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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은 해파랑길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4. 9. 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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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다시 찾은 해파랑길

반대로 걸으니 처음가는 느낌

 
 


< 2024년8월27-30일 : 묵호-울진 >
 


불과 2년 만에 찾아 간 길이었지만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사진도 찍고 그늘에서 쉬며 음식도 먹고 절경을 즐기며 지나간 길이었건만 초행길처럼 느껴졌다.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다면 내 눈썰미 없음을 탓하련만 일행 모두 그렇게 느꼈다고 했다. 안다고 찾아간 우리를 상대방이 마치 초면인 양 본체만체 대했다면 당장 되돌아 왔으련만 상대는 길이었으니 어쩌랴?
 
8월27일오전9시30분쯤 나는 옛시절 젊음을 함께 했던 직장 동료 세 분과 함께 KTX 열차를 타고 가랑비와 소나기가 번갈아 오락가락하는 강원도 동해시 묵호역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 할 때는 흐리기만 했는데 강풍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날 우리는 동해안 해파랑길 750km 전 구간 완보 2주년을 기념해 일부 구간을 다시 걷기 위해 모였다. 다만 이번에는 북행이 아니고 남행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묵호역 대합실에서 단단히 우장을 하고 바람은 우산으로 막으며 1km쯤 북쪽에 있는 묵호등대로 향했다. 이 등대는 일행 중 한 사람이 2년 전 울진의 출발점까지 왔다가 빙장어른 상을 당해 걷지 못한 구간 안에 있다. 우리는 등대에서부터 남쪽을 향해 걷기로 했다. 등대까지는 짧은 거리인데도 빗줄기와 바람이 강해 바지가 몽땅 젖었다. 광활하게 펼쳐질 동해의 만경창파는 운무와 비바람 속에 묻혔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원함은 여전했다. 우리는 하얀 구름을 배경 삼아 하늘 높이 솟은 등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미끄러운 골목길을 조심하며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한 분이 미끄러져 앞무릎에 커다란 찰과상을 입는 수난도 겪었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바람은 계속 시원하게 불어 오히려 우리들의 남행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다시 묵호역으로 내려와 바닷가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을 찾아서 걸었다. 그런데 2년 전에 지나간 길인데 그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물론 걷는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특히 갈림길이나 야산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에선 몇 번씩이나 사방을 살피며 조심해야 했다. 다만 오락가락하는 가랑비와 시원한 해풍으로 덥지는 않아서 좋았다. 날씨가 맑았다면 올여름의 늦더위가 우리를 정말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을 걸어서 우리는 소나무가 무성한 한섬 언덕을 지났다. 그 언덕엔 1968년 울진-삼척 해안으로 침투했던 북한 무장공비 사건의 상흔 일부가 보존돼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전체 해안을 철통같이 막았던 철조망을 2021년6월 철거하면서 교육용으로 일부를 남겨둔 곳이 있었다. 한섬을 지나니 바닷가에 바짝 붙어서 달리는 동해선 철도와 철조망을 경계로 이웃한 해변의 똑 바른 나무 데크 로드가 우리를 반겼다. 이 구간은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 곳이다. 데크 로드를 따라 사각형 프레임을 나선형으로 비틀어 한섬해변 남단까지 잇따라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 길 중간쯤에서 바라보면 촛대바위로 불리는 뾰족한 바위섬이 절벽 아래 수면 가까이 솟아있다. 근처엔 ‘제임스 본드 섬’이란 입간판도 서있었다. 이 바위는 천곡마을 앞에 있는 하대암인데 제임스본드 시리즈를 촬영한 태국 푸켓의 바위를 닮아 그런 별명이 붙었단다. 나선형 사각형 프레임 길 왼쪽 해변엔 채색이 곱게 된 해안침식방지용 테트라포드가 길게 설치돼 있었다. 그 길 남쪽 끝에는 예쁜 솔방을을 소복하게 매단 소나무가 우리에게 잘 가라고 환송해주는 듯했다.
 


한섬해변을 지나 약2시간 반쯤 남쪽으로 걸으니 널따란 전천(箭川)이 나왔다. 개천의 남쪽 둔치에는 길게 이어지는 보행로와 자전거길이 바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 가까운 전천 하구의 북쪽엔 쌍용시멘트 로고가 선명한 거대한 공장시설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걷는 남쪽엔 수많은 소형 배들이 정박해있었다. 바다쪽으로 더 가니 호해정(湖海亭)이란 현판이 걸린 단층 기와집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 앞마당에는 북평지역 유림들이 1947년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안내판이 비에 젖고 있었다. 정자 처마에서 잠시 가랑비를 피하며 쉬고 나서 야트막한 산길을 넘어 50분쯤 가니 동해북평산단 공공폐수처리장 사이로 이어지는 한없이 지루하고 넓은 도로가 계속됐다. 이때가 오후4시20분쯤 된 시각이었다.
 


인도에 떨어져 쌓여 반쯤 부패되고 물에 젖어 미끈거리는 가로수 잎을 밟으며 10여분을 더 가니 널리 알려진 추암해변 이었다. 저 멀리 그날밤 우리가 쉬어갈 솔비치 호텔과 콘도가 예쁜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들은 추암공원과 출렁다리, 데크 로드와 촛대바위 주변 기암괴석들과 절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10여분을 걸어 5시10분쯤 솔바치 콘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약 30분간 쉬며 세수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택시로 삼척시 맛집을 찾아가 가자미 세꼬시와 칼국수로 저녁 식사를 했다. 물론 몇 잔의 반주도 즐겼다. 그리고 리조트 매점에서 생맥주를 사다가 객실에서 해파랑길 완주 2주년 기념 다시 걷기 첫날밤의 여운을 즐겼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식사를 하지 않고 체크 아웃, 7시20분쯤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솔비치 콘도 바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삼척해변의 식당가에서 먹으려던 당초 생각을 바꿔 우리는 계속 남으로 걸었다. 왼쪽에는 동해의 거친 파도와 하늘의 검은 구름이 함께 연출하는 빛의 향연이 정말 멋지게 펼쳐졌다. 하얗게 반짝이는 거친 바다의 윤슬과 구름 사이를 뚫고 그 위로 내려꽂히는 강렬한 햇살의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약 1시간여를 걸어 8시30분쯤 삼척항 정라진에 도착했다. 그리고 2년 전에 들렸던 대구매운탕 집을 찾아갔다. 잘 알려진 이 집의 대구매운탕은 양도 많고 맛도 좋았다. 맘씨 좋은 여사장은 우리가 2년 전 여름에 들렸다고 하니 ‘그때는 세 분이 들렸지 않았느냐?’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맛있는 대구탕과 정갈한 밑반찬에 여사장의 다정다감함까지 섞어 약간 늦었지만 푸짐한 아침 식사를 즐겼다.
 

현재의 부두 모습(위)과 2년전 공사할 때의 모습(아래)


음식점 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항구 입구에 우뚝 선 해일방지용 거대한 시설물을 바라보면서 발길을 재촉했다. 시원한 해풍이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의 열기를 앗아가 시원했다. 삼척항을 지나니 상당히 길고 경사가 심한 한재 고갯길이 나왔다. 약30분을 걸어 우리는 한재 마루에 올랐다. 탁 트인 전망이 일경이어서 나는 이 고개를 기억하고 있었다. 뒤쪽엔 아담한 정라진 포구가 밝은 햇살에 빛나고 앞쪽 아래엔 긴 맹방해변에서 바다로 길게 뻗어 나간 엄청난 접안시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2년 전 사진을 보니 부두처럼 보이는 긴 구조물 가운데 있던 공사용 대형 사각 구조물은 사라졌다. 이 시설은 바로 옆 삼척화력발전소에 자재를 반입하고 반출하는 것 같았다. 한재 정자 아래서 쉬었다가 우리는 다시 남행길에 올랐다.
 


우리는 지난번 북상길에 통과했던 맹방해수욕장 길을 피해 가로수 그늘이 좋은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약 두 시간 만에 맹방해수욕장 남단 근처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삼척군 근덕면 덕산천에 도착했다. 우리는 제방을 따라 널따란 들판을 가로질러 걸었다. 잘 자란 소나무가 멋진 그늘을 만들어 준 곳에서 우리는 2년 만에 다시 앉아 기념촬영도 하고 근처 농가에 들려 시원한 수돗물도 받았다. 달콤한 과자나 양갱 등으로 간식도 했다. 근처에 산재한 축사에서 풍기는 가축분뇨 냄새는 여전했고 사료용 옥수수잎도 여전히 푸르렀다. 그런가 하면 넓은 논에서는 고개 숙인 벼의 황금 물결이 가을의 풍요를 말해주고 있었다.
 


풍경은 한없이 풍요로와 보였지만 인적없는 허허벌판의 제방을 50분가량 걸어 동막리 마을 근처 지방도로에 도착하니 오후1시30분쯤 됐다. 멀리 보이는 음식점과 인터넷 검색해서 찾은 몇 곳에 전화했지만 점심 먹을 만한 집이 없었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가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꽤 먼 거리에 있는 새 7번 국도 고가도로 아래로 달려가 비 구경하며 간식도 먹으면서 비 그칠 때까지 20분가량 쉬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삼척 해양레일바이크 궁촌정거장 근처까지 1시간가량 앞만 보며 걸었다. 정거장 마당의 음식점들은 휴점중이어서 주민들에게 물어 20여분 발품을 판 끝에 늦은 점심을 먹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의 참뜻이 실감 났다.
 


식사 후 우리는 2년 전에 못 탔던 레일바이크를 타러 정거장으로 갔다. 30분 당겨진 출발 시간을 잘 못 알고 여유를 부리다 하마터면 이번에도 못 탈 뻔 했다. 그렇지만 우리 넷은 호흡을 맞춰 한 시간쯤 힘껏 레일을 밟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같은 차에 탄 우리는 함께 페달을 밟으며 궁촌에서 용화까지 5.4km를 달렸다. 해안 절경도 지났고 어두컴컴한 터널도 통과했다. 그런가 하면 화려한 조명과 미디어 아트쇼까지 펼쳐지는 터널도 신나게 달렸다. 오르막 구간에선 힘모아 밟았고 내리막에선 과속방지 브레이크로 속도를 조절하고 소리치며 달린 50여분 이었다.


용화역 광장에서 함께 기념촬영 후 숙소인 펜션으로 갔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약간 쉰 후 함께 석양이 사위어 가는 펜션 뒤쪽 언덕길을 지나 장호리로 갔다. 주민에게 물어 한 음식점에 들어가 돼지고기 수육과 막국수로 저녁 식사를 했다. 남자 종업원은 매우 친절했지민 막국수 맛은 정말 형편 없었다. 식사 후 넷이 옹색한 펜션방에서 함께 자며 피로를 풀었다. 이날 우리는 어림잡아도 29km, 43,000여 걸음을 걸었다.
 


사흘째 아침식사는 간밤에 준비한 라면과 햇반으로 해결하고 7시20분쯤 남행길에 올랐다. 레일바이크 용화역을 지나 호산 버스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용화에 있는 해파랑길 안내도의 지도상 거리는 22km라고 했다. 그 사이 아칠목재라는 길고 힘든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안내판의 지도에 해파랑길이 2년 전 걸었던 길보다 더 먼데다 깊은 산중인 검봉산자연휴양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8시40분쯤 아칠목재를 넘었다. 그리고 조금 내려와 검봉산 길을 버리고 우리가 2년전 지나왔던 들판길을 지나 임원항으로 걸었다. 10시쯤 임원항 포구에 도착하니 바로 옆 수로부인헌화공원의 동상이 가랑비에 젖고 있었다. 임원을 지나 20분쯤 가다 우리는 또 어제 오후처럼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새 7번 국도 고가도로 아래에서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소낙비는 곧 그쳤고 우리는 한없이 계속 되는 옛 7번 국도를 걸었다. 4차선으로 확장된 새 7번 국도가 생기는 바람에 이 길은 비교적 교통량이 적다. 그렇지만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은 모두 빗물을 옆으로 길게 튀기며 맘껏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지겹게 이어졌다. 길가의 꽃사과를 닮은 가로수의 작고 동글동글한 열매들은 아직 덜 익어 붉은 색깔이 제대로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길을 발이 아프도록 걸어 약 2시간 반가량 지난 오후1시쯤 호산에 도착했다. 공사 때문에 길표지 리본이 없어져 수시로 앱을 열어 검색했고 잘 못 든 길로 가기도 했다. 호산의 번화가 음식점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김치찌개와 고등어찜을 시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김치찌개야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고등어찜은 큰 미꾸라지찜으로 느껴질 만큼 빈약했다. 어쨌든 시장기의 힘을 빌어 식사하고 버스터미널 맞은편 해파랑길 28코스 안내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인 울진군 북면 부구삼거리까지는 갈령재라는 힘든 고개를 넘어야 하는 난코스다. 2년 전에는 아예 이 산길 구간을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 조금 질러서 지나갔었다.
 


버스터미널 앞을 지나 우리는 해파랑길 안내 리본에 의지해 힘차게 걸었다. 약1시간 만에 도착한 산자락 마을에서 갑자기 사라진 리본을 찾느라 한 바탕 헤맨후 겨우 길을 찾아 올라가니 이 길은 지난번 우리가 피했던 산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결국 능선까지 올라갔다. 주변은 2년 전 초봄에 발생했던 울진산불의 화마가 휩쓸고 간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탄 나무들은 잘려서 그루터기들만 남았고 주변엔 새로 심은 어린 나무들이 겨우 살아 있었다. 산길 구간을 그대로 걸으려면 힘도 들뿐더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우리는 결국 왼쪽 산 아래로 지나는 국도로 내려가 대중교통편을 이용해 오늘 목적지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쉬울 줄 알았던 도로까지의 하산은 깎아지른 듯한 경사나 낭떠러지에 막혀 몇 차례나 실패를 하고서야 겨우 내려갈 수 있었다. 가파른 산비탈을 헤매고 경사 심한 길을 힘겹게 내려오느라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우리는 북쪽으로 내리막인 도로를 따라 조금 북쪽으로 가 월천리 마을회관 앞에서 콜 택시를 불렀다. 언제 올지 모를 시골버스를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초 계획은 부구삼거리까지 버스로 가서 택시를 부를 생각이었으나 우리는 부구삼거리를 지나쳐 경북 울잔군 북면 덕구온천 콘도까지 직행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오후3시45분에 셋 째날 걷기를 마치고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며 피로를 풀 수 있었다. 한 시간 넘게 뜨거운 온천탕에서 호사를 누린 후 우리는 10분쯤 걸어서 돼지오겹살 맛있게 하는 음식점에서 소주와 맥주 반주 곁들여 푸짐한 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콘도 2층에 최근 개장했다는 수제 맥주 홀에서 다양한 종류의 시원한 맥주로 뒷풀이까지 깔끔하게 했다. 한 마다 덧붙인다면 이날 저녁식사와 맥주집 경비는 막내 도반(道伴)이 부담했다. 그리고 최근 금주급 절주를 강행하고 있는 저도 따가운 눈총을 못 이겨 소주와 맥주를 두어 잔 마셨다.
 


마지막 날 아침 7시30분 우리는 다시 택시를 불러 부구삼거리로 나갔다. 그곳은 2년 전 북행때 우리가 들렸던 맘씨 곱고 상냥한 여사장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옥호도 착한 사장을 닮아 웃음을 띨 듯한 ‘빙그레식당’이었다. 우리를 알아 본 사장은 반갑게 맞아주었고 주문한 음식 외 막걸리도 한 통 서비스로 내놓았다. 아직도 그녀는 사회봉사를 위한 헌금을 계속하고 있었고 아들은 이천에 있는 회사에 취직도 했단다. 사장의 전송을 받으며 나와 근처에 있는 28코스 남단이자 27코스 북단인 안내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남으로 걸었다. 우리는 오전에 죽변 등대까지만 가서 걷기를 마감하고 상경하기로 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강하게 불어 아주 선선했다. 20분쯤을 남으로 내려오니 오른쪽 산기슭엔 시커멓게 불탄 고사목들이 그대로 서있어 화마의 피해를 실감했다. 힌구름 둥둥 떠가는 파란 하늘 아래 일렁이는 초록의 물결을 비집고 펼쳐져 있는 검은 상처에 마음이 아팠다. 30분쯤 더 남으로 내려오니 해파랑길은 도로 오른쪽 야산으로 이어졌다. 왼쪽에는 파란 동해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길 오른쪽엔 결실을 향해 가는 옥수수밭의 초록색 물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은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태풍 때문인지 무척 강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나서 다시 걸었다. 등대 바로 아랫쪽 언덕의 바다 쪽에 무성한 시누대 숲이 있고 그 사이로 터널처럼 난 길입구 대문엔 ‘용의 꿈길’이라고 큼직하게 가로로 씌어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오전11시20분 울진의 죽변 등대 앞에 섰다. 청명한 하늘과 짙은 녹색에 가까운 바다가 하늘로 우뚝 솟은 등대를 감싸고 펼쳐져 있었다. 우리도 공원의 그늘집 마루에 앉아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신선처럼 쉬었다. 이날 우리는 약12km를 걸었다.
 


한참동안 넋 놓고 쉰 후 택시를 불러 울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12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대합실 바로 옆 건물 간이 뷔페식당에 2년 만에 다시 들렸다. 2년 전 6월엔 음식 남겼다고 1,000원씩 벌금을 받았고, 그로부터 석 달 후엔 비바람 속에 조심해서 걸으라며 술 한 병을 서비스 해주던 여사장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들어서니 사장의 눈썰미기 또 한 번 빛을 발휘해 우리를 반겨주었다. 눈썰미 없는 나로써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고, 사장은 주문한 음식 외 덤으로 장터국수와 소주 한 병까지 서비스로 내놓았다. 이런 게 오가는 인정이고 길손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리라. 주막집 막걸리에 목을 적시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우리는 먹고 한 잔의 소주를 마셨다. 이번 여정에서도 훈훈하고 변함없는 인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우리 넷의 우정과 건강 역시 변함없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프리미엄 고속버스로 5시20분 동서울터미널에 도착, 구수한 감자탕에 한잔의 반주로 저녁 식사를 겸한 해단식을 했다.

                  <  2024년9월8일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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