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의 백발처럼 흰 눈도 곧 날리겠지!
매미소리가 한결 잦아들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요란하게 울어 제치던 그들이었는데 어느 새 이렇게 소리가 약해졌다. 더위에 지쳐 힘들어 하던 사람들이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난다. ‘말복도 지났으니 더위도 이젠 얼마 안 남았어!’라던 그 말. 그 말복이 지난지도 벌써 한 주일이 지났다.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도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침 운동 길에 맞는 바람은 상당히 시원해졌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쪽빛도 한층 더 짙어졌다. 그에 발맞추려는 듯 대화를 못 할 만큼 시끄럽게 울던 숲속의 매미들도 울음소리를 낮춘 것 같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느낌일 테지만.
그런데 잦아든 매미소리나 파란 하늘 못지않게 나를 즐겁게 해주는 예쁜이들이 나타났다. 내가 매일 걷고 달리는 공원이나 동산의 숲길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잘 보이지 않던 그들이 갑자기 붉은 옷을 입고 나온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무성한 녹색 잎에 가렸었거나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다가오는 가을을 보았다.
공원의 화단에서 봄이면 하안 꽃을 피워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산딸나무는 어느 새 빨간 열매들을 여러 개 매달고 나를 불렀다. 그 옆에선 아직 채 붉어지지 않은 열매들이 크기를 다투고 있었다. 또 내가 사는 아파트 정원에선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 하던 몇 그루의 사과나무들이 빨갛고 굵은 사과를 매달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그늘진 화단에는 무성하게 자란 옥잠화가 하얀 나팔모양의 길쭉한 꽃들을 무수히 피웠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걸쳐 피는 옥잠화는 강한 향기로 가을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물러갔다 다시 찾아와 전국 곳곳에서 물난리를 일으켰던 제2차 장마가 끝난 하늘은 한없이 파란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잎이 무성한 나무의 가지들 사이나 아파트촌의 동과 동사이 빈 공간을 따라 땅에까지 꼬리를 내렸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을 받고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는 땡감들 또한 가을을 재촉하는 것 같다. 벌써 세 살짜리 아가들 주먹만큼 굵어졌으니 곧 주황색으로 곱게 단장할 것 겉다. 가을은 그 감들의 주황색이 짙어지는 속도만큼 빨리 올 테니까.
한 물 간 장미원의 장미꽃들도 아침이슬인지 간밤의 빗방울인지를 머금고 시원한 바람에 한들거린다. 곧 닥쳐 올 찬바람 부는 계절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의 아름다운 색깔만큼은 제철 장미에 전혀 손색이 없다. 그 장미와 함께 한여름부터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짙은 자주색 나팔꽃과 길섶 풀밭의 이삭 팬 강아지풀도 가을을 맞을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이처럼 변함없이 피고 지는 꽃들에서 나는 빈틈없는 계절의 순환을 본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한 해에 두 계절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생로병사의 굴레를 쓰고 태어나 두 번 살지 못하는 사람의 한 평생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비유되곤 하나보다. 그렇다면 내 삶의 계절은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그저께 네 살 아래인 집사람의 7순이어서 자식들이 모두 와서 축하해주고 갔다. 나 역시 4년 전 똑 같은 축하인사를 받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40여년을 내 곁에서 고생한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함만이 교차될 뿐인 데! 66년전 아버지를 따라 읍내 초등학교에 입학하러 갔던 날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이제 멀잖아 머리의 백발처럼 하얀 눈이 내릴 내 삶의 겨울도 곧 닥쳐오겠지…!
< 2022년8월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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