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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말을 걸다.

수필생활

by 솔 뫼 2021. 7. 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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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달속에 그 아이가 있었다.

달빛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어떤 점이 좋아요?"
나는 잠자코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 빛 사이로 달님도 환환 미소로 화답하는 듯했다. 이에 질세라 시원한 바닷바람이 우리들 사이를 소리 내며 지나간다.

음력6월 보름밤(2014년7월11일)의 달빛이 온 사방을 하얗게 감싸며 쏟아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희미한 별 몇 개만이 달빛 사이로 자신들의 존재를 힘겹게 알리고 있었다. 발아래로는 달빛이 만든 은색 옷으로 감싼 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낮에는 가깝게 보였던 건너편의 아름다운 경치들도 은빛 이불을 쓰고 저만치서 잠들어 버렸다. 요술공주가 은색마법을 부린 듯한 바닷가에서 나는 달빛 탄 왕자가 된다.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동에 있는 유명한 리조텔 대명콘도 앞마당. 평소 친하게 지내온 세 쌍이 철 이른 여름휴가 여행길에 나섰다. 좋은 구경하고 전망 좋은 바닷가 식당에서 즐겁게 먹고 마시며 여행 첫날밤을 맞았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일행들과 짐시 떨어져 콘도 마당의 테이블에 앉았다. 순간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히 일행들과 함께 거닐 때도 있었던 것들인데 이렇게 새삼스레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조금 전에 봤던 바다는 달빛 속으로 숨으려 하고 사면은 온통 고요한 달빛이 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공간을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가고 있다. 바람도 달빛에 물들어 하얗게 되었겠지.

원형 테이블 위에 내려앉은 달빛은 어느 새 나를 데리고 먼 옛날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 날 밤에도 오늘처럼 달이 밝았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날이었다. 우리들은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동네 뒤쪽 벌판가운데 공터에서 만났다. 논밭들 사이에 있는 그 공간에는 나무도 몇 그루 있고 잔디밭도 있어 낮에는 농부들의 쉼터였다. 그러나 외진 곳이어서 밤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다.
우리들은 벌써 몇 번째 이곳에서 남들 몰래 만났다. 학교생활, 취미나 영화이야기, 읽은 책 교환 등을 하며 한여름 밤의 열기를 잊곤 했다. 할 이야기가 없어지면 둘이서 손 꼭 잡고 가만히 보름달만 쳐다봤다. 그러고 있으면 달 속에도 그 아이의 보습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도 달 속에서 내 모습을 보았을까. 밤이슬이 내려 한기가 느껴질 때쯤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나갈 때처럼 들어갈 때도 서로 헤어져 각자 다른 길로 걸었다.

우리들은 한 마을에서 나서 아무런 거리감 없이 자랐고 학교엘 다녔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새 어색하고 어렵게 느껴진 건 한 해 전부터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다. 혹 골목길에서 마주 칠 때면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려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빨리 비켜갔다. 그렇지만 피하면 더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 볼걸.’하는 후회감도 들곤 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하교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읍내에서 3km쯤 떨어진 마을까지는 신작로를 따라가다 시골길로 조금 걸어가야 한다. 시골길로 접어들면 두 개의 개울이 있다. 그 중 첫 번째 개울에는 물도 제법 흐르고 버드나무 숲이 무성해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오후4시쯤 된 때라 집에 가는 학생들이 더러 있을 시간이었지만 그날은 그 아이만 앉아 있었다. 내가 그 앞을 지나가려니 그 아이도 일어나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손에다 조그만 쪽지를 건네주곤 쏜살같이 앞장서 마을로 가버렸다. 연분홍 편지지에 ‘저녁에 마을 뒤 감나무 아래서 기다릴게!’라고 적혀 있었다. 감나무는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고 조금만 더 가면 그 공터가 나온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비밀스런 만남은 이어졌고 가능하면 남의 눈을 피해 보름밤을 피해서 만났다. 그런데도 우리가 대낮처럼 훤한 그 보름밤에 만난 건 상당히 위험스런 일이었다. 그랬지만 며칠 전 헤어질 때 보름달이 밝을 때 꼭 한번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내 애기를 그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안 들키게 만나면 되잖아!’라던 그 아이의 말이 왜 그렇게 멋지게 들렸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날 밤 꽤 늦은 시간에 벌판가운데서 달빛의 환영을 받는 밀회를 즐겼다. 그리고 우리들은 들키지 않고 귀가 했었다. 물론 아무런 사연(邪戀)도 만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밤의 일은 너무 스릴이 있었다.

우리들의 만남은 그 후로도 장소를 바꾸어가며 이어졌다. 그러다가 다음해 겨울 내가 서울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우리들은 멀어졌다. 물론 방학 때 내려가면 만나기는 했지만 옛날의 우리들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 철이 들은 건지 내가 변심한 건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일은 10대 후반 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더구나 그 일이 더욱 애틋하게 떠 오른 것은 그 아이가 40여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결혼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리라.

달빛에 젖어 하염없는 시간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전화기 벨소리가 나를 깨운다.
“아니, 당신 어디 있는 거야? 혼자서 뭘 해? 다들 기다리잖아!”
너무 오래 고향의 달밝았던 옛길을 헤맸나보다. 후닥닥 털고 일어나 일행이 기다리는 방을 향해 달려간다. 어느 새 눈앞에는 시원한 맥주잔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2014년7월30일적성, 다른 인터넷 매체에 게재한 한 글입니다. 오늘 다른 글 검색하다 딱 7년전 오늘 쓴 글이 있어 올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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