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꽃들에도 가을색 짙게 느껴져
입추와 말복을 지나고부터 확연히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절기의 순환엔 빈틈이나 틀림, 속임수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머리가 숙여진다. 불과 몇일 전까지만 해도 찌는듯 하던 열대야로 아침까지도 30도를 오르내리던 일이 실감 안 난다.
내가 아침 운동을 겸해 다니는 공원의 산책길엔 각종 꽃이 많다. 봄의 진달래, 개나리부터 여름철의 나팔꽃과 분꽃, 늦가을의 국화, 코스모스까지 꽃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8월 중순인 요즘은 무궁화와 능소화가 특히 흐드러지게 피었다. 연분홍과 흰색 꽃이 대부분인 무궁화는 잎보다 꽃이 더 많아 보일 정도로 한창이다.
능소화도 요즘 짙은 주황색으로 담장이나 울타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능소화의 주황 색깔은 보색에 가까운 녹색의 잎들과 대조돼 멀리서도 선명하게 돋보인다.
무궁화나 능소화 모두 한여름철부터 피기 시작해 늦가을까지 이어진다. 요즘 이 두꽃이 한창인 것은 그만큼 가을이 가까와졌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한편 무궁화나 능소화처럼 요란하거나 많지는 않지만 길섶이나 낮은 곳에서 조용한 모습으로 피어 사랑받는 꽃도 있다. 길가 풀섶에서 덩굴을 벋는 나팔꽃과 가냘픈 꽃대를 무성한 풀잎들 위로 밀어 올려 피는 산원추리가 그들이다. 또 무성한 잎에 숨었다가 해질무렵에야 피어 밤이슬 맞으며 아침까지 견디는 분꽃도 있다.
짙은 보라색 나팔꽃은 20여일전 가뭄이 심해지기 전 어느날 산책길에서 처음 봤다. 그 후 2~3일동안 한 두 송이씩 피더니 피지 않았다. 가뭄 탓에 아침에도 잎들이 시들어 축 늘어진 모습이 애처로왔다. 그러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고 몇일전에 비가 한 차례 온 다음부터 다시 예쁘게 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늦가을 서리 내릴 때까지 찬 이슬 맞으며 풀섶에서 가냘픈 덩굴을 벋어 보라색 꽃을 피울 것이다.
요즘 피는 산원추리는 사람들이 가꾸어주는 화단에서 피는 것과 다르다. 화단의 원추리는 잎도 무성하고 여러 포기에서 한꺼번에 많이 피어난다. 그러나 산원추리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산속 풀들 사이에 숨어서 한 두 포기씩 자라 꽃대를 세워 몇 송이의 노란꽃만 피운다. 보는 이에 따라선 외롭게 느껴질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외딴 산속에 외롭게 홀로 피는 이 원추리꽃이 좋다.
그런데 정말 외롭게 핀 청초한 꽃 한 송이가 내 눈을 끌었다. 그건 잡초인 달개비의 작고 파란 꽃이다. 내 고향에서는 왕바랭이라고 불리는 잡초다. 바랭이풀 줄기보다는 좀 굵은 줄기가 땅 위를 기어 가듯 자라는 풀인데 마디마다 새파랗고 작은 꽃이 맺힌다. 별로 예쁘진 않지만 내게는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처럼 반갑고 정겹다. 비록 길가의 척박한 땅에서 자라 줄기나 잎이 약간 마르고 초라했지만 반가왔다. 이처럼 철따라 피어나는 각종 꽃들이 반겨주는 길이 나의 산책길이다. 들려오는 세상의 소식들은 거칠고, 예쁘거나 아름답지 못 하지만 나의 산책길은 예쁘다.
그렇게 걸어 가노라면 커다란 나무 아래 하얀 수국도 달덩이 같은 모습으로 피어 나를 반겨준다. 뿐만 아니라 짙은 보라색 꽃들 속에서 홀로 핀 새빨간 나팔꽃 한 송이도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그래서 나의 아침산책 길은 꽃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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