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강산이 여섯 번 변하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건만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뜨거운 우정과 함께 엮은 추억담들이었다. 그 변할 줄 모르는 우정과 추억들이 좋아 우리는 다시 고향에서 뭉쳤다. 몸은 초로의 길에 들어섰고 머리카락은 늦가을 아침 초가지붕의 서리처럼 하얗게 변했지만 그들이 품은 童心이야 어찌 변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초등학교 품을 떠난지 올해로 61년이 됐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을 험한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견디어 낸 소꿉동무들 중 34명이 지난 5월25일 다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우리 초등 동기는 세 학급 210여 명이 함께 졸업했다. 우리는 매년 전국의 경승지를 찾아 정기적이거나 부정기적 만남을 이어왔었다. 그러나 올해의 모임은 고향에서 만났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자주 찾을 수 없었던 고향의 유서 깊은 명소나 경승지를 찾음으로써 초등학교 시절 소풍갔던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나는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6명의 벗님들과 함께 15인승 승합차를 타고 고향길에 올랐다. 모두들 새벽 일찍 준비해 약속 시간에 맞춰 집합장소에 나왔지만 꾸물댄 나 때문에 10여 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그 시간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운전기사는 휑하게 뚫린 경부고속도로를 경유해 당진-영덕고속도로 들어가 신나게 달렸다. 걸어서 가든 차를 타고 가든 여행길은 언제나 신나는 법. 서울지역 모임 회장이 준비해온 맛있는 아침밥과 한 잔의 고급 와인까지 나누며 우리는 고향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잘 달렸던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은 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충청북도 산골지역 지방도로로 들어갔다. 내비게이션의 수신 이상인지 운전기사의 실수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평소엔 경험한 적 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빠르긴 하지만 밋밋하고 재미없는 고속도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시골길의 멋진 경치와 농촌풍경을 감상하는 기쁨이 있었다. 도중에 도로공사로 길이 막혀 들판의 농로를 통과하기도 했다. 그렇게 30분쯤 고속도로 밖의 즐거움을 누린 후 9시40분 쯤 우리는 다시 영동 톨게이트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 남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구름도 쉬어간다는 추풍령 휴게소에 들려 다급해진 생리현상을 해소하고 차도 마시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추풍령 휴게소를 떠나면 바로 고향 성주가 있는 경상북도 땅이다. 김천시를 통과한 승합차는 순식간에 우리를 성주읍 성밖숲 앞에 내려주었다. 서울출발 후 불과 3시간30분 만이다. 서울유학 시절 버스와 완행열차로 7-8시간씩 걸렸던 ‘한양 천리길’의 추억도 생각난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자주 소풍을 갔었던 왕버들 숲길에서 고향의 추억들을 더듬으며 30분쯤 산책했다. 당시엔 이 숲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건천에 가깝던 이천의 둔치 모래밭에 방치된 상태였다. 우리는 하교 길에 가끔씩 그 그늘에서 놀곤 했었다.
이 숲에는 300-500년생 왕버들이 59그루가 있는데 중요성이 뒤늦게 인정돼 1999년4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기록에 띠르면 1380년대에 고을의 지세를 흥성하게 하려고 밤나무를 심었고, 임진왜란 이후 흉사가 잇따르자 왕버들로 바꿔 심었다고 한다. 이 숲은 오랜 세월 마을의 풍치는 물론이고 주민들의 신앙과 생활 터전으로 활용돼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눂다. 이날 다시 보니 주변이 깨끗이 정비된 데다 나무들도 옛날보다 더 생기가 있고 기품있게 보였다. 왕버들은 각 그루마다 번호를 매겨 국가가 관리하고 있었다.
왕버들 숲을 둘러 본 우리는 성주의 또 다른 중요사적지인 세종대왕 자태실로 갔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의 태봉에 조성된 이 태실을 나는 성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소풍때 와 본 후 56년만에 처음 왔다. 그때의 모습은 여러 개의 돌비석처럼 생긴 것들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물론 그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이지만 주변을 정비하고 돌 경계석도 설치했다. 태실 주변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사적지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기록을 보니 세종임금의 왕자18명과 단종의 태실 등 19기의 태실이 설치됐었다.
그렇지만 후에 세조의 단종 폐위를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다섯 대군의 태실은 파괴돼 臺石만 남았단다. 현재는 그 대석들 위에 하얗고 둥근 덮개만 얹혀 있었다. 원래 이 곳엔 성주 李氏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지만 이장시키고 1438년부터 1442년까지 조성했다.이 태실묘는 2003년 사적444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었다. 왕자의 태실이 이렇게 군집상태로 완전하게 보존된 곳은 이곳밖에 없단다. 그리고 자기에게 반대했다고 형제까지 죽이고 그들의 태실까지 파헤쳐야 했던 권력의 비정함과 골육상쟁의 비극도 되새겨봤다. 또 그토록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좌에 올랐던 세조 자신도 말년엔 엄청난 피부병으로 고생하게 되자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며 참회했다니 삶과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케 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빠듯한 일정때문에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태실 수호사찰 禪石寺엔 들리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단체로 기념촬영 후 자동차로 20분쯤 달려 금수면 명천리의 한우전문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고향과 대구에 사는 동창들이 중심이 돼 운영되는 동기회가 마련한 오찬이었다. 모두 34명이 만나 맘껏 먹고 얘기하고 추억과 정담을 나누었다. 그 추억담속엔 엉뚱한 누명을 쓰고 억울한 벌을 받은 얘기까지 나와 다시 한번 웃었다. 환경정리용으로 교실 뒤 칠판에 매달아 둔 감을 누군가가 따먹었는데 강준향과 김수복동기가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한편 이 자리에선 지난 2년간 회장을 맡아 동기모임을 이끌었던 김미자동기에게 꽃다발을 주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가천면 소재지에 있는 단란주점으로 옮겨 함께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도 추며 못다 푼 정담과 흥을 풀었다. 모두가 명창이었고 일류 춤꾼들이었다. 너무 노래를 잘 부른 탓인지 기계의 점수가 후했던지 모르지만 100점 받은 가수가 7명이나 됐다. 그야말로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만 함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 계속 됐다. 이런 게 바로 코흘리개 때 만나 맺어진 죽마고우들의 우정이 아니겠는가?
한없이 계속되는 즐거움을 뒤로하고 갈길 바쁜 서울 친구들 7명은 고향의 선물 참외와 수박을 가슴에 안고 이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왔다. 그 대신 앞으로는 한 해에 두 번씩 만나기로 했다. 서울팀은 도중에 고속도로 금왕휴게소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종점에서 다시 한번 석별의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 참가자 명단 >
■ 성 주 :
이용악 이임선 송화선 이평노 전광도 장판수 배성환 이종훈 이근옥 김순분 최동수 송현분 주봉호 오문일 강준향 이종석 16명 .
■ 대 구 :
최순옥 김미자 김갑순 김성국 이춘옥 김윤옥 이순권 배강호 차인숙 9명
■ 서 울 :
피주환 이영환 김수복 김광순 김나윤 석인호 박춘하 7명 .
■ 부산 : 허상복 1명
■ 기타 : 조상호 1명
합 계 34명입니다
< 2024년5월29일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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