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산다고 했다.
천하절경 땅끝전망대의 유혹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정오가 가까웠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이 뜨겁게 느껴지자 배고픔도 덩달아 느껴졌다. 이른 아침을 먹고 서둘러 나온 탓이리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아니 먹고 어쩌랴? 다시 버스에 올라 남쪽으로 5분가량 내려가 ‘공룡알’이라고 새겨진 돌비석이 있는 3층 집 앞에서 내렸다.
펜션과 횟집을 겸한 생선회와 해물전문 음식점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집은 음식의 신선도 만큼은 그 어느 집에도 뒤지지 않는 게 자랑거리라고 한다. 이유는 사전에 예약을 받은 만큼만 식재료를 직접 다도해에서 채취해 마련한다고 했다. 일행이 방에 들어서니 깔끔하고 정갈하게 4인용 한 상씩 차려져 있었다. 첫눈에도 맛있겠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고 하는 말이 실감 나는 집이었다. 한 마디 더 붙인다면 ‘음식도 제대로 알고 먹어야 더 맛있다!’.
이날 나는 생선과 해산물 요리에 대해 거의 셰프(chef) 수준으로 박식한 친구 부부와 같은 상에 앉는 행운을 잡았다. 내륙의 벽촌에서 자란 나는 생선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테이블 가운데 커다란 쟁반에 둥글게 차려진 모듬 생선회나 전복, 소라, 굴, 멍게, 밑반찬 몇 가지 외에는 대부분이 생소했다. 이날 친구의 설명을 듣고 보니 생선요리는 부위나 조리방법에 따라 맛과 즐기는 방법이 달라진단다. 해삼의 내장이 그토록 귀하고 맛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소라의 진미가 있는 부위도 알았다. 굴도 맛있게 먹었고 가미를 위해 찍어 먹는 양념도 제대로 알려주었다.
함께 앉은 넷은 커다한 굴의 속을 빼먹고 나서 그 껍질을 술잔으로 사용하며 재미있게 먹었다. 名不虛傳이란 말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한가운데서 맑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먹는 해산물 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는 이날 나온 상차림처럼 모든 음식이 자연산으로만 차려지기는 정말 어럽다고 했다. 잔뜩 차려진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남김없이 비웠다. 정말 멋지고 맛있고 신나는 점심 식사였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이 집과 같은 이름을 가진 근처의 공룡알 해변으로 갔다. 바다로 툭 튀어나온 산자락에서 마을로 활처럼 움푹 파고들어간 긴 해변이 온통 동글동글한 몽돌들로 채워져 있다. 청명석이라는 조금 굵은 그 갯돌들이 공룡알처럼 생겨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인 데다 식사를 한 직후여서 약간의 식곤증까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일행은 울창한 상록수길을 걷거나 시원한 몽돌해변에서 기념사진을 짝으며 삼삼오오 흩어져 쉬었다. 그러다 장난기 심한 한 친구는 다른 친구와 장난하다 바닷물에 빠지기도 했다. 근처 커피점에서 단체로 주문해 온 커피나 음료수도 빠지지 않았다. 복잡한 일상을 떠나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나 역시 사진도 찍었고 햇볕이 잘 들어 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숲길도 걸었다. 언제 다시 와볼 수 있을지 모르는 멋진 해변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신선놀음 후 우리들은 보길도 남쪽의 예송리 해변을 돌아 오전에 지니왔던 노화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오늘의 마자막 행선지는 해남 달마산의 도솔암이다. 공룡알해변을 떠난자 30여 분만에 노화도 신양항에 도착, 다시 도선을 탔다. 배가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약30분 동안 즐거웠던 오늘의 일들을 되새기고 다도해의 바람도 즐겼다. 선착장에 내려 도솔암 아래 버스 주차장에 도착, 택시로 달마산 능선 도솔암 가는 길 입구로 갔다. 택시요금은 1만2000원. 4-5인씩 타고 올라갔다.
택시에서 내려 입구에서 잠시 급경사를 내려 가지만 도솔암까지는 비교적 평탄하고 걷기 쉬운 길이었다. 평균 해발고도는 489m라고 하며 이정표상의 거리는 0.8km였다. 그런데 이 달마산 능선길은 좌우에 펼쳐지는 조망이 정말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도의 금강산, 한국의 산티아고길, 비현실적 비경이라고들 부른다. 우리는 걷기 시작 후 약20분 만에 도솔암에 도착했다. 정말 좌우의 경치는 절경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높고 낮은 봉우리들은 사진에서만 본 금강산 봉우리들과 다름없었다. 왼쪽엔 늦은 오후의 빛을 벋아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 너머로 진도가 보였다. 오른쪽엔 완도쪽 푸른 바다와 산, 들판이 펼쳐졌다.
때로는 비탈진 바위 옆을 조심해서 돌았고, 탁 트인 곳에선 산 아래 들판과 들쭉날쭉 이어지는 해안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용의 등줄기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능선에 비죽비죽 솟은 봉우리들은 용의 비늘처럼도 느껴졌다. 한쪽 신발만 챙겨 동쪽으로 떠난 달마가 머물렀다는 달마산엔 원래 1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훼손됐고 이 도솔암도 임진왜란 때 숨어들었던 왜병들에 의해 소실됐었다가 복원된 유일한 암자란다.
신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경관이 뛰어나다는 기록과 함께 의상대사(화엄조사)가 도솔암(兜率庵)을 창건했으며 미황사를 창건했다는 의조화상이 도솔암 서굴에서 낙조를 즐겼다는 기록만 있고 그 후의 기록은 없다. 다만 소문으로 명량해전에서 패해 퇴로가 끊긴 왜구들이 숨어들어 불탔다고만 전해진다. 어쨌던 2002년까지 주춧돌만 남은 폐사지였다가 그해 6월8일 월정사 법조스님이 법당을 중건했고 2006년엔 삼성각을 지었다. 높다랗게 쌓아 올린 석축 위에 세워져 서양의 옛 성을 닮았다. 주변 풍광이 뛰어난 도솔암은 추노, 각시탈, 마녀도감 등 드라마와 CF촬영지로 각광을 받았다.
5시반쯤 도솔암에서 내려온 일행은 둘째 날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저녁 식사를 위해 강진읍으로 달렸다. 약 한 시간가량 달리는 버스 안에서 친구들은 사회생활이나 사업상 부딪혔던 동창과 친구들과의 각종 애환을 비롯해 성공담과 실패담, 배신감 등 숱한 사연들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예약한 식당 예향은 유명한 남도 한정식집이다. 그런대 우리들이 도착하니 반가운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함께 내려오지 못했던 장문철동기가 KTX열차로 목포에 와서 택시를 갈아타고 먼저 와있었다. 그야말로 친구 따라 강남, 아니 강진까지 달려온 것이다. 우리 모두 박수와 악수로 그를 환영했다.
예향의 음식은 정말 풍성하고 맛도 좋았다. 전남지방의 대표적 음식 홍어회와 홍어무침, 삼합 등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름을 몰라서 물어보기까지 했다. 어떤 음식은 맛이 있어 추가로 주문하기까지 했다. 술을 마시는 친구들은 이 지방 특산 막걸리도 시켜 마시며 여행지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맘껏 즐겼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어두워진 밤길을 달려 숙소에 돌아가 피로를 풀었다.
마지막 날 아침에도 나는 혼자 나가서 전날 걸었던 들길을 걸었다. 가보지 않았던 길로 가서 노거수 느티나무에 매달린 그네도 타보고 달리기도 했다. 태양이 여전히 붉게 비치는 상쾌한 산책길이었다. 우리는 7시40분에 체크 아웃, 아침 식사를 하러 호텔을 떠났다. 강진읍으로 가서 생선과 김, 콩나물국 등으로 아침 식사하고 두륜산 대흥사로 향했다. 이날은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길이 막힐 것이 예상돼 서둘렀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길 주변은 다른 곳보다 봄이 일찍 와서 길게 계속된다고 ‘장춘동’이란다. 예상과는 달리 길이 안 막혀 우리들은 9시쯤 대흥사 가까운 주차장에서 내려 걸었다. 大興寺는 大芚寺라고도 불리며 창건자나 창건연대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거느렸던 승군의 총본영이 대흥사에 있었다. 그후 왜란이 끝난 후 서산대사는 이 절은 삼재가 들어오지 않고 파괴되지 않을 귀한 곳이라며 자신의 옷과 탁발 그릇 등을 이 절에 전함으로써 크게 중흥시켰다. 선조도 특별히 배려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큰 절로 변화됐다고 한다. 경내에는 대웅보전, 천불전, 백설당, 표충사 등 많은 절집이 있다. 특히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고, 백설당엔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편액이 있다. 우리는 천불전 앞에서 마침 부처남오신날을 맞아 절에 들런 전라남도 문화해설사를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천불전은 1811년 화재로 불탄 후 1813년네 중건됐으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천불상은 경주 불석산의 옥돌로 10명이 6년동안 제작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중 풍랑때문에 입본 큐슈에 표류했다가 1818년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됐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 조선의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해서 오게 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천불사 편액도 이광사의 글씨다.
우리는 천불전을 돌아보고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이 봉행되는 대웅보전으로 갔다. 도중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 뿌리가 붙은 연리근을 보았다. 수령이 500년이 넘은 이 두 나무는 자연적으로 뿌리가 붙었는데 두 몸이 하나로 된다는 의미에 비유돼 ‘사랑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뿌리가 붙으면 연리근, 줄기가 붙으면 연리목, 가지가 붙으면 연리지라고 한다. 대웅보전 앞을 흐르는 개천에 놓인 돌다리를 지나 침계루 안에 들어가니 수많은 연등이 걸린 대웅전마당에서 신도들이 의자에 앉아 법요식을 드리고 있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나도 그 순간엔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심이 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복을 곱개 처려 입은 여자봉사자들에게 따뜻한 차도 얻어 마시고 대법당 앞에서 친구들과 가념 사진도 찍었다.
안내자의 재촉을 받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대둔산 아래 멋지게 자리 잡은 절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길옆에 늘어선 수 많은 부도를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에 잠겨도 봤다. 생전의 그와 사후의 그가 똑 같은 산중에 있으니 말이다. 주차장에서부터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속으로 난 산책로는 정말 평탄하고 공기가 상쾌해 다시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을 나와 쉼터에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들은 바우고개, 섬집아기 등의 우리 가곡과 동요를 합창하며 동심에 젖기도 했다. 아름다운 대자연 앞에선 고희를 넘긴 초로들도 어린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해지는 것 같다.
우리들은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을 달려 윤선도생가 녹우당에 도착했다. 그러나 녹우당은 마침 주인이 서울로 출타 중이라 생가와 사당, 유물관이 모두 잠겨 있었다. 우리는 생가 근처에 있는 윤선도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와 생가의 담장을 따라 바깥 길만 돌아야 했다. 집 앞의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해남윤씨 중시조 윤효정의 아들이 진사시험 합격기념으로 심었으며 키가 23m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은행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고산사당 담장밖엔 수령이 300년쯤 된 곰솔이 위풍 있게 하늘로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키가 24m란다. 생가 뒷산의 울창한 비자나무 숲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윤선도 생가는 효종이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는데 효종이 죽은 후 집의 일부를 뜯어와 사랑채로 짓고 ‘녹우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이 고택은 해남 윤씨의 종가이며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돼있지만 지금은 집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른다. 집 뒷산의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 소리가 마치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綠雨라고 했단다. 윤선도의 유물은 물론이고 초상화 등 그림으로 유명한 그의 종손 윤두서의 자화상 등 귀한 유물들은 보지 못했다.
시간은 벌써 11시반을 지나고 있었다. 녹우당을 뒤로하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해남의 유명하다는 맛집으로 달렸다.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헤남군 산이면 ‘신창 손 순대국밥’집이었다. 하도 손님이 밀려와 예약은 아예 받지 않고 도착하는 대로 들어가야 하는 집이다. 인원이 많은 단체라도 네 사람씩 끊어서 들어오게 한단다. 주차장이 꽉 찬 데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도 대표가 대기 번호표를 받고 오래 기다렸다가 테이블이 비는 대로 넷씩 들어가 식사했다. 나도 맨 꼴지로 넷이 짝을 지어 좌석을 배정받아 순대 한 접시와 국밥 한 그릇, 막걸리 한 통을 주문했다. 역시 순대가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그렇지만 순대는 순대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법석을 떨게 된 이유가 뭘까? 이 고장 사람들이 순대를 너무 좋아하고 이 외에 먹을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팀도 막걸리 한 통을 더 마시고 나왔다.
밖에 나오니 먼저 식사하고 나온 친구들은 식당 옆의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내 고향에서는 오래전부터 찾아볼 수 없게 된 보리밭이다. 그러나 내가 고향에서 살았던 10대 시절엔 이맘때가 되면 아버지는 보리타작을 위해 우리들 고사리손까지 빌어야 하셨다. 보리타작은 벼타작과 달리 여름날인 데다 깔끄러운 보리 수염이 땀범벅이 된 몸에 달라붙으면 가려워 정말 괴로웠다 그랬던 보리가 이곳에선 벌판 곳곳에서 익어가고 있어 엉뚱하게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의 색깔이 심상찮게 변하기 시작했다. 식사하러 들어갈 때만 해도 쨍쨍했던 하늘에 갑자기 빠른 속도로 검은 구름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온 하늘을 가려버렸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댔다. 아무리 천변만화 하는 게 자연현상이라지만 너무 빨랐다. 우리는 오후1시20분에 식당을 출발했다.상경 시간 등을 고려해 목포에서의 일정 일부를 취소하거나 변경했다. 당초 들리기로 했던 목포의 유명한 CLB 제과(구 크롬빵)집에는 가지 않고 주문한 빵을 포장해 2시10분쯤 우리가 지나는 길목에서 전달받았다. 그리고 첫날 광주로 와서 우리와 합류했던 대구의 이학병동기도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내렸다. 우리는 목포항 위를 가로지르는 고하대로를 달렸다. 창밖 오른쪽에 보이는 유달산과 그 앞의 목포해양대학교 건물이 우리를 환송하는 것 같았다.
2시20분쯤 목포 톨게이트에서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 30분쯤 달려 힘평천지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군산을 향해 달렸다. 강한 바람이 불던 날씨는 결국 30분쯤 후 부안 근처를 지날 때부터 비가 내렸다. 오전까지만 해도 비 예보는 다른 지방 얘기일 것이라 믿었었는데 말이다. 버스의 대형 TV 화면에서 우리들이 학창시절 애창했던 팝송이나 우리 가요가 흘러나오면 합창하며 비 내리는 고속도로를 즐겁게 달렸다. 그리고 4시 조금 지나 군산의 명소 공감추억 카페에 들려 커피 등 음료를 마시며 쉬었다. 주인은 전직 소방관이고 부인은 은행원 출신인데 15년째 조성 중이란다.
화랑을 겸하고 있는 이 카페의 외관은 시멘트를 주재료로 한데다 추녀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 얕고 편편한 물길도 갖추고 있었다. 얼핏 보면 일본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널찍한 정원과 통유리 벽, 여러 개로 나뉘어 설치된 전시실을 돌며 감상했다. 그리고 비치된 비닐 우산을 쓰고 정원으로 나가니 언덕 아래 펼쳐지는 들녘과 그 너머의 바다 전경도 멋졌다. 그야말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한 폭 같았다. 음료를 마시며 환담을 즐긴 후 우리는 강약을 반복하며 내리는 빗길 고속도로를 달려 8시쯤 압구정동 지하철역 근처 버스 정거장에 내렸다. 김진영동기의 부인이 모두에게 선물한 자연발효식초 홍초 선물세트를 받아들고 빗속의 이별을 했다. 우리들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던 고마운 비였다.
< 끝 >
< 2024년5월24일 >
신안-목포 누빈 韓硏선후배 1 (0) | 2024.06.15 |
---|---|
고향 초등학교 동창회 참가 後記 (0) | 2024.05.28 |
연대 정외과 졸업추억여행-1 (0) | 2024.05.22 |
우이령 트레킹 (0) | 2024.03.28 |
인왕산-백사실계곡 걷다 (0) | 2024.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