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걸 보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 백사실계곡 산책이었다. 조국의 암울했던 시대를 살다 간 천재 시인들이 풍기는 짙은 문향(文香)도 느꼈고 한국 화단의 거장이 남긴 많은 명작들도 감상했다. 또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의 호방한 기상과 진경산수화 대가이자 선비화가의 화폭에 담긴 혼과 자취도 더듬었다. 비교적 자주 지나다녔고 얘기도 많이 들었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알게 된 생소한 사실들은 말 못 할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했나보다.
겨울의 끝자락 2월의 마지막 날 오전11시 서울지하철 경복궁역에서 30여 년 전 중앙일보에서 함께 일했던 넷이 만났다. 그중 둘은 멀리 경기도 양평 양수리에서 달려왔다. 우리는 경복궁역에서 나와 북한산쪽 큰길을 따라 걷다가 창성동과 옥인동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골목 초입에 있는 야트막한 한옥 기와집 앞에서 멈췄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집이다. 이 집이 일제강점기를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집이다.
27세에 타계한 시인은 우리들의 중고교시절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날개> <오감도>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시인이 세 살 때부터 20여 년 살았던 집터 일부에 시민들 모금과 기업의 후원금으로 2009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집 안쪽 벽과 공간엔 시인의 유작과 당시 작품이 실렸던 신문과 잡지 등이 도서관 서가 모양으로 전시돼 있었다. 또 시인의 활동상황과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물도 함께 볼 수가 있다. 게다가 안내인의 자세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시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시(詩)들은 90년 가까운 세월의 간극을 넘어 우리들에게 당시의 향기를 전하고 있었다.
골목길을 한참 더 들어가면 옥인동 산자락에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 있다. 1939년5월 지어진 이 집은 서양식 외관에 일본식 다다미방, 한국식 온돌방과 마루 등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절충가옥이다. 구한말 관료이자 잘 알려진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이 집은 근대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했으며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이다. 마당에는 1973년부터 2011년까지 여기서 살았던 한국화단의 거장 박노수 화가가 심은 대나무 감나무 목련 등 각종 정원수와 각양각색의 정원석들로 잘 꾸며져 있다. 건축 당시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는 미술관 내부에는 박화가의 작품 전시실 외 작업실도 보존돼있다.
박화가의 작품은 녹색을 띤 짙은 파란 색상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종로구는 박화가의 작품을 기증받아 2013년9월 이 집을 구립미술관으로 개설했다. 작품들은 벽에도 전시돼 있고 영상으로도 제작돼있어 벽면의 대형화면으로 감삼 할 수도 있으나 촬영은 안 된다. 유료입장이지만 65세 이상이나 국가유공자 등은 무료다.
우리는 미술관을 나와 윤동주 시인이 한때 하숙했던 집터가 있는 누상동 골목길을 걸었다. 현재의 붉은 벽돌 건물 벽에 붙은 안내판엔 당시의 집 사진과 함께 윤시인이 이 집에 살면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의 대표작을 썼다고 적혀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가면 인왕산 자락 수성동계곡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도 나오는 돌다리가 이곳에 있다.
정선이 76세였던 1751년에 평생의 친구 이병연을 위해 그린 이 그림은 장마철 소나기가 지나간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정선보다 다섯 살 많았던 이병연은 그해 5월29일 숨졌다고 하니 영원한 우정의 마지막 선물이 된 셈이다. 기다란 두 개의 돌이 놓인 다리 아래엔 지금도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300년 가까운 세월의 시차를 넘어 18세기의 거장과 현재의 우리가 함께 계류를 즐기는 듯했다.
또 이 계곡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친형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이 지어 당대의 문인들과 글 짓고 그림 그리며 풍류를 즐겼던 별장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다고 한다. 대군과 문인들은 비해당 주변의 자연 속에서 무심히 스쳐버리기 쉬운 48가지의 아름다움을 찾고 군자의 덕행과 효행 등을 배우고 느꼈다는 안내판의 글 내용이 재미있었다. 비해(匪懈)는 ‘게으름 없이’란 뜻인데 한 사람을 게으름 없이 섬기라는 시경(詩經) 구절에서 따왔단다. 조카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의리를 지킨 대군의 기개가 스민 당호인 것 같다. 좀 더 생각을 넓히면 안견(安堅)에게 몽유도원도(夢遊桃源道)를 그리도록 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도원 꿈이 이 계곡의 별장에서 꾼 것인지도 모ㄹ겠다. 무심히 보아 넘겼던 좁다란 계곡과 돌다리이지만 이런 사연들을 알고 나니 더욱 새롭게 보였다.
계곡을 지나 좀 더 올라가니 깊게 틈이 벌어진 바위 틈새로 졸졸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마철이면 이곳에서도 많은 물이 넘쳐흐를 것 같았다. 그 근처의 공사때문에 직진하는 길이 막혀 우리는 산자락을 따라 옆으로 돌았다. 마침 쉼터가 있어 우리들은 잠시 쉬면서 인왕산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즐겼다. 우리들의 눈앞에 인왕제색도 속의 모습들이 펼쳐져 있었다. 산을 감아 도는 산책로는 등고선을 따라 이어졌는데 도중에 벽체 일부만 흔적으로 남은 옥인시범아파트 터를 통과했다.
1971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9개 동 308 새대였다. 그러나 인왕산의 경관이 가려진 데다 너무 낡아 흉물로 변해 결국 철거해 자연경관을 복원했다. 다만 7동의 일부 흔적만 잘 못 된 개발에 대한 교훈과 반성자료로 삼기 위해 남겨두었다. 수평으로 이어지던 산책로는 청운공원 근처에서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데크 계단과 짧은 출렁다리를 지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도중의 쉼터에서 준비해 간 과일로 간식을 했고 인왕산 상징 호랑이 모형이 있는 곳에서도 쉬었다. 수성동계곡을 출발한 후 약2시간 만에 윤동주문학관에 도착했다. 우리는 거기에 들려서 여러 형태로 보관, 전시된 시인의 자취를 더듬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 백사실계곡으로 가기 위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문학관을 나와 창의문 뒤쪽 부암동으로 이어지는 삭막한 아스팔트 포장 비탈길 산책로를 걸었다. 도중에 오래전 TV 연속극 촬영으로 유명해진 전망 좋은 카페 ‘산모퉁이’를 지나 백사실계곡으로 갔다. 윤동주문학관을 나온 후 약 40분쯤 걸렸다. 울창한 숲속의 이 계곡은 서울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비경이다. 입구에 ‘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조선 시대 별장들이 많았던 이곳을 표현한 글인데 ‘백악산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동쪽의 경치 좋은 곳’이란 뜻이다.
상당히 널찍한 공터에 연못이 있고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다. 연못 앞에는 육각정 초석이 있고 사랑채의 돌계단과 초석도 남았다. 이항복의 호가 백사이기 때문에 백사실계곡이 그의 별장지였다는 얘기가 구전돼왔다. 그러나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결과 추사 김정희가 이 일대를 소유했음이 밝혀졌다. 추사는 이 일대 부지를 사들여 19세기 후반에 집을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일대는 물이 맑고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데다 도롱뇽, 북방산개구리, 오색딱따구리 등 다양한 야생동물도 서식하고 있어 생태환경 보전지역으로 지정돼있다. 우리는 연못가 쉼터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식을 했다. 그리고 숲길을 걸어 세검정으로 나와 통의동행 시내버스를 탔다. 함께 걷기로 했으나 갑자기 다리가 불편해져 음식점에 와서 기다리는 한 분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만나 늦어진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다음 모임을 약속했다.
< 2024년3월6일 아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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