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지 떠났던 독수리들이 50년만에 되돌아 왔다. 그중 열아홉이 함께 모여 남도의 산하와 바다를 사흘 동안 우리나라 땅끝까지 누비며 다녔다. 반세기라는 세월의 간극도 이들 초로들의 용기와 젊은 마음을 꺾지 못했다. 그야말로 자신들은 ‘萬年靑春’이라고 자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엔 하얗게 서리가 내렸지만 베테랑 독수리들에겐 땅이 좁고 하늘은 낮으며 바다는 얕았다. 그들은 그렇게 길을 걷고 산엘 오르고 맛있게 먹고 흥겹게 노래하며 새로운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 이들은 국내 최고 명문 연새대 정치외교학과 1970년도 입학 동기들이었다. 누가 이들에게 古稀를 넘긴 뒷방노인들이라 할 수 있을까?
며칠째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 계속되던 5월13일 아침8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주차장. 거리의 원근을 불문하고 모여든 동기생과 그들의 부인 등 20명이 고급 프리미엄급 버스에 함께 타고 2박3일의 남도 여행길에 올랐다. 올해 졸업 50주년을 맞아 떠나는 기념 여행 이었다. 맑은 날 소풍을 떠나는 초등학생의 기분인들 이보다 더 상쾌하진 않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르 진입한 버스가 양재동 만남의 광장을 지나자 질척거리던 차량량들은 날개를 단 듯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 차창 밖 좌우의 산들에는 신록을 지난 초여름 초록 물결이 반짝이고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다. 양승함 동기회장의 인사가 있었고 남편을 따라나선 두 부인의 인사, 그리고 해외에서 귀국한 친구들의 인사도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들의 여행을 책임진 여행사 사장의 여정 설명과 운전기사에 대한 응원의 박수도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협찬사 관계자의 선물증여와 건강식품 홍보도 뒤따랐지만 망향휴게소에서 그는 내렸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망향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우리들은 천안논산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두 시간쯤 달려 정읍 녹두장군휴게소에서 급해진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학정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맞서 봉기했던 녹두장군과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가슴 깊이 새기며 영산강을 건너 오후1시 전남 영암군 군서면 민속촌에 도착했다.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월출산이 바로 앞에 보이는 마을이다. 우리들은 이 마을에 있는 ‘예담은 규방문화원’에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약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찬환경 전통 천연염색제품 생산과 음시점, 카페를 겸한 이곳에서 우리가 먹은 월출소반은 어란, 야채 샐러드, 무화과 볼가츠, 메론 장아찌를 곁들인 3색 칼라볼(밥) 등으로 구성됐으며 양갱과 음료가 디저트로 나왔다. 모든 음식재료는 영암특산물로 준비했다고 한다. 주인은 우리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까지 준바해 식당에 걸어두고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특산주도 한 잔씩 반주하며 남도 음식 특유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마당의 빨랫줄에 널어놓은 염색한 섬유가 바람에 휘날리는 한옥 카페 잔디밭 그늘에서 쉬고 기념사진도 찍은 후 40여분쯤 달려 강진읍에 있는 김영랑시인 생가를 찾았다. 오후2시반의 뜨거운 햇살을 맞고 있는 김시인 생가 본채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마당과 문간채 밖 담장의 모란은 꽃이 이미 지고 잎만 무성했다. 아마도 삼백예순날은 더 기다려야 새 모란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생가 앞 잔디밭 나무 그늘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생가 뒤쪽 대나무밭과 공원, 모란 온실도 둘러봤다, 그곳엔 아직도 여러 종류의 모란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이어 우리들은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사의재(四宜齋)로 갔다. 유배 온 다산 정약용에게 주막잡 할머니가 내어 줘 4년간 머문 방이다. 이곳에서 다산은 다시 심신을 가다듬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의란 생각, 용모, 언어, 행동을 뜻하며 四宜齋란 이를 올바르게 행하는 사람이 머무는 집이란다. 현재의 초가는 강진군이 고증을 거쳐 2007년 복원한 것이다. 사의재 옆 연못에서 일행은 다산의 높은 뜻을 새기며 기념촬영을 했다. 이 자리에는 정외과 3년후배이면서 강진군수와 이 지역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황주홍동문이 함께 해 더욱 뜻깊었다. 황동문은 현재 건물이나 교량 등 시설물의 디자인 개선을 위한 공공디자인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사의재를 떠나 우리들은 30분쯤 떨어진 월출산 경포차밭 설록농원을 구경했다. 찻잎으로 만든 떡과 시원한 발효차 음료도 시음했다. 무려 20만평이 넘는 넓은 차밭이 검은 부직포 터널 아래 펼쳐져 있어 장관이었다. 농원 관계자에 따르면 요즘 차밭에선 차(茶)를 만들어 마시기 위한 찻잎뿐만 아니라 식용을 위한 찻잎도 생산한다고 했다. 부직포를 덮는 이유도 봄철의 서리에 녹차 새순들의 피해를 막는 동시에 식용 찻잎 생산을 위한 것이란다.
茶 농원을 둘러본 우리는 조선시대 처사 이담로(1627-1701)가 은거를 위해 1670년대에 조성한 백운동 별서원림으로 갔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정원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히는 별서원림은 이담로가 시작해 후에 그의 손자 이언길과 함께 완성했다. 원림(園林)은 일반서원과 달리 화초, 나무, 돌, 물 등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수풀이나 삼림을 활용해 지은 누각이나 정원이다.
울창한 대나무 숲길을 지나 월출산 자락 깊숙한 곳에 주변의 자연과 지형을 최대한 살려 조성한 정자와 고풍스런 집과 정방형 마당이 나왔다. 마당엔 계곡물을 끌어와 돌아나가게 한 자그마한 연못의 유상곡수(流觴曲水)도 있고 수령이 아주 오래된 기품있는 뽕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기록을 보면 월출산을 배경으로 계곡 주변의 지형과 경승요소를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계곡물을 끌어와 만든 연못 등 景觀美와 借景眼目이 우수해 조경사적 가치가 탁월한 곳이란다. 현재도 최초 조성한 사람의 후손들이 11대째 살며 관리하고 있다
특히 바로 앞 월출산 옥판봉의 지세와 아름다움을 그대로 빌려와 지은 정선대(停仙臺)의 뛰어난 경관 등 다산 정약용이 원림 주변의 경치 좋은 12곳을 읊은 글들이 새겨진 표지판도 있어 한국 전통원림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다산은 이 원림을 조성한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을 막내 제자로 삼았다. 우리는 다산이 꼽은 백운동12승경 중 제11경 停仙臺에 둘러앉아 설립자의 11대 종손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며 절경에 취했다. 그 정자엔 초서체 글씨로 멋을 낸 현액이 걸려있었다. 정자에 앉으니 맞은 편 하늘을 가로지른 월출산 능선의 옥판봉 등 주변 봉우리들과 숲이 어우러지는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산의 생각이나 우리들의 생각이 차이 없음을 확인시켜준 순간이었다. 이 원림은 수많은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절경을 예찬한 글과 그림들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 다산의 백운동 12승사, 초의선사의 백운동도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원림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버스로 약 한 시간쯤 달려 만덕산의 백련사(白蓮寺)와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선현들의 자취를 찾아갔다. 오후5시 반쯤 백련사 일주문에 도착하니 초여름 길어진 해도 어느덧 만덕산 능선 너머 하늘에 한발쯤 남아 있었다. 일주문에서 백련사 대웅보전까지 이어지는 길은 동백나무가 울창해 봄철엔 동백꽃 터널이 천하일경 이지만 이미 꽃은 지고 없어 아쉬웠다.
백련사는 한때 번성했었지만 지금은 작은 절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 절 만경루의 현판 글씨 ‘萬景樓’와 대웅전 현판 글씨 ‘大雄寶殿’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조선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또 유배 온 다산 정약용과 교유했던 백련사 혜장선사와의 차ᄉᆞᆼ과 우의도 잘 알려져 있다. 차를 무척 좋아했던 두 분은 다산이 살았던 초당에서 야트막한 언덕 너머 20여분 거리에 있는 백련사까지 수시로 걸어서 오가며 담소하고 차를 즐겼다고 한다. 백련사는 만덕산 동북쪽, 초당은 동남쪽에 있다. 이 만덕산에는 차나무가 많아 다산이라고도 한다.
정약용은 귀양살이 18년 중 마지막 10년을 이 산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호를 다산으로 했다. 그가 살았던 집이 바로 茶山草堂이다. 초당 현판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에서 채자한 것이라고 한다. 초당에서 조금 떨어진 천일각에서 내려다보는 강진만의 잔물결과 그 양편의 보리밭이 이루는 조화도 천하절경이다. 이날 우리가 갔을 때는 마침 보리가 누렇게 익어 황금벌판을 이루고 있어 더욱 아름다웠다. 다산은 이 누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서 흑산도로 귀양 간 형님 정약전을 그리워했단다. 형제는 끝내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우리도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숲길을 내리기 시작하는 땅거미를 벗 삼아 다산과 혜장선사의 자취를 더듬으며 걸었다. 초당 바로 옆에는 다산이 직접 파서 만든 작은 연이 있다. 초당에서 조금 위의 산자락 바위에는 다신의 친필 ‘丁石’ 두 가 새겨져 있어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일행은 초당을 내려와 입구의 초당마을(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전통 찻집에 들렸다. 조그맣고 하얀 정사각형 판에 붉게 ‘다산처럼’이라 쓴 간판이 불을 밝힌 다산문화원이다. 주인은 강진군수를 지냈으며 ‘해설 牧民心書’ 저자이자 다산학 강의를 하는 윤동환씨였다. 그는 우리와 동행한 황주홍동문 바로 앞에 강진군수를 역임했단다. 우리들은 윤원장의 다산에 관한 짧지만 알찬 강의를 들으며 솔향기 물씬 풍기는 이 집 명차 솔잎차와 기타 음료대접까지 받았다. 찻집을 나선 일행은 어둠이 내리는 강진만 해안도로를 30여분 달려 7시30분쯤 식당에 도착했다.
해는 졌지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넓은 잔디밭 안쪽에 잘 꾸며진 화단처럼 보이는 정원이 보였고 정원 오른쪽엔 키가 큰 장송 한 그루가 아직 푸른 빛을 잃지 않은 저녁 하늘을 떠받치듯 서있었다. 정원의 초록잎 뒤로 보이는 길쭉한 단층건물 식당 창안에선 붉은 전등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이곳이 하나정원 이었다. 동행한 황의원과 마을 이장까지 함께 한 저녁 메뉴는 강진군 일대에서 나는 식재료들만 사용한 향토음식이었다. 돼지고기 보쌈과 연잎에 싼 찰밥을 제외한 다른 음식들이 대부분 싱싱한 채소를 사용한 것들이어서 남도음식의 진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몇 잔의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끝으로 첫날 여정을 마침 일행은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로 이동, 시설이 깔끔한 K 스테이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일행 중 몇 사람은 한 객실에 다시 모여 몇 잔의 술을 나누며 그동안의 소식들을 주고받았다.
여행 둘째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월출산이 멀리 보이는 호텔 앞 넓은 벌판을 아침 햇살이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아침잠이 적은 다섯은 보리와 귀리가 익어가는 황금벌판으로 달려나갔다. 아침의 상쾌하고 냉기 품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바둑판처럼 정리가 된 들판을 걷고 달렸다. 중부나 내륙 지방에선 보기 드문 귀리밭이 대부분이었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잘 여문 보리밭에선 그나마 일부가 쓰러져 안타까웠다. 농수로 옆 논두렁과 제방에 피어있는 하얀 찔레꽃은 강한 장미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오전8시 호텔을 출발한 일행은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땅끝마을 항으로 향했다. 강진과 해남의 어름다운 바다와 산들을 끼고 버스는 1시간20분쯤 달려 땅끝마을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노화도 산양항 선착장까지는 대형 도선을 타고 30분쯤 가야 한다. 물론 버스도 그 배에 실어 함께 간다. 선착장 부두에서 땅끝마을기념비가 있는 산을 배경으로 촬영하며 출항을 기다렸다.
그러다 배 출항시간이 약20여분 남았다기에 나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토말비를 보러 갔다. 9년전 봄에 나는 바닷가해변에 바짝 붙어 세워져 있는 삼각형 뿔 모양의 커다란 기념비에 다녀간 적이 있어 다시 보고 싶었다. 시간이 빠듯해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달리기를 반복하며 갔다. 그러나 입구에 가니 공사로 길이 막혀있었다. 할 수 없이 해상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비석이 있는 산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나왔다. 출항시간이 임박해 셋은 1.5km쯤 전력을 다해 달려 1분여를 남기고 가까스로 승선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료들의 속을 태우긴 했지만 우리나라 땅끝에서 마라톤을 한 진귀한 추억 한가지는 만들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을 받으며 배는 잔잔한 바람을 안고 만경창파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모두 선상의 갑판으로 올라와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들과 각종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이 어우러져 펼치는 자연의 향연에 감탄을 연발했다. 여행자만이 이런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법이다. 시원한 해풍도 우리들의 기분을 아는지 살랑거리며 얼굴을 간지러주었다. 갑판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가족, 건강, 자녀교육, 사회현상 등에 관해 한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배가 노화도 선착장에 도착하자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노화도 서쪽 해안을 끼고 내려가 보길대교를 건넜다. 노화도 이포리와 보길도 부황리를 잇는 이 連島橋는 노화도와 장사도를 잇는 보길대교1과 장사도와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2로 구성되며 2008년1월말 개통됐다. 약 30여 년 전 초등학생이던 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왔던 추억이 있는 섬 甫吉島를 버스에 앉아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왔다. 우리는 대교에서 가까운 근처의 부황리 보길 윤선도원림(부용동원림)으로 갔다. 13년간 보길도에 은거한 고산 윤선도가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2008년1월 명승으로 지정된 이 원림은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인 1637년2월 인조가 항복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은거를 위해 제주도로 가던 배에서 이 곳의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머문 곳이다. 원림의 윤선도 기념관에는 당시 그가 했다는 말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는 글이 보길도지에 기록돼 있다는 안내문이 있다. 그 후 윤선도는 평생동안 일곱 차례나 오가면서 어부사시가 등 많은글을 남겼는데 머문 기간을 합하면 13년이란다. 원림에는 흐르는 계곡물을 보를 막아 만든 연못 세연지(洗然池)가 있는데 수위조절이 가능하다. 세연지 가에 단을 쌓아 지은 3칸짜리 정자가 세연정(洗然亭)이다. 자연을 씻는다는 뜻인 洗然이란 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현재 복원된 부용동원림은 고산의 5대손 尹威가 기록한 보길도지를 토대로 했단다. 우리는 정자와 연못, 그리고 주변 걔곡의 풍광 등을 감상하며 선인의 풍류도 함께 느꼈다.
원림을 나와 보길도 서쪽 해안 절경을 감상하며 30분쯤 달려 보길도의 제일 서쪽 정자리 망월봉의 끝자락에 있는 땅끝전망대로 갔다.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파란 수평선 너머 아스라이 추자도와 가도, 상도 등 다도해 많은 섬들이 보이는 해안절벽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해지는 광경과 붉은 낙조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정오 가까운 시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끝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새파랗고 커다란 공안에서 세상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천리길 멀다 않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베푸는 보길도의 멋진 선물에 마음껏 감사하며 그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느라 시간 가는 줄도 잊었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 이틀째 날 오전 일정을 마쳤다.
< 정외과25회 졸업추억여행-2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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