선길로 데려다 주었다. 능선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계단식 데크로 된 능선을 조금 더 가니 앞이 탁 트인 전망대가 우리를 맞아준다. 거기에 들어가니 도봉산의 오봉능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쉽게도 짙은 운무가 오봉의 전경을 대부분 가렸지만 오봉의 자태는 어슴프레 하게 보였다. 함께 전망대에서 만난 등산객 3명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조금 윗쪽의 바위를 향해 설치된 계단식 데크 로드를 올랐다. 그 계단길에 다른 남자등산객 한 분이 앉아 숨고르기를 하며 쉬고 있었다. 그 계단을 지나니 무척 큰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난 또 다른 오르막 계단길을 지나가야 했다. 터널 같았지만 길지는 않아 끝이 보였다. 조금 전 계단에 앉아 쉬고있다 뒤따라 온 그 사람이 우리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터널을 지나 우리가 올라 선 바위는 우이암보다 조금 더 높은 능선에 있었다. 아마도 이 능선에선 최고 높은 곳인 것 같았다.
상당히 크고 둥글넙적한 바위들이 붙어 있었지만 편하게 앉아 쉬기엔 불편했다. 오봉능선쪽을 향해 기대어 뒷쪽에 우이암을 배경으로 동생과 서로 기념촬영을 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사방은 하얀 운무가 둘러싼 산정상은 속세와 떨어진 세상 같았다. 눈 아래 보이는 우이암의 모습을 보며 힘들여 산을 오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맘껏 즐겼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 이어지는 가파르고 험한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보통 많이 다니는 길을 살짝 피해 경사가 무척 심한 곳으로 내려가 우이암 바로 아래로 갔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제쳐서 하늘 높이 솟은 우이암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다닌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탓에 희미하게 남은 산길의 자취를 따라 조심해서 내려왔다. 낙엽이 무척 많이 쌓여 잘 못 하면 미끄러져 다칠 위험이 큰 길이라 발에 닿는 낙엽을 세면서 걸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내려오다 원통사 근처에 이르렀을때 헬기 한 대가 우리들보다 낮게 골짜기를 따라 날아왔다.
프로펠라 바람에 낙엽이 사방으로 날고 소음이 계곡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 헬기가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다시 오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다. 어디선가 조난사고가 났으리라 생각하며 원통사 경내로 들어갔다. 거기서 만난 안전요원 차림의 두 사람을 통해 그 헬기는 그 절에 달린 화장실 개보수용 자재 운반용임을 알았다.
절을 지나 무수골로 하산하다 약간 편편한 곳에서 점심을 겸한 간식을 했다. 막걸리 한 통과 과일, 인절미로 맛있는 산중 오찬을 즐겼다. 눈앞에는 비교적 잘 물든 단풍나무 몇 그루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정표에는 무수골끼지 1.5km라고 했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길게 이어지는 계곡을 걸었다. 우리는 우이암을 출발한지 약2시간만에 산행로 입구에 있는 자현암에 도착했다. 우이암까지가 2.1km라는 표지판이 우리를 반겼다. 거기서부터는 숲속으로 난 포장도로가 무수골까지 구불구불 이어졌다. 정말 걷기에 기분좋은 낙엽지는 가을길 이었다.
약15분쯤 걸으니 서울속의 농촌마을로 유명한 무수골에 도착했다. 마을앞에는 벼를 재배한 논들이 있다. 약50일전 가을날 벼를 베기전에 지나갔던 논길 이었다. 지금 다시 와보니 벼를 베어낸 황량한 논두렁에 홀로 서있는 '무수골 논체험장'표지판만이 다시 만나 반갑다고 인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가 오후 2시30분.
약 4시간반에 걸친 형제의 등산은 막을 내렸다. 함께 자란 형제는 6남매였지만 두분 형님들은 하늘에, 한 분은 병실에 누워 계신다. 그리고 출가한 여동생은 자주 못 만나니 산길 동행할 형제는 이제 막내만 남았다. 세월의 무상함과 비정함도 함께 느끼게 해준 산행이었다.
< 2023년11월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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