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소리 끊긴 철교 가운데서 여유로움 만끽
북쪽에서 불원천리 흘러 온 큰 물줄기기 남쪽에서 역시 천리길을 흘러온 큰 물줄기와 만나는 양수리. 그 중 북쪽의 물줄기 북한강을 가로지른 철교를 걸어서 건넜다. 이름은 '북한강철교'이지만 지금은 열차운행이 중지된 철길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약70년동안이나 밤낮으로 그 다리 위를 달리다 10여년전에 멈춘 기차들의 기적 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강물에 세워진 교각들과 그 위의 다리 상판을 들어주는 거대한 철제구조물도 그대로 이고 이름도 그대로 인 북한강철교(옛 양수철교).
1938년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숱한 기차들이 지나다녔던 철교였다. 그러다 중앙선 복선전철화에 따라 2008년부터 바로 옆에 새로 복선철교가 지어지면서 열차운행이 멈춘 다리다.
열차는 달리지 않지만 북한강철교는 오늘도 수많은 자전거 여행자들이나 보행자들을 건너게 하느라 결코 편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난12월12일 한낮에 나는 그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약30년전 중앙일보의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후배 동료4명과 함께 건넜다. 전날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지만 이날은 오전에 흐리기만 하다 한낮부터 구름이 싹 걷혀 정말로 걷기 좋은 하루였다. 이날 만남은 한달 전 양수리 근처의 운길산을 함께 등반하면서 두물머리와 양수리 일대의 절경에 반해 이날 다시 만나 걷기로 한 데 따른 것이었다.
서울에서 각각 출발한 세 사람이 12시30분쯤 운길산역에 함께 내리니 인근 양수리와 문호리에 사는 두 사람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역앞을 지나는 운길산로를 따라 조금 가다 북한강 자전거길로 들어갔다. 길 바로 옆에 있는 빛의 정원은 겨울철이라 사람들이 안 보였고 커다란 조형물은 빛을 잃고 서있었다. 자전거꾼들과 보행자기 함께 걷는 이 길은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중앙선 철길이었지만 중앙선 복선전철화 후 폐선된 철도부지로 남았다가 보행자와 자전거 동호인들을 위한 길로 단장됐다. 이 길은 철도가 옮겨가 사용않는 터널이나 철교를 이용해 충주 등지로 이어진다. 역에서10여 분을 걸어 우리는 철교입구에 도착했다.
이날 우리가 걸어서 건넌 철교도 레일을 걷어내고 상판을 판자로 덮어 자전거용 쌍방행 두 길과 보행자용 한 길이 함께 가는 길이다. 열차가 다닐 적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 이등변 삼각형을 닮은시뻘겋게 녹 슨 다리 난간의 철제 구조물들은 하나는 바로, 하나는 거꾸로 선 모습으로 길게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이런 철교의 모습은 우리의 눈에 익은 모습이다. 기차를 타고 차창 너머로만 보았던 북한강과 두물머리 주변의 경치를 맘껏 감상하면서 걸었다. 서두를 일도 없었지만 서두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즐기는 신나는 물놀이'라고 해야겠다. 물위에 띄운 배에 앉아서 흔들리는 즐거움은 없었지만 높은 곳에서 강 주변의 원경과 근경을 조망하는 여유로움이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봄바람 처럼 살랑거리는 미풍에 찰랑이는 북한강을 내려다보는 철교 한 가운데 서서 수종사와 운길산, 예봉산, 예빈산과 그 너머의 검단산, 그리고 바로 앞의 양수리 시사지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한 폭의 잘 그린 수채화처럼 보였다.
좌우 난간을 오가며 경치를 완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자전거 탄 사람이 오면 길을 비켜 주었고 보행자가 지나가면 실례를 무릅쓰고 단체 촬영을 부탁하면서 강물 위를 걸었다. 다리가 끝나는 곳에 자전거길을 형상화 한 조형물과 공터가 있어 기념촬영을 했다. 다리를 지나 우리는 남-북 한강이 만나 이루는 거대한 모래톱에 형성된 둔치로 들어갔다. 초입에 서있는 커다란 안내 입간판엔 '두물머리 물래길'이라고 씌어 있었다. 평평한 초원의 가장자리를 걷는 이 물래길은 두 물줄기가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나 다시 양수리 시가지에 닿는다.
당초 이 넓은 모래톱에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계획이었단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과 기업, 관계 기관의 노력으로 각광받는 생태공원으로 남게 됐다고 한다. 널따란 풀밭은 여러 주제로 조성된 광장과 숲, 야생화단지들로 구획 지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무성했던 잎들과 풀들이 다 떨어지고 말라 사라진 초겨울이라 황량한 느낌이었다. 합수점인 모랴톱 남단우 두물머리엔 '두물경'이라고 검게 음각된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둔치 초입에서 꽤 떨어져 약30분 걸렸지만 정확한 거리는 모르겠다. 강가에 들어선 잎이 다 떨어진 키 큰 물버들 나무들이 하늘에다 그린 추상화도 감상했고, 강과 둔치안의 산책로 옆 억새들의 마른 잎새 사이로 스치는 바람의 노래도 들었다. 억새꽃들은 대부분 떨어졌지만 일부는 아직도 남아서 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좋았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초원 곳곳을 누볐다. 평평한 풀밭을 구획지으며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이리저리 걸었다. 자그마한 다리도 건넜고, 두물머리 나루터 근처의 강가에 매어 둔 돛배도 보았다. 평소 황포돛을 올린 사진으로 잘 알려진 그 배였지만 이날은 그 돛을 내려 포장한 상태로 매어 있었다. 각종 연꽃으로 유명한 세미원 근처에서는 물 위로 솟아있는 잎 마른 연꽃대들만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지난 여름날의 그 아름다운 모습들은 내 마음속에만 담아와야 했다. 우리는 수령 4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들과 그 근처의 대형 사진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으며 초겨울 한낮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누렸다. 젊고 발랄한 아가씨가 찍어 줘서 그런지 사진들이 더 잘 나온 것 같았다. 구름이 사라진 파란 하늘은 찰랑대는 한강물과 누가 더 파란지 서로 다투는 듯 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오후3시를 향하고 있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사는 법. 우리는 미리 말해둔 양수리의 맛집 평창장국밥집으로 달려갔다. 사장의 고향이 평창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의 30년 가까운 단골집이란다. 시장이 반찬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말 음식이 깔끔하고 맛도 좋았다. 김치전과 해물파전에 이 지방 특산품 지평막걸리가 빠찔 순 없는 법. 우리는 그렇게 맛있는 음식에 막걸리 반주로 좀 늦은 오찬을 즐겼다. 그리고 양수역 근처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내년의 또 다른 즐거운 계획을 세우고 어둠이 내린 양수역에서 새해의 만남을 다짐하며 헤어졌다
< 2023년12월16일 한낮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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