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까지 명성날린 대서예가 체취에 젖고
동해의 창랑이 실어온 상쾌한 해풍에 환호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 모임이다."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다"
"가을 물은 깊어봤자 겨우 너댓자."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물고, 빼어난 글은 나라에 가득 하구나."
무작정 떠나 온 여행길에 들린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古宅) 안채 마루와 외벽 기둥들에 씌어진 글(주련 : 柱聯)들 중 네 구절의 뜻이다.
설 다음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교회 맞은 편 잠실 '먹자골목' 입구에 있는 이태리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설날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들로 실컷 즐겼건만 파스타 등 세가지 음식이 다시 식욕을 자극했다. 그래서 집사람과 설 쇠러 서울 집에 온 큰딸과 함께 이 날도 푸짐한 오찬을 맘껏 즐겼다. 그리고 근처 찻집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까지 챙겨 정한 곳 없이 南으로 길을 떠났다. 세종시에 사는 딸은 설 연휴 나흘에다 개인 휴가까지 하루 더 냈기에 셋이 남쪽지방 도시들 중 두 세곳을 가보자고 했다. 기온은 포근했고, 기상 예보가 제시하는 먼지 수치들은 맑았지만 하늘과 주변의 산과 집들은 온통 희뿌연 연무(軟霧)에 싸여 본래의 빛을 잃은 상태였다.
우리는 서해고속도로를 경유해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옅은 안개를 뚫고 내려 온 햇살이 따사롭게 차창에 쏟아진다. 수원과 평택 근처의 들판과 야트막한 주변의 산들과 구릉들엔 벌써 봄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리니 서해대교의 높고 우람한 주탑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에 하늘로 높이 솟은 주탑과 그에 연결돼 촘촘히 드리워진 굵다란 쇠줄들의 호위를 받으며 긴 다리를 건넜다. 상당히 짙은 안개 때문에 우리가 타고 가는 차는 구름 속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 남쪽에 있는 행담도 휴게소 안내판도 쉬어 가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그 손짓을 뿌리치고 계속 내달려 충청남도 아산 땅으로 들어갔다. 서해가 가까운 탓인지 안개는 더 짙어졌다. 하얗게만 보이는 하늘로 치솟은 다리 좌우의 두 주탑이 우리 뒤에서 거뭇거뭇하게 보였다.
한참을 달려 서산과 당진 근처의 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국도를 달려 예산으로 갔다. 국도 좌우에 펼쳐지는 널따란 들판과 별로 높지 않은 야산들이 정겹게 다가왔다 사라져 갔다. 가끔 만나는 크고 작은 호수들이나 이름 모를 개천들도 예뻤다. 가까운 바다로 흘러드는 개천들이 많은 이 지방을 '내륙의 포구'란 뜻을 가진 내포(內浦)지방으로 부르는 까닭을 알만 했다. 우리는 국도를 30여분 달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 고택에 들렸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가 나라에서 하사 받은 땅에 지었으며 추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솟을 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들어서면 'ㄱ'자 모양의 사랑채, 'ㅁ'자 모양의 안채가 이어진다. 고색이 짙게 스며있는 기와집의 기둥들엔 선생의 필체가 살아 숨쉬는 글들이 씌어 있다. 그 글들마다 아래쪽에 정자체로 다시 쓴 글과 읽는 음, 그리고 뜻을 써 놓은 해설이 씌어있어 한자를 읽지 못 하는 사람들도 깊은 뜻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안채의 널찍한 6간 대청 마루에 걸터 앉아 선생의 글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려 봤다. 안채는 여인들이 생활하는 곳이며 이 건물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사용했다고 한다. 음식을 만드는 부엌이 따로 있는 왕실가옥 구조인데 왕실사람인 화순옹주(김정희 증조모)가 살았기 때문이란 안내문이 있었다. 고택 바로앞 잔디밭에 묘소가 있고 선생의 기념관도 바로 근처 도로가에 있다. 고택을 둘러본 후 기념관에 들려 거기에 전시됐거나 보관된 글들과 유물, 설명들을 보면서 추사의 높은 학식과 인품, 덕망을 실감했다. 여러 게시물 가운데 한 곳에 적힌 내용이 가슴 깊이 닿았다. 거기엔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대가들과도 맞먹었던 실력을 기를 수 있었던 선생의 엄청난 노력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다.
기념관을 나와 20분쯤 달려 예산읍 예산시장안 '장터광장'에 들렸다. 요리전문가 백종원씨가 낡아 쇄락하고 무질서하게 난립된 재래시장 점포들을 정비해 개설한 후 유명해진 그 시장이다. 시장 한 가운데 널찍한 사각형 마당을 만들고 각종 음식점들을 주변에 배치했다. 광장엔 4-5인이 앉을 수 있는 낮은 원탁들이 여러 개 있었다. 손님들은 먼저 마당의 좌석을 배치 받은 후 원하는 음식들을 해당 점포에서 사와서 먹는다. 고기와 재료들을 사고 불판을 빌려 구이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저녁5시20분쯤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안은 사람들로 꽉 찼고 음식점들마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장시진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도 한참을 기다려 배치받은 좌석에 앉았다. 나는 좌석을 지켰고 집사람과 딸이 가서 한참만에 고기 꼬치, 큼직한 게를 넣은 매운 라면에다 막걸리와 식혜 등을 사와 저녁 식사를 겸해 맛있게 먹었다. 약 한 시간동안 먹고 마신 후 시장을 나오니 어둠이 내려 깜깜했다. 우리는 고속도로처럼 넓게 뚫린 국도를 달려 딸이 사는 세종시로 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둘러 포항시 구룡포읍 호미곶을 향해 달렸다. 자동차 네비게에터로 확인하니 약230km. 세종시 외곽을 흐르는 금강 가를 지날 땐 아침 햇살을 머금은 안개 너머로 보이는 산과 건물들의 모습이 동양화를 방불케 했다. 딸은 젊은이답게 운전대를 잡고 안개 낀 고속도로를 힘치게 달렸다. 서산에서 당진, 상주, 영천을 거쳐 포항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다. 이 도로는 충청북도와 태백산맥 연변의 산들을 끼고 있어 경치가 수려하다. 그렇지만 수많은 터널을 통과하는 데다 동편 하늘에 낮게 떠서 비치는 햇살이 상당히 짙은 안개와 어울려 주변 경치를 뿌옇게 흐려놓아 아쉬웠다. 충청북도를 벗어나 경상북도 상주를 지나면서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다 포항 톨게이트에서 국도로 이어졌다. 요즘엔 국도들도 대부분 고속도로처럼 2차선으로 널찍하고 곧게 벋어 있다. 우리는 포항시 외곽과 호미반도 가운데를 통해 구룡포항에 도착했다.
새파란 동해의 물결이 역시 파란 하늘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구룡포항을 지나는 국도는 거의 해안선을 따라 호미곶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2년전 5월 친구 셋과 함께 걸어서 지나갔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 해 우리는 이 항구 앞을 지나 금강산이 보이는 휴전선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 750km를 완보했었다.
걸어서 갈 때는 한나절이 넘게 걸렸지만 자동차는 우리를 순식간에 호미곶 해맞이광장 주차장에 데려다 주었다. 광장 서쪽에 붉고 굵은 그물망 모양의 둥근 조형물 안에 서있는 대형 5층건물이 2000년을 기념해 지은 새천년기념관이다. 그 앞에는 넓은 광장이 바다까지 펼쳐지고 그 광장 끝 바다 물 속에 커다란 손이 하늘로 솟아있다. 거인이 물속에서 내민 오른손인 듯 보인다. 그 손의 짝궁 격인 왼손 모형은 광장 한 복판에서 바다를 향해 마주 보고 서있다.
광장의 북쪽에는 대한제국 말년에 세워진 호미곶 등대가 하을 높이 하얗게 솟아있다. 그 등대 곁에 등대박물관이 있다. 우리도 기념사진을 찍고 바다위에 설치된 관광용 널따란 데크에 나가 문어상과 소년 동상을 카메라에 담고 푸른 동해의 물결도 담았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나온 탓에 인터넷을 뒤져 맛집을 찾았다. 옛 말에도 "수염이 댓자라도 먹어야 산다."고 했다. 주차장에서 도보로 15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어부마을' 이란 횟집으로 갔다.
평생을 해녀로 살았고 지금도 물질을 하는 68세 해녀 할머니가 직접 잡고 채취한 생선과 해물을 사용하는 집이란다. 이 할머니가 권하는 이시가리(줄가자미)회와 아구탕, 물회에다 밑반찬으로 제공되는 돌문어와 전복, 소라찜까지 모두가 일미였다. 명불허전이란 말이 정말 실감나는 집이었다. 게다가 옆 테이블 손님 넷이 주고받는 경상도 표준어(?)의 시끄럽지만 정감이 묻아나는 대화도 맛집의 분위기를 돋우어 주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내 고향이 경상도인 탓이리라.
우리는 영일만을 내려다보는 호미반도의 북쪽 해안도로를 달려 포항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 만나거나 보이는 해안의 해파랑길들은 내가 벗들과 함께 걸었던 길이라 더욱 정겹고 멋지게 느껴졌다. 바닷가로 계속 되던 도로는 산 안쪽 내륙으로 드나들기를 반복하다 포항제철 남쪽의 도구해변에 이른다. 재작년에 보았던 수십대의 수륙양용 장갑치들과 백여명쯤 돼보이던 해병대 병사들이 이날은 안 보였다. 포항제철 앞을 지나 형산강 다라를 건너니 포항시내였다.
우리는 죽도시장을 지나 영일대해수욕장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1.5km쯤 떨어진 영일대까지 걸었다. 1년9개월만에 다시 걷는 해파랑길에서 그 때의 일들을 가족들에게 들려주며 걸었다. 당시엔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선거방송 소리가 요란했고 영일대앞 공원의 장미들이 초여름 더위에 힘들어 하던 때였다. 그리고 바다 위에 지어진 누각 영일대 마루에 올라서 해풍을 맞던 때의 시원함도 빼먹지 않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 날은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치기는 했지만 그 때처럼 덥거나 시원하지 않았다. 다만 맑은 공기와 해풍이 무척 상쾌한 늦겨울 저녁무렵이었다. 또한 늦은 오후의 햇살을 온 몸으로 맞는 영일대의 멋진 자태도 변함이 없었다.
먼 거리를 달려온 탓에 집사람은 상당히 피로한 것 같았다. 우리는 포항시 북쪽으로 올라가 전망좋은 유명한 카페에서 커피와 케잌을 주문해 여행객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쉬었다. 해질 무렵이 가까와진 해면위로 엷은 해무가 깔리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6시쯤 카페에서 나와 넘어가려는 해와 석양의 끝자락을 벗하며 영덕읍을 지나 상주, 청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종일 운전을 한 딸은 기어이 운전대를 양보하지 않고 밤길을 쏜살같이 달려 9시에 집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운전을 못 했다. 내 운전솜씨를 못 믿는 집사람이 못 하게 했다. 그 대신 용감한 효녀덕에 정말 멋지게 보낸 설널 연휴였다. 쥐포구이와 과채류 등 간단한 안주에 와인 한 잔씩을 마시며 이틀에 걸친 가족여행을 마무리 했다.
< 2024년2월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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