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틀간의 행복

수필생활

by 솔 뫼 2021. 5. 13. 11:51

본문

이틀간의 행복

 

도대체 무엇이 맘에 안 들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를 화나게 한 것 같진 않은데 속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토라질 대로 토라져버린 그 마음을 되돌릴 수가 있을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가 계속 엉뚱한 고집을 부리니 말이다. 하릴 없이 속만 태우는 가운데 시간이 흐른다. 창문 밖에선 천둥번개가 요란하다.

 

나는 그녀를 재작년1월에 만났다. 겨울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날 그녀는 내 곁으로 왔다. 동장군의 위세도 그 순간 사라져버리고 나에겐 기쁨과 반가움의 열기만 가득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무도 흉내 내거나 흠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순수한 사랑’이란 말을 자주 하고 들었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잘 몰랐다. 그저 개념상의 용어였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날 이후 나는 그 말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애교에 나는 즐겁기만 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예뻤고, 작은 몸짓이나 표정, 미소 하나에도 나는 꼼짝 못하고 빨려들어 갔다. 알 수 없는 말소리나 노래에도 나는 말 못할 기쁨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더 그녀를 편안하고 즐겁게 할까만 생각하며 지냈다. 왜 지금 이 나이, 세속 나이 70살이 될 때까지 이런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일찍 이런 사랑을 알았다면 내 삶의 모습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무척 아쉽다. 그런데 그처럼 예쁘고 사랑스런 그녀와 단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행운을 맞았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무려 이틀 동안이나!

 

맘껏 떼를 써서 애를 태우다가도 순식간에 예쁜 재롱으로 즐겁게 해주지요.

 

그녀는 올해 겨우 세 살 된 하나밖에 없는 내 외손녀다. 세 살 난 아이지만 어른들을 놀려먹을 정도로 말을 잘 한다. 생글생글 웃으며 품에 안겨 놀다가도 한 순간에 토라져 떼를 쓰고 고집도 부린다. 내가 그 이유를 몰라 당황해 하면 한 술 더 뜨기까지 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손녀의 행동인데도 전혀 밉거나 싫지 않으니 어쩌랴. 그래서 손주를 키워봐야 참사랑을 안다고 했을까? 아마도 이런 게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내리사랑’인가 보다. 이런 ‘내리사랑’이 있어 인류가 번성할 수가 있었을 것 같다.

 

손녀가 지휘하는 장난감 사단의 열병식입니다.

 

딸이 손녀를 출산하면서 나는 비로소 할아버지 반열에 올라섰다. 간호사의 품에 안겨 나를 포함한 우리 모든 가족들과 첫 상면을 할 때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유리창 너머로 눈도 뜨지 않은 채 강보에 싸인 아이를 봤다. 무언가 몸을 파고드는 찌릿한 것이 느껴졌다. 아내가 딸을 낳았을 때도 똑 같은 장면이었지만 그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전율이었다. 단지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의 축하인사에 기쁨보다는 부끄러움 같은 걸 먼저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침부터 병원에 와서 노심초사 딸의 해산소식을 기다리던 장인어른은 ‘공주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에게 “미안하네!”라고 하신 후 쏜살 같이 병원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당시만 해도 남아선호가 강한 때여서 그 어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오랜 기간 그 일이 섭섭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손녀를 대하는 나의 심정은 마냥 좋기만 했으니 세월이 변한 탓일까?

 

어느 때인가 음식점에서 사진을 찍으려니 여자답게 예쁜 모습을 지어보네요.

 

어쨌든 나는 예쁜 두 딸을 키웠지만 손녀에게서 느끼는 깊은 사랑과 귀여움을 못 느꼈던 것 같다. 남들은 딸을 둘이나 두었으니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냐고 했지만 말이다. 일에 쫓기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매력 없는 아빠로 살다보니 딸들에게 인기를 못 얻은 것 같다. 아이들이 자고 있을 때 나가서 잠이 든 후에 들어오곤 하는 바람에 며칠씩이나 아이들이 아빠를 못 보는 일도 많았다. 지금도 그 때문에 가끔씩 딸들의 질책을 받는다.

 

그처럼 인기 없었던 나에게 고맙게도 딸이 사랑과 귀여움이 솔솔 풍겨 나오는 요술덩어리를 안겨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한 해 동안의 육아휴직을 마친 딸이 복직을 하자 우리부부는 딸네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걸음마를 하고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손녀와의 사랑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세 해째를 살고 있다. 핏덩이는 이제 어여쁜 공주님이 됐고 자기의 주장과 호불호를 확실히 표현하는 어린이가 됐다. 딸은 출근하면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 준다. 우리부부는 저녁때쯤 어린이집에서 손녀를 데려와 딸이 퇴근하면서 데려갈 때까지 함께 지낸다. 손녀는 공휴일과 토요일, 일요일엔 엄마아빠와 종일 지낸다.

 

만세살되던 생일날 푸짐한 선물받고 신이 났군요.

 

그러나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날이 종종 생긴다. 손녀가 감기나 다른 증세로 열이 나고 아프면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 한다. 그런 날은 우리부부가 종일 돌보아야 한다. 이번에 내가 누린 행복도 그런 날이었다. 다만 이번엔 아내가 장기출타중이어서 내가 혼자 맡게 됐다. 알뜰살뜰하게 챙겨주는 할머니는 손녀를 편하게 해줘 손녀에게 인기가 높다. 그렇지만 육아에 서툰 나로서는 여러모로 손녀를 불편하게 해주었나 보다. 그래서 툭하면 떼쓰고 울고, 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행복한 웃음짓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틀 동안 손녀는 나에게 과자와 과일도 나누어 주고 그림책도 읽어 달라며 사이좋게 지냈다. 함께 어린이 TV도 보고 소꿉놀이도 했다. 때맞춰 체온을 재고, 약도 먹였고 기거귀도 몇 차례 갈아주는 사이 정이 들었다. 열이 높아지면 걱정이 돼서 딸에게 물어 해열제를 추가로 먹이기도 했다. 첫날엔 할머니를 찾았지만 둘째 날엔 ‘할머니는 공항에 있지?’라고만 했다.

 

셋째날인 오늘 마침내 열이 내리고 상태도 좋아져 어린이집에 보냈다. 처음엔 안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이 기다라는 어린이 집에 잘 들어갔다는 딸의 연락을 받고 나니 안도와 함께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오늘은 아무도 없는 집에 나 홀로 있어야 한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강력한 태풍 때문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까지 내린다. 아내는 아직 출타중이다.

 

손녀야, 할아버지가 심심해!

 

* 이 글은 수필전문 월간지 <좋은수필> 2019년11월호에 실린린 것입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시점과 관계 없는 시기에 촬영했습니다.

'수필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못 본체 할 걸!  (1) 2021.06.20
‘개가 물고 간다’  (0) 2021.05.16
이런 택시 기사 보셨나요?  (0) 2021.05.05
발칙한 며느리  (0) 2021.04.30
코로나 소동  (0) 2021.04.2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