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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물고 간다’

수필생활

by 솔 뫼 2021. 5. 1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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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물고 간다’

 

공룡그림이 예쁘게 그려진 어린이용 운동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조금 엉뚱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삶 대부분이 가정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살아가는 모든 날과 달이 ‘가정의 날’이고 ‘가정의 달’인데 어째서 ‘가정의 달’을 따로 지정했을까? 그건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구성원들 간의 정이 흐려졌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가족 간의 정을 되살리려는 취지에 따라 지정된 것 같다. 그 결과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등이 들어있는 5월이 되면 집집마다 다채로운 의식들이 펼쳐진다. 이 가정의 달에 나는 손녀에게 혼이 났다.

다섯 살짜리 손녀를 둔 나도 이런 날들이 오면 자의든 타의든 그냥 넘어가지 못 한다. 어린이날엔 손녀를 위한 행사를 해야 하고 어버이날엔 자식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런 날들을 통해 가족 간의 정이나 유대가 깊어지는 건 사실일 것이다. 손녀의 재롱에 웃고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려는 자식들에게 뿌듯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어버이날에 이루어지는 자식들의 효행이란 거의 비슷할 것 같다. 부모님 모시고 멋진 외식을 하거나 집에서 솜씨를 부려 음식대접하고, 얼마의 용돈도 드릴 것이다. 어린이날엔 아들딸이나 손주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데 선물 받을 아이가 어릴수록 그 일이 까다롭고 어렵다. 특히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 해 더 힘들다.

나 역시 그랬다. 올해 나는 다섯 살 난 손녀에게 따끔하게 혼이 났다. 물론 내 기준으로는 귀엽기만 했지만 말이다. 혼이 나고서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있음에 오히려 감사해야겠다. 다섯 살 꼬마의 생각이나 말이 그처럼 똑 부러지는 것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요즘 아이들의 언어발달이나 지적 성장은 확실히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보다는 빨라진 것 같다.

어린이날이 지난 어느 날 집사람과 함께  손녀를 데리고 대형 백화점에 갔다. 어린이집 수업이 끝났는데도 친구들과 더 놀겠다며 떼를 쓰는 아이에게 선물사준다고 꾀어 데리고 갔다. 마지못해 차에 오른 손녀가 무엇을 사줄 것이냐고 물었다. 손녀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계속 바뀐다. 뽀로로 캐릭터에서 시작해 레고, 문자나 숫자 모형, 각종 형태의 그림퍼즐, 해양구조대 옥토넛 등 끝없이 변한다. 일정기간 집중하다 이내 싫증내고 다음 것으로 넘어간다. 나는 그것들의 이름 외우기도 힘들 정도다.

 


요즘 손녀의 관심은 온통 공룡에 쏠려있다. 다른 것들은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수십 종류의 공룡들 모형을 보고 이름은 물론 초식인지 육식인지도 안다. 뿐만 아니라 그 공룡들의 습성까지도 나한테 설명한다. 내가 이름을 잘 못 발음하거나 습성을 모르면 가차 없이 혼낸다. 게다가 집에 들어오면 곧 바로 공룡만화TV를 켜라고 떼를 쓴다. 다 들어주자면 한이 없기에 달래고 달래 TV보는 시간을 줄인다.

무얼 사주겠느냐는 손녀의 물음에 예쁜 운동화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운동화 싫어. 공룡 사줘!”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백화점에 도착해서도 ‘공룡, 공룡, 공룡!’하며 따라온다. 신발가게 직원까지 합세해 설득해도 막무가내다. 결국 ‘오늘은 운동화만 사고 다음에 공룡 사자’고 어렵사리 달랬다. 손녀는 공룡그림이 그려져 있는 신발을 보고서야 마음에 드는 색깔로 선택했다. 어린이집의 같은 반 남자아이 것과 똑 같은 것이란다.

그런데 내가 혼 난 것은 집에 온 후였다. 거실에서 새 운동화를 신은 손녀는 신이 났다. 그리고 “이 신발은 집에서만 신겠다.”며 벗을 생각을 안 했다. 벗었다가도 곧 다시 신었다. 식사할 때만 벗어서 가지런히 놓았다. 나는 손녀에게 내일 신고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라고 했지만 안 된단다. 운동화는 밖에서 신는 것이라고 했더니 “실내화로 사용하면 된다.‘고 맞받아친다. 그래서 “신발을 방안에서 신고 다니면 개가 물고 간다!”고 했다. 그래도 신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딸이 일찍 퇴근해 손녀를 데리러 왔다. 엄마에게 신발자랑을 실컷 한 손녀가 “엄마, 거실에서 신고 다니면 강아지가 물고 가?”라고 물었다. 사태를 파악한 딸이 웃으며 “누가 그러든?” “할아버지가!”.
딸은 웃으며 “나도 할아버지한테 많이 들었어. 그런데 안 물고 가더라.”

나는 좀 떨어져 앉아 이 대화를 들으며 손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손녀의 얼굴표정이 화가 몹시 난 듯 보였다. 그리고 쏜살같이 내게로 달려와서 “할아버지, 나 놀렸지? 다음부터는 놀리지 마! 나 화났단 말이야!”라고 큰 소리로 혼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아이고, 요 귀여운 녀석!’소리만 입속에서 맴 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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