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山의 품에서 神仙처럼 놀다
그것은 차라리 풍우(風雨)와 벗한 한 편의 신선놀음이었다. 발아래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욱한 구름바다. 그 바다 위로 안개비를 품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더 올라갈 데가 없는 곳-지리산의 정상 천왕봉이다. 그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선 표지석의 전면엔 ‘천왕봉 1915m’. 후면엔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검은 글씨가 암각 돼 있었다. 그곳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당초 희망했던 천왕봉 일출광경을 못 보긴 했지만 전혀 후회가 되지 않는다. ‘일출의 장관(壯觀)’ 못지않은 또 다른 장엄(莊嚴)함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하기만 했다.
여행의 재미는 준비할 때 느끼고 등산의 참맛은 올라갈 때 느낀다고 했다. 이 말에 적극 동의하며 나는 오랫동안 꿈꾸었지만 실천하지 못 했던 일을 결행했다. 그것은 2016년5월 친구 두명과 함께 한 3박4일간의 지리산 종주산행이었다.
지리산은 남한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산이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에 걸쳐있는 데다 최고봉 천왕봉은 해발1915m로 한라산 다음으로 높다. 그 밖에 1,500m를 넘는 준봉들이 부지기수다. 이처럼 넓고 높은 산인만큼 등산로도 셀 수가 없이 많다. 우리 셋이 다녀온 종주코스는 그 중 화엄사에서 천왕봉 오른 후 대원사입구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 길은 흔히 ‘화대종주 코스’로 불리며 중간 보급 없이 할 수 있는 국내 등산로 중 가장 긴 정통적 코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성삼재로 가서 장터목산장 거쳐 손쉬운 경남 산청군 중산리로 하산한다.
지리산 종주는 산장의 예약이 관건이다. 그중에서도 장터목산장의 예약은 특히 어렵다. 다행히 주중인 5월9일과 10일 벽소령과 장터목산장을 예약했고 걱정했던 휴일(8일)의 노고단산장도 우리에게 품을 내주었다. 일행 중 한국등산학교까지 이수한 친구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준비를 철저히 마쳤다.
<첫날> 서울에서 노고단 산장까지
우리들은 5월8일 아침8시 서울 남부버스터미널에서 구례행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전주-순천고속도로를 달려 11시에 우리를 구례중앙버스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화엄사입구 시설지구로 향했다. 택시기사가 소개해 준 음식점에서 각종 산나물 향기가 물씬 풍기는 비빔밥으로 이른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걸어서 명찰 화엄사로 향했다. 도로 옆을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고 신록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아기들 손처럼 부드럽고 예뻤다.
화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부처님 오신 날에 대비한 화려한 연등으로 덮여있었다. 절 마당의 우물에서 흘러넘치는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며 새로운 기운도 함께 담았다. 대웅전 서편의 각황전(覺皇殿) 마당에 올라 절집 전체의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화엄사 경내를 구경한 후 12시50분쯤부터 3박4일에 걸친 지리산 종주산행을 시작했다. 이정표엔 첫날 종착지인 노고단고개 7.0km가 적혀있다. 천왕봉까지는 물경 32.5km란다.
작은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시작된 산행로는 중간지점에 이르자 경사가 심한 돌밭 길로 바뀌었다. 새 소리와 계곡물 소리는 경쾌하게 들렸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무게 10kg쯤 되는 배낭이 ‘더는 못 간다.’며 뒤로 당기는 것 같다. 생전 처음 사용하는 등산용 스틱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팡이의 힘을 빌어 한 발, 또 한 발 밀어 올린다. 그리고 등산로 옆 폭포수에서 손을 씻고 육포와 초콜릿으로 체력을 보충했다. 중재를 지나서 노고단고개에 가까운 코재까지는 짧은 거리이지만 그야말로 수직상승에 가까운 경사여서 코가 닿을 듯하다. 그래서 ‘코재’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코재에 오르니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통하는 넓은 길이 나온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비상도로다. 바로 그 옆이 노고단산장. 해발 1400m가 넘는 곳이다. 화엄사를 출발한지 꼭 세시간만이다.
산장에서 입실 신고를 하고 저녁 식사거리로 라면과 햇반을 샀다. 그런데 그 날 올라가려던 노고단에는 출입제한시간이 지나 가보지 못했다. 오전10시부터 오후 3시30분까지만 입산이 허용된다고 했다. 아쉽지만 노고단은 쳐다만 보고 지나쳐 갈 수밖에 없게 됐다. 일찍 올라온 덕에 산장 취사장에서 좋은 장소를 잡아 저녁을 지어 산행 첫날 저녁을 자축했다. 식사 후 어둠이 밀려오는 산길을 산책한 후 산장의 딱딱하고 좁은 침상에서 매트리스와 담요의 힘을 빌려 잠을 청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내는 소음과 불편함 때문에 산장의 첫날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둘째 날> 노고단산장서 벽소령산장까지
선잠을 자다 새벽에 나와보니 가랑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세게 불어 고산지대의 변덕 심한 날씨를 실감했다. 누워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 배낭을 챙겨 취사장으로 갔다. 라면에다 햇반을 넣어 끓이니 밥맛과 국수 맛에다 뜨끈한 국물까지 즐길 수 있는 일품요리가 됐다. 이번이 다섯 번째 종주산행이라는 산사나이 친구는 조리와 설거지 솜씨도 단연 선험자였다. 식사 후 6시20분 산장을 나와 벽소령으로 향했다. 이번 산행 중 이 구간이 14.1km로 가장 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람막이로 가리며 빗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비는 곧 그쳤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심한 운무가 수시로 지리산 주능선의 절경들을 삼키는 게 아쉬웠다. 그렇지만 구름이 걷히면 홀연히 다가오는 기암절벽의 장관들. 우거진 숲과 꼿꼿하게 하늘로 치솟은 고사목들의 절묘한 조화에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이거야 말로 신선이 구름위에 그려 놓은 수묵화가 아닐까? 사람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걸작중의 걸작 앞에서 나는 할 말은 잊었다. 역시 지리산은 명산(名山)이고 영산(靈山)이었다.
돼지령, 임걸령, 노루목 등 고개와 굽이마다 만나는 비경들이 산행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바다처럼 피어오르는 구름과 능선,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대자연의 조화에 환호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반야봉에도 올랐다. 반야봉은 주능선 길에서 1km쯤 벗어 난데다 경사가 심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봉우리다. 우리는 길목의 삼거리에 배낭을 놓아둔 채 가파른 길을 20분가량 힘겹게 올라가 해발 1,732m의 반야봉에 도착했다 . 고산지대여서 뒤늦게 핀 진달래가 주변을 붉게 물들였고 대나무처럼 쭉쭉 벋은 구상나무 군락은 굽힘을 모르는 민족의 기개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사진속에 반야봉을 담은 후 삼도봉(三道峰)으로 향했다.
이 삼도봉에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는 서로 만나 겨레의 화합과 무궁한 발전을 다짐하는 듯 했다. 삼각형 뿔 모양의 표지석 삼면에 씌어있는 세 도의 이름이 정겹게 보였다. 삼도봉은 전면과 좌우가 확 틔어 길게 벋어 내려간 지리산의 계곡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쉼터다. 연둣빛 신록이 흘러내리는 지리산의 계곡들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시원한 물 한 모금과 간식으로 요기를 하고. 구름이 손짓하고 바람이 부르는 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노고단산장을 떠난 후 약7시간만인 오후1시반에 연하천대피소에 닿았다. 반야봉에 올라갔다 온 거리까지 합하면 12.5km를 걸었다. 연하천대피소는 지리산대피소 중 물이 제일 많고 맛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선 그냥 철철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사용하면 된다. 이 물은 흘러가는 곳이 남강일까 섬진강일까? 구름 사이로 햇빛이 살짝 비치니 기분도 날아갈 듯했다. 아끼는 팩소주도 한 개 헐어 반주했다.
식사 후 다시 1시간30분쯤을 걸어 오후4시40분에 둘째 날 숙소인 벽소령산장에 닿았다. 보슬비가 약간씩 내리고 바람도 불어 한기를 느낄만큼 쌀쌀했다. 이 산장은 샘이 한참 아랫쪽에 있어서 좀 불편하다. 쌀쌀한 기온 때문에 취사장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도 물을 길어와 남들에게 뒤질세라 빨리, 그리고 맛있게 저녁을 지었다. 우리의 전문산꾼이 준비해 온 특식 포장삼계탕은 소주 한 잔의 맛을 배가시켰다. 우리들 옆에서 넉넉히 가져 온 술을 즐기는 부부가 부럽지 않았다. 그들은 삼겹살까지 구어서 아이스박스에 가득 채워온 맥주를 펑펑 마시고 있었다. 뚱뚱하고 무뚝뚝한 남편에게 영광 있으라고 하면서 숙소로 갔다.
그러나 이 날 밤 우리를 포함한 모든 등산객은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 초저녁부터 산장이 떠나갈 듯 코를 골며 자는 위인과 그보다는 좀 약하지만 또 다른 두 사람 때문이었다. 특히 나머지 둘 중의 하나는 여자였다. 벽소령산장은 남녀가 같은 방에서 자지만 각 자의 침상에서 자므로 문제는 없다. 하도 시끄러워 몇 번이나 소리를 쳐서 깨우고 싶었지만 모두들 무던히도 참으며 밤을 새웠다. 한국인의 인내심이 승리한 한 밤이었다. <2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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