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지리산둘레길 걷기 ②> 운리∼덕산∼위태 : 25.6km
巨儒 南冥의 높은 뜻 새기며 산 넘고 물 건너
‘조심해서 가라’며 집밖까지 나와 전송했지만 민박집 여주인의 눈빛엔 아쉬움이 역력했다. 인적 드문 산간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야만 하는 78세의 아주머니는 우리들이 집밖 울타리를 지나 멀어져 갈 때까지 지켜보고 서있었다. 그런 엄마를 곁에서 쳐다보는 따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침에 들렸다가 우리들이 떠날 때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던 그 딸은 그날도 엄마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일터로 나갔을 것이다. 한참을 가다 되돌아보니 모녀는 빨갛게 익어가는 개량보리수나무 나무 근처에 그대로 서있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7시 반쯤 민박집을 나온 우리들은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는 밭길을 따라 걸었다. 이른 시간이라 길섶의 이슬방울들이 바지자락에 부딪쳐 깨어진다. 고요한 산촌이라 이슬 떨어지는 소리들이 들릴 것 같았다. 물이 그득 담긴 논의 벼 포기들 사이로 비친 건너편 산은 거꾸로 서서 우리를 전송해주었다. 길은 곧 시멘트로 포장된 널따란 농로 겸 임도로 이어졌다. 경사가 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다 이윽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30분쯤을 더 걸으니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길가에 원두막 모양의 쉼터가 나왔다. 그 옆에는 오늘의 여정을 자세히 알려주는 대형 안내판도 있었다. 하늘엔 가벼운 구름이 끼어 걷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잠시 휴식을 한 일행은 다시 시멘트 길을 따라 걸었다. 상당히 힘들다고 느껴질 무렵 길은 비포장으로 바뀌며 숲속으로 이어진다. 아름드리 거목 숲도 지나고 하늘이 안 보일정도로 잎이 무성한 참나무 숲도 지났다. 참나무군락지 안내표지판을 보니 이 일대가 참나무들의 영역임을 알 것 같았다. 안내판엔 <우리 조상들은 좋은 것을 ‘참’이라 불렀고, 참나무의 학명인 퀘르쿠스(Quercus) 또한 라틴어로 ‘진짜, 참’이란 뜻>이라 적혀 있었다. 이 안내판을 통해 ‘참나무’란 이름은 동서양이 서로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류가 전혀 없었던 양쪽 사람들이 어떻게 똑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사람의 느낌은 사는 곳이 달라도 서로 통하는 모양이다.
길은 구불구불 숲속을 누비며 이어졌고, 크고 작은 바위들이 시냇물 흐르듯 넓고 길게 이어지는 너덜지대도 지났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리산의 명소이자 산청의 자랑거리인 백운계곡에 도착했다. 영남의 대표유학자로 退溪 李滉선생과 쌍벽을 이룬 南冥 曺植선생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해발 500m를 훨씬 넘는 백운동 계곡일대의 절경은 백운동 칠현이라 불렸던 영남지방 석학등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어서 곳곳에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갈 길이 바쁜 탓에 안내판에 적혀있는 남명의 시 한 수에서만 그 체취를 느낄 수밖에.< 위 사진 참조>
백운계곡과 멀지 않은 곳에 마근담 마을이 있다. 또 근처에 백운마을도 있단다. 백운계곡에서 2km쯤 되는 마근담 마을까지는 참나무가 무성한 숲길이다. 해발 500m가 넘는 높은 산길인데도 두 마을 사람들이 이 길로 서로 놀러 다녔단다. 사람사이의 정이 그리웠던 산촌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근담 마을근처의 산길에서 빨간 산딸기를 따먹을 때는 고향마을 앞산에서 뛰놀던 시절이 떠올랐다. 반백년이상의 시간이 흘렀어도 달콤한 산딸기 맛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서니 온통 감나무들이었다. 그 후로 걸은 길가나 산비탈에도 온통 감나무들 천지였다. 옛날부터 산청이 곶감으로 유명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감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기에 겨울이 따뜻한 지리산 남쪽사면에 많은가 보다.
그 중 어느 나무에 달린 작은 경고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직사각형 나무판자에 손으로 써서 매단 이 경고판엔 ‘무단으로 열매를 따거나 나무에 해를 끼치면 5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둘레길 길손들에 의한 피해가 적지는 않은가 보다. 둘레길 곳곳에 관리사무소에서 ‘농작물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세워놓은 안내판들이 있는 게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길손 개개인들이야 ‘나 하나쯤이야.’ 하면서 따 갈 수 있겠지만 당하는 주인들로서야 과수원이 통째 거덜 날지도 모른다. 단순히 인심 야박하다고 욕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산자락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시멘트포장 임도는 덕산까지 상당한 급경사로 낮아진다. 굽이를 돌때마다 멋진 절경들이 손짓하는 산이 지리산이다. 그런 길을 6km쯤 걸어 덕산에 도착했다. 덕천강을 따라 형성된 산골의 중심지다. 덕천강은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물을 담고 남강으로 흘러가 낙동강과 합류한다. 이 곳의 덕산장은 지리산 천왕봉 주변의 산청, 하동, 함양 사람들이 만나 유무상통을 했던 곳인데 특히 곶감이 유명하다.
덕산의 덕천강 가에 남명 조식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여러 곳에 산재했던 선생의 유물들을 모아 전시한 곳인데 기념관 외부 마당엔 남명의 석상과 그를 따랐던 신도비가 있다. 그러나 기념관에서 잘 보인다는 천왕봉이 그날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기념관 맞은편엔 남명이 말년에 후학들을 가르치며 사셨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임금의 수차례에 걸친 간곡한 부름마저 뿌리치고 산림에서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다 떠난 선생의 고고한 기상이 곳곳에 스며있는 것 같다. 갑자기 남명의 시한수가 생각난다. 그 시는 어제 지나온 단속사 삼층석탑 근처의 남명시비에 적혀 있었다. 단속사에 들린 율곡 이이선생에게 써준 것이었다.
贈山人惟政 유정 산인에게 준다
花落槽淵石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別時勤記取 이별할 때 잘 기억해 두게나
靑子政堂梅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지금은 늙어 고사 직전에서 새 가지로 살아남은 정당매에 과연 얼마나 많은 매실이 열릴지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다. 남명의 높은 뜻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는 점심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한낮의 뙤약볕이 쏟아지는 지방도로를 1km쯤 더 걸어야 했다. 비교적 큰 마을에 이르렀을 때 갈비와 중국음식을 섞어놓은 것 같은 이상한 이름의 간판이 달린 깨끗한 2층집이 보였다. 오랜만에 중국음식을 먹으려고 들어갔다. 세 종류의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만에 주인여자가 와서 일손이 달린다며 한 가지 음식만 주문해 달라고 했다. 결국 자장면만 시켜 소주 한잔을 곁들였다. 식사 후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 여자는 신라호텔 중식부에서 서빙하다 중앙개발로 옮겨 2년을 근무했단다. 그래서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잘 아는 사람과 일했던 사람임을 알았다. 어쩐지 세련미가 있어 보였다. 세상 참 좁다. 2년 전 남편과 함께 내려와 정착했단다.
그 여자와 헤어진 후 우리는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 남명 기념관까지 약 1km쯤 강을 따라 되돌아 나와 덕천강을 가로지른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러면 2km이상을 질러가게 된단다. 네모난 커다란 돌을 두 줄로 길게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 아스팔트 포장된 지방도롤 걸었다. 한낮의 햇살이 너무 강해 선글라스를 써야만 했다. 아스팔트길은 정말 멀고, 덥고, 지루했다. 뿐만 아니라 그 도로엔 가로수도 별로 없었다.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의 열기에다 달구어진 도로가 내뿜는 복사열까지 가세하니 덥기가 한증막을 방불케 했다. 연신 물마시며 조그만 그늘만 나오면 쉬어가며 걸었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남녘의 산길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걷던 우리를 반겨준 건 중태마을 앞 느티나무 그늘에 마련된 평상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발 벗고 마루에 올라 누었다. 그늘이어서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했다. 평상 바로 앞엔 조그만 단층 건물이 있었다. 그때 70살쯤 돼 보이는 중키의 남자가 그 건물에서 나오더니 우리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마사라고 주었다. 알고 보니 그 곳은 둘레길 관리센터였고 남자는 직원이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는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32년 근무 후 퇴임했고 현재는 중태마을 등 주변마을의 이장직도 6년째 겸하고 있단다. 게다가 그는 우리 일행 중 막내의 사돈과 같은 직장동료였단다. 세 사람만 건너면 모두가 연결된다는 말이 실감났다. 충분한 휴식과 즐거운 얘기 덕에 다시 힘이 솟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오늘 저녁 우리가 묵을 위태마을의 민박집도 직접 전화해 잡아주었다. 그 바람에 나와 동갑내기라던 그가 더욱 좋아보였다.
물통에 물을 가득채운 우리들은 다시 햇빛 속으로 나섰다. 우리들 앞에는 높지는 않지만 고개 두 개와 지루한 포장임도가 있다고 그가 알려주었다. 지방도로를 겸한 길이었기에 자동차들도 꽤 자주 우리를 비켜갔다. 그 때마다 우리는 길옆으로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지친 우리들의 짜증을 돋우는 순간들이었다. 가로수보다 전신주가 더 많아 보이는 길은 꾸불꾸불 고개를 올라가고 있었다. 약간 서쪽으로 난 길이라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바로 비치기 일쑤였다. 모자를 눌러 썼지만 더위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간간이 만나는 숲길이 그나마 즐거움이었다. 길지 않은 대나무숲길도 지났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좀 더 가니 유점마을이란 안내기둥이 우리를 맞아준다. 기둥엔 목적지 위태 3.2km, 덕산 6.5km라 적혀 있었다. 오늘 여정의 3분의2를 걸은 셈이다. 숲이 울창한 산속 길로 들어서니 좀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마침내 오늘 여정 중 큰 고개인 중태재에 올라섰다. 해발 250m쯤 되는 고개지만 1000m 높이의 고개에 올라온 것 같다. 그만큼 지쳐있었던 탓이리라. 중태재를 지나니 내리막길이 계속됐다. 그 내리막길에는 대나무 숲속을 지나가는 200m쯤 되어 보이는 길도 있었다. 600m쯤 더 내려가니 갈치재라는 작은 고개가 나왔다. 그랬지만 저 멀리 위태마을과 들판이 보여 힘들지 않았다. 산길을 벗어날 쯤에는 자그맣고 아름다운 저수지도 있었다. 파란 하늘과 주변의 녹색 숲이 비친 호수는 동화속의 풍경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경사가 급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위태 0’이라고 적힌 들레길 안내기둥이 논두렁에 서있었다. 오늘의 종착지에 왔다. 해는 아직 서산위에 한 발 가량이나 남았다. 소개받은 민박집에 전화를 하니 아직 들에 있다면서 먼저 들어가 있으란다.
‘정돌이’란 민박집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았다. 주인 없는 집에선 커다란 개 두 마리가 반긴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여서 전망이 좋았다. 마당앞 장독대에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전형적 농촌 집이었다. 이 집의 개는 길안내를 잘 해 몇 년 전에 TV방송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10여km 이상 떨어진 이웃마을까지도 혼자 길 안내를 한 후 돌아올 정도로 영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영리했던 개는 이유를 모른 채 1년 전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단다. 개의 실종을 두고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있는 두 마리는 모자간이며 사라진 개는 아버지였단다.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다 잠시 들어왔다는 주인여자는 우리들의 방과 샤워 실, 세탁기 사용 등을 가르쳐 준 후 다시 밭으로 나가더니 해가 진후에 들어왔다. 그리고 차려 내놓은 밥상은 완전히 초원의 용사들만 가득할 뿐 마른 생선 한 마리도 없었다. 센터 직원의 부탁을 받은 사람치고는 성의가 없어보였다. 그에 비해 자기네 자랑은 좀 많았다. 바깥양반은 참 착해 보였지만 아주머니를 보니 다시 들리거나 남에게 소개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다만 밤늦게 쪄서 내 온 감자 맛은 좋았다. 내가 밥을 먹고 나올 때 오늘 캐 온 감자 맛 좀 볼 수 있느냐고 한 말 때문에 삶아준 것 같았다. 어쨌든 그 감지를 안주삼아 막걸리 한 통을 더 달라고 해 한국과 멕시코의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았다. 이래저래 길 걷기 둘째 날 밤의 기분은 축구경기 결과처럼 ‘꽝’이었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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