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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을 걷다-3차 B

여행이야기

by 솔 뫼 2022. 6. 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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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km넘는 길에 발바닥 물집 생겨도
훈훈한 시골인심 가슴 깊이 새긴 여행


◇ 포항 도구해수욕장∼포항 화진해수욕장
< 2022년5월25일-26일 >


< 셋째 날 >


귀신 잡는다는 대한해병들도 만났다. 해안을 모두 점령한 채 ‘산업의 쌀’ 철을 생산하는 공장의 담장이나 정문구경도 실컷 했다. 그런가 하면 바다를 둘로 나누며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한없이 뻗어나간 방파제도 지났다. 그 방파제 안쪽에 규모를 알 수 없게 넓게 펼쳐진 각종시설들이 포항영일 신항(新港)이란다. 이 모두가 70살을 넘긴 우리들의 기를 죽이고도 남을 규모와 위용들이었다.


5월25일 아침. 그 동네에서 딱 한 곳뿐인 ‘아침식사 가능한 집’에서 이른 식사를 하고 아침의 냉기 머금은 해풍을 맞으며 우리는 도구해변 길을 걸었다. 아침햇살에 빛나는 모래밭은 밝고 예뻤다. 특히 해변 모래밭에 지천으로 피는 갯매꽃의 보라색이 화사하다. 그 모래밭 가장자리로 길게 이어지는 똑 바른 나무 데크 로드를 걸으며 예쁘장한 원두막 쉼터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한참을 가니 ‘해병대’ 표기가 선명한 수륙양용 장갑차들 수 십대가 모래밭을 꽉 채웠다. 그 주변 구조물엔 얼룩무늬 군복의 병사들이 훈련준비 중이었다. 이 지역은 오래된 해병대 상륙훈련장으로 TV뉴스 등을 통해 눈에 익은 곳이기도 하다. 말로만 듣던 귀신 잡는 해병들을 한꺼번에 이처럼 많이 본 일은 없었다. ‘대한해병 만세!’다.


해병훈련장을 지나 어른들 키 높이의 해송들이 빽빽하게 자라는 둑길로 올라갔다. 해송들의 향긋한 송진향기 속에 젊은 해병들의 필승기운도 섞인 것 같았다. 20분쯤 걸어가니 해변모래밭을 가로막은 담장이 도시 안쪽까지 깊숙이 길게 이어졌고 ‘해파랑길’도 직각으로 꺾였다. 도로 옆의 공장담장은 붉은 넝쿨장미꽃들에 뒤덮였고 그 담장 너머에 높은 굴뚝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해변을 벗어난 길은 도심을 향해 한없이 계속돼 길손들을 피곤하게 했다. 그렇게 20여분을 가다 넓은 네거리에서 길은 오른쪽으로 계속됐다.


인도 쪽 자전거도로를 포함해 왕복10차선의 엄청난 대로를 따라 우리들은 북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대로인 만큼 쾌속으로 달리는 대형 트럭들의 소음도 엄청났다. 그런데 포도나무를 닮은 가로수가 시끄러운 길을 걷는 우리들을 위로하려는 듯 했다. 포도원처럼 만든 받침대를 타고 무성히 자라 그늘도 좋았다. 우리는 포도나무로 알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외래종 식물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이름이 기억 안 난다. 일제강점기 감옥에서 순국한 포항출신 이육사시인의 시 '청포도'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은 것 같다. 대로는 포항역을 거쳐 청송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란다. 우리는 도로의 오른쪽 보도로 걸었다. 형산강까지 끝없이 이어진 포항제철과 관련업종 회사들의 정문과 담장, 생울타리를 끼고 걷고 또 걸었다. 하도 시끄럽고 지겨워 도중에 편의점이나 휴게소를 찾아 대로 건너편의 다른 포철 관련회사 고층빌딩 아래층으로 갔지만 출입통제 구역이었다. 길에서 만난 친절한 젊은 여자의 잘 못 된 안내 탓이었지만 어쩌랴? 하릴 없이 빌딩근처 화단의 계단에 앉아서 잠시 쉬고 다시 걸었다. 형산강 남쪽 포항시는 거의 전부가 포철의 도시임을 실감했다.


해변을 벗어나 시내구간을 소음에 시달리며 지겹게 걸은 지 1시간20여 분만에 형산강다리에 도착했다. 근로자들이 타고 온 엄청나게 많은 오토바이들이 형산강 부근의 보도와 녹지대에 주차돼 있었다. 강폭은 생각보다 넓었다. 자전거와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별도의 다리를 건너 잠시 쉬며 간식도 했다. 길은 똑 바른 제방위로 바다를 향해 길게 이어졌다. 강 둔치에도 수많은 자동차들이 주차돼 있었고 파크 골프장 등 여러 종류의 체육시설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전거도로와 함께 가는 제방의 해파랑길엔 가로수 등 그늘이 전혀 없었다. 다만 간간이 조성된 화단의 만발한 장미들이 피곤한 우리들을 위로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40분쯤을 걸은 끝에 포항운하관이란 이름이 붙은 건물의 그늘에 도착했다. 형산강 둔치에 설치된 고가위에 원형으로 지은 이 3층 건물은 강물을 포항운하로 공급하는 모양이다.


10분쯤 더 가니 제방은 끝나고 송도해수욕장 넓은 해변이 펼쳐졌다. 깨끗한 모래밭을 배경으로 둥근 기단위에 얹힌 커다란 공모양의 조형물과 한 쪽은 붉고 한 쪽은 푸른 하트 모양의 예쁜 조형물이 푸른 바다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월계수 가지를 하늘로 받쳐 든 하얀 나체미녀가 우리들을 반겼다. ‘자유의 여상’이다.


여상 근처 인도에 있는 포스트에서 16구간을 마치고 17구간을 시작하는 스탬프를 찍었다. 그리고 송도해변에서 나와 포항항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바다에 붙은 도로를 걸었다. 항구의 송도 쪽 선좌들엔 대형 선박은 물론 날렵한 멋쟁이 쾌속 유럼선들도 여러 대 정박하고 있어 이국적 풍취가 느껴졌다. 마침 지방선거를 앞둔 때여서 출마한 후보자들의 유세방송이 한창이었고 우리에게도 한 표를 부탁하는 인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포항여객선터미널 근처 길가에 있는 반투명의 붉은 공모양 조형물을 지나 우리들은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영일대 부근 화단엔 각종 장미들이 만발해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바다위에 지어진 영일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도 하고 위에 올라가 시원한 해풍을 온 몸으로 맞으며 도보여행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피곤한 다리와 아픈 발도 주물러 주며 여유롭게 쉬었다. 그리고 지나온 길에 선거 운동원에게 물어 알아 둔 맛집(마라도)에 들려 정말 맛있고 시원한 물회를 즐겼다. 영일대해수욕장 북단 대로변에 있는 이 집은 이름에 걸맞게 음식이 맛있었다. 경주법주에서 빚은 시원한 막걸리도 즐거움을 더했다.


식사 후의 걷기는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시작됐다. 간간이 부는 해풍이 더위를 달래주기는 했지만 구경거리 별로 없는 길의 지루함을 달래기엔 부족했다. 이 길을 잘 아는 서울의 친구가 내게 전해준 말이 실감났다. 그는 “영일만에서 칠포해수욕장까지는 영판 심심한 길. 포항영일 신항의 간이음식점 잔치국수 말고는 먹을 데도 마땅치 않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음식점에서 나와 40여분 지루한 해변을 걸어 여남 스카이웨이를 본 것 외엔 지루한 길의 연속이었다.


스카이웨이는 바다수면 위에 설치된 원형 보행로인데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시원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니 밋밋하고 지루한 길이 계속됐다. 길 이름은 ‘영일만 북파랑길’로 바뀌었다. 약2km를 가니 죽천 해수욕장이 나왔고 또 50분쯤을 더 걸으니 흥해읍 해변에 조성된 포항영일 신항에 닿았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바다 깊숙이 길게 뻗어나간 방파제가 우리를 압도했다. 그 방파제 끝에 떠있는 어머어마 큰 두 물체가 궁금했다. 하나는 대형 유조선, 다른 하나는 폭이 넓은 해상석유시추선을 닮았다. 각각의 구조물 위엔 대형 크레인들까지 있었다. 근처 주민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울릉도에 건설하는 공항에 필요한 자재인데 여기서 조립해 거기까지 끌고 간다고 했다.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물건들이고 발상이었다. 이를 보니 오래 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항만공사를 하면서 필요한 모든 철구조물들을 울산에서 만들어 바지선에 싣고 갔던 일이 생각난다. 신항만의 규모도 짐작이 안 갈 정도로 넓었다, 신항만 안의 도로도 왕복10차선의 광폭이었다. 다만 지나다니는 차량들은 별로 없었다. 그 넓고 곧게 벋은 길을 우리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통과했다. 항만북단 방파제 근처에 포항국제컨테이너 터미널이 있고 그 북쪽에 용한1리 해수욕장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도 20분 넘게 걷고서야 겨우 항구를 벗어났다. 대로변의 한가한 편의점에서 빙과와 음료로 갈증을 달랬다.


밋밋한 해안 길은 정말 피곤했다. 나무 데크 로드가 많이 설치돼 있었지만 칠포해수욕장까지는 4km정도나 남았다. 발이 부르트고 작은 물집이 터져 고통이 심했다. 간간이 지나야 하는 모래밭은 더욱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런 길을 약 한 시간쯤 더 힘겹게 걷고서야 칠포해변 근처 숲속 포장도로에 도착했다. 포항영일 신항을 지난 지 약1시간30분, 여남 스카이웨이에서는 9km되는 거리였다. 10여분을 더 걸어 칠포해수욕장 포스트에서 18구간 시작 스탬프를 찍었다. 그 때가 5시10분. 여름해가 아직 하늘 높이 떠 있어 조금 더 북진(北進)하기로 했다.


칠포해변 모래밭이 끝나는 곳엔 높은 언덕이 있어 코에 닿을 듯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했다.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올라간 보람은 컸다. 눈 아래 펼쳐지는 해수욕장 주변의 절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마음껏 절경을 감상하고 20분쯤 더 가니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설치된 해오름전망대가 있었다. 이 일대의 칠포리는 1870년까지 7개 포대와 수군 만호진이 있었던 요새였다. ‘해오름’은 포항, 경주, 울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개통을 계기로 세 도시가 맺은 동맹의 이름이란다. 우리나라에서 가징 먼저 해가 뜨는 이들 도시가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해오름이 되자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그 꿈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해오름전망대를 지나 10여 분만에 우리들은 조그만 오도리 간이해변에서 셋째 날의 걷기를 멈추었다. 이날도 우리는 4만9200여 걸음 35km를 걸어왔다. 정말 힘들고 지루한 여정이었다. 어제의 자갈길과 오늘의 밋밋한 길이 피로를 더 안겨 준 것 같다. 다만 오늘은 지나온 어느 마을 편의점에서 만난 주민들과 가진 시간이 추억에 남을 것 같다. 빙과를 먹으며 쉬던 우리들에게 주민들이 막걸리까지 대접했다. 시골 사람들의 따뜻한 인심이 고마웠다. 그 주민들이 소개해 준 오도리 포구 음식점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그날이 휴업이었다. 가게 문에 적힌 전화번호로 여사장과 통화, 그 분이 추천한 언덕위에 있는 숙소를 정했지만 식사는 안 되는 곳이었다. 별문제 없을 것으로 여기고 바닷가로 내려가 여러 음식점을 들렸지만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시간은 7시쯤 됐다.


난감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정말 궁즉통(窮則通)의 반전이 생겼다. 마을로 내려가다 들일을 마치고 오던 아주머니를 만났었다. 그 아주머니에게 식사할 곳을 물었더니 내려가면 많다면서 “모두 다 안 된다고 하면 나한테 오세요.”라고 했다. 결국 여러 곳에서 허탕을 치고 찾아간 우리들에게 그 아주머니는 늦은 시간인데도 생선매운탕에 멋진 밥상을 차려주었다. 성수기엔 민박도 치는 집이었다. 우리들은 술도 주문했지만 자기네는 비싸게 파니 편의점에서 싸게 사와 마시라고 했다. 정말 고마왔다. 우리들은 다음 날 아침식사까지 예약하고 밤길을 걸어 숙소로 들어갔다.

< 넷째 날 >


다음 날 아침7시에 그 집에 가서 식사하고 나설 때 후덕스런 아주머니는 잠시 만났을 뿐인 과객들에게 더운 날씨에 조심하라며 청량음료와 물 티슈까지 챙겨 주기까지 했다. 철철 넘치는 후한 인심을 실감했다. 우리는 한없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길을 나섰다. 마당의 수도 가엔 분홍색 낮 달맞이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가뭄이 극심해 양수기로 논물을 대러 나간다는 바깥양반이 무척 안타까워 보였다. 그날도 흐리긴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로 나오니 구름 너머에 있는 아침해 그림자가 수면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도리에도 주상절리바위들이 있다. 그중 물위로 드러난 세 개의 바위가 까마귀처럼 검어 오도리(烏島里)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는 영일만 북파랑길을 따라 걸었다. 굵은 돌맹이들이 깔린 해안 길을 4km쯤 걸어 ‘이가리 닻 전망대’에 도착했다. 출입문이 열리기 10분전이라 기다리는데 여자관리인이 열어줘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 위에는 배의 조타실처럼 커다란 핸들이 있었다. 우리는 선장이라도 된 기분으로 조타핸들을 잡고 기념촬영을 했다. 위에는 뾰족하고 붉은 고깔모양 지붕을 한 예쁘장한 조형물도 있었다. 우리들의 기념촬영도 해 준 관리인은 경기도 용인에서 문화해설사로 일하다 선산이 있는 이곳에 와서 관리를 맡았단다. 부근의 토지가 전부 자기네 집안 소유이며 가까이 있는 두 마을이 합쳐져 이가리가 됐단다.


거친 돌들이 깔린 해변을 20여분 더 걸어 도착한 마을 입구엔 모내기를 마친 논물에 거꾸로 비치는 미루나무와 소나무들 그림자가 그림 같았다. 해안의 이정표는 오늘의 목적지 화진해수욕장이 7.4km 남았단다. 2km쯤 더 가니 월포해수욕장의 고운 모래가 우리들을 반긴다. 해변에 설치된 초생달 모양 조형물에 앉아 기념촬영도 하고 널따란 반원형 천막에서 쉬기도 했다. 해변 근처 개천에 있는 월포교의 오른쪽 난간에 높다랗게 서있는 하얀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다리를 건너 2km쯤 되는 송라해수욕장에선 자갈길을 힘겹게 걸었다. 거기서 바닷물에 손도 씻고 사진도 찍었다. 해파랑길 걷기에 나선 후 이날 처음 바닷물에 손을 씻었다.


햇살은 뜨거워지고 물집생긴 발은 정말 힘들었다. 계속 걸을 땐 통증이 덜 느껴지지만 잠시라도 중단했다 걸을 땐 더 힘들었다. 길옆 조그마한 밭에선 보리가 노랗게 익었다. 그 보리를 베어 노부부가 밭 옆의 길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 많이 본 정겨운 풍경이다. 길은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포장도로로 이어졌다. 향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마을과 소나무 우거진 고개를 지나 30여분쯤 똑 바로 가다 화진 해수욕장에 이르렀다. 아무도 없는 넓은 해변 모래밭에 높다란 의자모양의 하얀 파라솔 하나와 조개의 두 앞발을 닮은 반달모양 조형물 한쌍이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텅 빈 널따란 주차장 귀퉁이에 숨은 듯 서있는 포스트를 어렵게 찾아내 18구역 종점이자 19구역 시작 스탬프를 찍고 걷기를 마쳤다. 이 때가 12시15분, 이날도 2만2300여 걸음 20km나 걸었다.


이제 식사하고 서울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주변엔 아무런 음식점도 없다. 발이 불편해 더 걷기도 싫어졌다.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 검색으로 2km쯤 거리에 있는 음식점 여사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녀는 음식은 준비되지만 일손이 없어 차를 못 보낸다며 근처의 송라면 콜택시 번호를 알려주었다. 모두가 한 발짝도 더 걸을 생각이 없어 택시타고 그 음식점에 갔다. 마침 그 집은 근처에서 소문난 맛집 이었다. 여사장이 추천한 물회가 어제 포항의 그 집 못지않았다. 한 잔의 반주도 뒤따랐다. 마당엔 한낮의 불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손님들은 이제 우리들만 남아 있었다.


그 때 상상도 못 했던 일, 이번 여행의 마지막 신나는 반전이 일어났다. 일행 중 누군가가 여사장에게 송라면 버스승차장으로 가는 방법을 묻자 자청해서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한 것. 우리는 여사장과 여러 장의 기념촬영을 하고 그녀의 승용차에 탔다. 그 위에 또 한 번의 즐거움이 더 해졌다. 승차장으로 가는 도중 앞에서 가고 있는 우리가 탈 시내버스를 발견했다. 그 차는 종점인 포항 보경사주차장으로 가고 있었다. 시골버스는 운행간격이 길다. 여사장은 우리들이 종점에서 타고 편하게 앉아 갈 수 있도록 그 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나가는 다른 버스가 막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차는 우리들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차가 뒤쫓았지만 버스는 더 빨리 가버렸다. 결국 우리는 송라면 승차장에서 여사장과 헤어져 다음 버스를 타고 KTX 포항역으로 갔다. 이보다 더 고맙고, 신나고,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 해파랑길 4차 걷기는 6월13일-16일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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