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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본체 할 걸!

수필생활

by 솔 뫼 2021. 6. 2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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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본체 할 수도 있었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 있는 공원은 평탄한데다 걷기에 좋은 트랙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걷거나 달리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트랙은 공원의 외곽을 따라 약간 비틀어진 땅콩 모양으로 나 있으며 거리는 1.2km쯤 된다. 게다가 울창한 수목이 트랙을 뒤덮고 있어 한낮에도 그늘이 진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걷거나 달린다. 어느 공원에서나 모두 이 방향으로 도는 것은 똑 같을 것이다. 그렇게 정착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간혹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안 된다는 법도 없으니 뭐라고 할 형편은 못 된다. 또 그들이 잘 못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허물을 잡는다면 그 공원산책로에 관활 기관에서 붙여놓은 대형 현수막 내용과 배치된다는 점 뿐이다. 거기엔 커다란 글씨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일방 통행">이라고 씌어 있고 활살표로 방향까지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왜 굳이 반대로 가야만 하는지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사람들의 성격탓일까?

오늘 아침에도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를 보니 문득 지난 번 살았던 동네에서 내가 했던 일들이 생각 났다. 그날 나는 상식과 안 맞는 행동을 한 두 사람에게 잘 난 체를 했었다. 물론 그냥 지나갔어도 될 일이었다.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달라질 게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그 시간 거기에서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것도 같은 날 아침에 두 번씩이나 그랬다. 내가 교양이 부족해서였던지 아니면 어쭙잖게 의협심이 과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두 당사자들에게 조금 미안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잘 못된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스스로 위안도 해본다.


지난 4월 어느 날의 일이다. 며칠째 계속되던 청명한 날씨가 그날 아침엔 잔뜩 찌푸렸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의 구름이 험상궂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기온도 상당히 서늘했지만 운동하기엔 좋았다. 아침 운동 나가는 길에 음식쓰레기를 수거함에 버리고 나오다 아주머니 한 분을 봤다. 그 여자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앞 벽에 커다랗게 써서 붙여놓은 안내문이 무안해 할 일이었다.

‘이 수도에서는 손만 씻으세요.’
‘아무리 깨끗해도 음식 찌꺼기 담았던 그릇은 씻지 마세요!’

내가 사는 아파트도 다른 아파트들처럼 재활용품들은 정해진 날에 내놓아야 하지만 음식물 쓰레기는 아무 날이나 내다 버릴 수가 있다. 냄새나거나 부패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비닐봉지나 허드레 그릇에 담아다 수거함에 내다 버린다. 그리고 손에 묻은 찌꺼기를 씻을 수 있게 바로 옆에 상수도 세수대가 설치돼 있다. 얼마 전 이 세수대의 하수구가 막혀 보수공사를 한 후 위의 안내문이 세수대 바로 앞 벽에 나붙었다. 그 후 거기에서 그릇을 씻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그 여자가 그릇을 씻고 있었다.

그 여자 때문에 손을 못 씻고 나오던 나는 기어코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그릇은 씻지 말라고 하잖아요!”라고 핀잔을 준 후 운동을 위해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내 뒤에서 그 여자가 뭐라고 말을 했는데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15분쯤을 걸어 나는 동네의 공원으로 갔다. 옛 시절 공군사관학교가 있었던 보라매공원이다. 그 공원은 넓기도 하지만 각종 운동시설과 운동장이 있고 숲과 정원, 연못까지 잘 가꾸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공원이다. 나는 그 공원의 외곽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걷거나 달린다. 때로는 잔디운동장 둘레로 만들어 진 탄성이 좋은 트랙을 달리기도 한다.

그 아침 산책로를 걷던 나는 생나무 울타리의 키 작은 나무들을 제치고 산책로로 나오는 또 다른 여자와 맞닥뜨렸다. 그 생 울타리 너머로는 산책로를 따라 잘 가꾸어진 정원과 잔디밭이 있다. 약간 낮은 곳에 경사지게 조성된 그 정원 너머엔 또 다른 산책로가 있다. 그 여자는 그 산책로에서 정원을 가로질러 내가 걷고 있던 산책로로 올라온 것이다. 물론 길이 아니고 그렇게 정원을 밟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이번에도 부지불식간에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거기는 길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다녀요?”
순간 여자는 무안했던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모기소리 만하게 “미안 합니다!”라고 하더니 빠르게 내 뒤쪽으로 지나쳐 갔다. 나는 뒤돌아서 그 여자의 뒷모습을 조금 보다가 계속 산책을 했다.

그런 행동을 하고나서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공연히 오지랖 넓게 행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런 말로 무안을 준다고 그 사람들의 행동이 고쳐질 런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도 성인인데다 나름대로의 교양이나 상식이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해서는 안 되는 사회적 규범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것이다. 또 그 시각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던 불가피한 사연도 있을 수 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일을 생각하며 걸었다. 비난받을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별로 잘 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왜 그런 일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의협심 강한 사람이라고? 못 본체 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엔 반대방향으로 걷는 사람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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