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곰배령에 올랐다. 온갖 야생화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하늘의 꽃밭, 天上의 花園을 기대하며 올랐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결국 비까지 살짝 뿌렸지만 개의치 않고 올라갔다. 그곳에 피어있을 온갖 예쁜 여름꽃이 반갑게 맞아주리라 생각하면서 산길을 걸었다. 산행로 입구 귀둔리 곰배골에서 곰배령까지 약 두시간에 걸친 등정은 그래서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다 말다를 거듭하는 비를 나는 창 넓은 모자와 등에 맨 가방으로 가리고 꽃을 보려는 일념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대했던 야생화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일찍 핀 보라색 붓꽃과 이름 모를 하안꽃 몇 송이들만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그에 반해 곰배령 표지석 부근 넓찍한 풀밭에 설치된 나무 데크 길엔 야생화를 보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곰배령은 해발 1,000m가 넘기 때문에 야생화 개화기는 7월중순부터 8월 한달이 절정기란다. 아쉬운 마음이야 한이 없었지만 어쩌랴? 데크를 가득 매운 사람들의 마음속에 펼쳐져 있을 화원을 생각하며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만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그렇다고 아쉬움만 안고 내려오진 않았다. 야생화는 피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장관이 힘들여 올라온 산꾼들을 환호하게 해주었다. 일반인들에게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있다면 곰배령에 오른 산꾼들에겐 '야생화 대신 운무에 가린 남설악의 멋진 산너울'이 있었다. 산과 산 사이로 파고든 하얀 운무와 그 운무 너머로 겹겹이 펼쳐지는 산줄기들과 솜처럼 피어오르는 하얀 구름의 향연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말 대자연이 넓다란 하늘을 도화지 삼아 아름답게 그려낸 웅장한 채색동양화였다. 다만 그 그림에 낙관은 찍혀있지 않았다.
연일 계속되던 초여름 폭염이 잠시 물러가고 비가 내렸던 지난 주말(6월22일) 내가 나가는 교회의 산우회원들과 강원도 인제군 곰배령에 다녀 왔다. 말로만 수없이 들었을 뿐 가보지 못했던 그곳의 아름다운 야생화가 보고 싶어 함께 나섰다. 새벽같이 일어나 달려 온 산꾼들은 대형 버스와 18인승 승합차 한대에 분승, 아침 식사도 차안에서 해결하며 달려 약 세시간만에 곰배골 탐방로 입구 인제군 귀둔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입산에 앞서 인솔자의 힘찬 구령에 맞춰 준비운동까지 철저히 한 산행은 잠 오랜만이었다. 곰배령 산행은 사전에 예약한 사람들만 입산이 가능하다. 산행로는 평탄해서 오르기 쉬운 강선마을쪽 탐방로와 그 보다는계곡길과 경사구간이 짧지만 난이도가 조금 높은 귀둔리 곰배골 탐방로가 있다. 우리는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분소를 통과해 곰배골 탐방로에서 올랐다.
안내소를 지나면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원시림 우거진 길은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잔뜩 흐려 당초의 일기예보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산행로는 깊거나 넓진 않지만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완만히 고도를 높이며 이어졌다. 안내판 지도를 보니 입구의 점봉산 분소에서 곰배령까지 약3.7km, 오를 때 소요시간은 120분으로 표시돼 있었다. 길은 한 사람아 겨우 비켜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 인데다 도중 몇 곳엔 나무계단이나 데크 로드가 설치돼 있었다. 앞 사람만 보며 30분쯤을 올라갔을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뭇잎이 무성해 별로 비를 맞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일행 중 일부는 잽싸게 우장을 하거나 우산을 받고 걸었다. 나는 그냥 내리는 비를 즐기며 걸었다.
도중에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자그마한 예쁜 계곡에선 사진을 찍었고 쓰러져 누운 아름드리 고사목 앞에서는 만물의 生滅에 대한 섭리도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엔 온통 파란 잎으로 치장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초여름의 진록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저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절대자의 위대함에 대한 경외심( 敬畏心)만 가지고 걸었다. 비교적 완만한 길이었지만 마지막 1km쯤을 남기고 상당히 가팔라졌다. 일행은 그즈음 쉼터에서 잠시 쉬고 넓직한 풀밭이 보이는 능선으로 올랐다. 입구에서부터 약 두 시간 정도 걸렸다.
가파른 길을 올라서니 비교적 넓직한 풀밭이 펼쳐졌다. 풀밭의 정면엔 꽤 높은 산봉오리가 우뚝 서있었지만 그 이름은 모르겠다. 그런데 기대했던 야생화들의 외침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나무 데크 길을 따라 늘어선 끝 간 데를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이어진 행렬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처음엔 행렬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행렬이 줄어들지 않아 생각을 바꾸었다. 대열에서 벗어나 앞으로 가서 보니 곰배령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그런 대열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마침 사진 촬영을 끝내고 기분 좋아하는 사람을 잡고 살짝 옆에서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그 곳을 벗어났다. 뒤로는 끝없는 행렬이 한 없이 늘어서 있었다.
데크 로드는 표지석을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방통행 길이었다. 나는 원점을 향해 가면서 오른쪽 하늘에 펼쳐져 있는 장관을 봤다. 대자연이 하늘에다 그려 놓은 그 멋진 산너울과 구름의 협연을! 우리 일헹은 저마다의 느낌들을 간직하고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쉼터에 모여 간식을 나누고 기념촬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쉼터에서 내려다보는 야생화 초원의 광경은 정말 장관아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날엔 데크 로드에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밖엔 보이자 얺아 아쉬웠다. 우리는 다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귀둔리 주차장으로 하산했다. 그런데 잠시 멈추었던 비가 하산길에 들어서자 제대로 퍼붓기 시작했다. 곧 그치기를 기다리며 걷다보니 어느 새 온통 비에 젖어버렸다. 이상한 오기가 발동한 탓인진 몰라도 내쳐 걷는 바람에 온통 젖어 물에 빠진 새양쥐 꼴이 되어버렸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염치를 무릅쓰고 공원관리공단 점봉산 분소로 달려가 양해를 구하고 그 사무실 화장실에서 준비해 간 마른 옷으로 갈아 입어 감기를 막았다. 그리고 뒤늦게 내려 온 일행을 기다려 함께 예약해 둔 인제읍의 어느 음식점으로 갔다. 모두들 비에 젖은 뒤 인지라 강원도 특산의 돼지고기 김치찜에다 따끈한 국물 맛에 정신을 놓고 허기를 달랬다. 이건 정말 맛 있는 메뉴였기 때문이었지 '시장이 반찬'이란 말과는 상관이 없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이었고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여사장님이었다. 식사 후 우리 일행은 한 시간 여를 달려 양양의 하조대 해변으로 갔다. 비는 그때끼지도 약하게 내리고 있었다. 저마다 비오는 날의 해변을 거닐었고 삼삼오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길 떠나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맘껏 즐겼다. 그리고 5시40분쯤 모두들 버스에 올라 서울로 달렸다. 그때에서야 비는 그쳤다. 이렇게 해서 이날도 새로운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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