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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登頂記

등산이야기

by 솔 뫼 2024. 1. 2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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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의 눈보라는 사나웠지만

눈길-얼음길 헤쳐 온 보람 만끽

 
 

급경사의 빙판길을 지나 눈보라치는 백운대에 올랐다.


해발 836m의 산 정상엔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왕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하도 강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눈송이들은 수평으로 날아와 얼굴을 때려댔다. 추위에 빨개진 얼굴이 사정없이 때려대는 눈송이들 때문에 따끔거렸다. 말로만 들었던 사막의 모래폭풍이 이랬을 것 같다. 수십 년째 등산을 즐겼지만 이처럼 강한 눈보라를 당해 본 기억은 없다. 지호지간에 있는 주변 봉우리들도 희미하게 보였다. 쉴새 없이 빠르게 펄럭이는 태극기가 하얀 하늘에 선명했다. 백색의 바위 봉우리에 올라선 등산객들의 알록달록한 옷차림이 은세계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눈과 얼음의 벽을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풍경이고 묘미기도 했다.
 


잔뜩 흐렸지만 봄날처럼 포근했던 지난 20일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젊은 시절 같은 회사에서 근무한 두 동료와 우이역에서 10시에 만나 도선사 주차장으로 걸었다. 도중에 차량통행이 빈번한 포장도로를 피해 산자락에 개설된 데크 길로 걸었다. 백운대로 오르는 산행로는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일기예보는 낮 한때 빗방울이 듣거나 눈발이 날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람 한 점 없는 데다 춥지도 않아 껴입은 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걸었다. 몇 차례 내렸던 눈이 등산로 주변엔 조금씩 남아 있었지만 길 바닥에는 거의 없었다. 사나운 돌부리들을 조심하며 조금 오르자 덥게 느껴졌다. 천천히 이야기하며 1km쯤 걸어 40여 분 만에 하루재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고개를 경계로 눈이 없었던 길은 하얀 얼음판으로 돌변했다. 쌓인 눈이 밟히고 얼어서 생긴 빙판길이었다. 주변 산자락도 온통 하얀 눈에 덮였다. 바람도 상당히 세게 불었다. 겨울 등산의 필수품 아이젠을 단단히 신고 스틱도 꺼내 길이를 조절했다. 방한을 위해 목도리와 귀마개까지 하고 눈과 얼음으로 미끄러운 산길로 들어섰다.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길이 북한산 특수산악구조대 사무실까지 10분쯤 이어졌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백운대의 우람한 바위가 우리를 손짓하듯 머리 위로 보였다.
 


이정표를 보니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까지 불과 1.2km다. 그렇지만 백운대 공식 높이는 836.5m이니 그 가파르기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었다. 잠시 쉬며 기념촬영도 하고 숨 고르기도 한 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는 법"이라고 옛 사람은 말했다! 밟히고 꽁꽁 얼어 반들반들해진 길 위에 다시 내린 눈이 겹겹이 얼어붙은 길이었다.


길이 무척 미끄러워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아이젠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를 벗삼아 스틱의 뾰족한 끝을 힘껏 찍으며 걸었다. 바위가 가로막은 길은 돌아갔고 계곡을 건널 땐 눈과 얼음이 붙은 징검돌을 조심해서 디디며 갔다. 경사가 심한 곳에는 튼튼한 나무 계단이나 철제 계단이 설치돼 있어 우리를 안전하게 해주었다.
 


올라도 올라도 온통 하얀 눈길이거나 반들반들 다져지고 꽁꽁 언 얼음판 길이었다. 경사에 버티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에쓰느라 다리의 피로가 심하게 느껴졌다. 방법은 오직 천천히, 쉬엄쉬엄, 계속 올라가는 것뿐 이었다. 그러나 숨이 차면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만 쉬어가면서 올라갔다. 또 좁은 빙판길에서 하산하는 사람을 만나면 비켜주면서 쉬었다. 그런 와중에 아이젠도 착용 않고 올라왔다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하얀 눈 모자를 쓴 주변의 바위들이 잘 빚은 조각 작품들 같았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백운대피소에 도착했다. 하루재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이었다.
 


지나간 날 이곳에서 팔았던 파전이나 도토리묵, 라면 등이 많은 산꾼들을 즐겁게 해 준 산장이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 해발 650m에 1924년 세워진 이 산장은 우리나라 제1호 산장으로 수많은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아오다 2019년 국가에 귀속됐다, 지금도 산장 마당엔 옛적의 목제 테이블과 걸상들이 그대로 남아 산꾼들을 편히 쉬게 해준다.


우리도 거기에 앉아 준비해 간 간식들과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었다. 쉬는 사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백운대를 향해 출발할 때는 센 바람과 함께 본격적으로 내렸다. 산장을 지나니 경사는 더 심해졌고 무척 미끄럽기까지 했다. 북한산성의 위문까지 거리가 등산안내도에는 200m로 돼있지만 오르는데 무려 30분가량이나 걸렸다.
 


위문을 통해 구파발쪽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는 가히 태풍 수준이었다. 기온도 한겨울답게 내려가 잠시 서 있으려니 몸이 떨렸다. 근처에 있던 여자등산객에게 부탁해 위문을 배경으로 셋이 기념촬영을 했다. 거기서부터 백운대까지는 그야말로 수직에 가까운 암벽이다. 쳐다보기에도 아득하다. 그때 다른 등산객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우리의 登頂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누군가가 그들 일행에게 “여기까지 와서 안 오를 거면 왜 올라왔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안전을 위해 튼튼한 쇠줄이 정상 바로 아래까지 여러 곳에 외줄 또는 두 줄로 설치돼 있다. 모두 그 쇠줄을 잡고 강풍과 추위에 맞서며 암벽에 달라붙어 꼭대기로 향했다. 등산 스틱 손잡이 끈을 손목에 걸고 장갑 낀 손으로 쇠줄을 잡고 오르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나마 단단히 등산화에 묶인 아이젠이 든든한 받침대 역할을 해 주었다.
 


천신만고(千辛萬苦)란 말이 이때처럼 실감 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강풍에 날린 눈송이들이 모래알처럼 날아와 얼굴을 때려대는 데다 쇠줄을 잡은 손도 아팠다. 그렇게 힘들게 정상에 오르니 이제는 강약을 반복하는 강풍 때문에 꼿꼿이 허리 펴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곳곳에 얼음과 눈이 쌓인 비탈지고 둥글넓적한 바위여서 매우 위험했다. 한참이나 순서를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셋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백운대 정상의 태극기 앞에 서 본 지 정말 오랜만이다. 맑은 날이었다면 서울 주위의 모든 산을 한눈에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국기 게양대까지는 2-3m쯤 떨어졌지만 사람들이 많아 우리는 촬영 후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사나운 눈보라와 맞서며 가파르고 미끄러운 바윗길을 쇠줄에 의지해 내려오는 것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중간중간 있는 좁은 빈터에서 잠시 쉴 때 만난 남자등산객도 ‘이처럼 강한 눈보라를 맞기는 처음’이라 했다. 미끄러운 급경사 길을 내려오기는 오르기보다 훨씬 위험하다. 발아래를 조심하며 서두르지 않고 주변의 설경을 감상하면서 내려왔다. 산장을 지날 때쯤엔 눈도 그쳤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3시30분. 우이역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5시간30분 만이다. 약간 비탈진 도선사 길을 걸어 우이역으로 향했다. 도중에 길옆의 어묵 가게에서 어묵과 따끈한 국물에다 못 마시고 갖고 내려온 막걸리로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좀 더 내려와 길옆의 2층 음식점에서 두부전골과 해물파전으로 뒤풀이 겸한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음식 맛이 좋아 다시 들리고싶은 집이었다. 힘들고 위험했지만 모처럼 만에 겨울 산행의 참맛을 맘껏 즐긴 하루였다. 모두가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시 오르고 싶다는 말들을 하면서 헤어졌다.
 

 

< 2024년1월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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